309.
한 코스에 준비되는 음식의 양도 굉장하지만 역시나 코스 자체가 길다 보니, 모두는 서서히 벅찬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 음식으로 말하자면…….”
쉬융레이는 쉬지 않고 음식의 유래나 자신이 공수하기 위해 들인 공로들을 떠들었다.
단순히 돈만 들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값진 식재들을 매입하고 그것을 공수해 오는 과정에서 그가 들인 공은 장난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에 진심이라는 것이 처절할 정도로 실감할 수 있었고 그것은 나와 홍기도 같은 이번 식사 자리에서 본연의 몫(?)을 담당해야만 하는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부담이었다.
“이 건화(乾貨)로 말씀드리자면…….”
고대 중국에서 말린 전복을 화폐 대용으로 사용했기에 지금도 말린 전복을 건화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임무 완수에 대한 부담만 없다면 참 즐거운 자리인데, 마냥 즐길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물론 음식은 맛이 있고 무엇보다도 기대 이상으로 활약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나도 다소 마음이 편안한 상황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직 까지는 괜찮습니다.”
양성태는 내 질문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정말로 이런 슬림한 체형이면서 어떻게 이만한 음식을 모두 해치웠는지 모를 지경이다.
전체적으로는 내가 조금 더 먹었지만, 애초에 양성태와 나의 체격차를 고려하자면 정말로 굉장하다.
하지만 진짜로 굉장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푸하하하! 정말로 맛나군요! 오늘 제가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양손에 전복을 쥐고 껄껄 웃는 이걸영.
순간 나는 그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와 양성태가 둘이서 해치운 것과 맞먹는 양을 혼자서 감당해버린 것이다.
나와 양성태가 아직까지 그나마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이걸영의 덕분이었다.
오늘 한정으로 그야말로 빛이요, 소금이라 할 수 있겠다.
홍기도 역시 말은 못하지만 이걸영에게 무한한 감동의 눈빛을 보내기 바쁠 정도다.
“왜 그렇게 바라보나?”
“아니, 정말 멋지셔서요.”
나도 어디 가서 먹성으로는 크게 안 밀리는데, 이걸영은 정말이지…….
애초에 지금까지 이만한 식탐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던 것 인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정작 이 자리의 또 다른 주역이라 할 수 있는 홍기도는 이미 반 쯤 혼이 나가버렸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니까,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이미 한계를 넘어버렸군.’
화장실에서 듣기로는 이미 아이 팔뚝만한 중화햄을 해치우고 왔다는데, 애초에 한우 노래를 불러도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많이 먹지는 못하는 녀석이다.
“괜찮아?”
“응. 괜찮아.”
걱정하는 쉬린칭에게 억지로 괜찮다고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뭐가?”
“우리 아버지까지 함께였다면……. 좌우 펀치로 진작에 뻗어버렸을 거야.”
“너희 아버님도 이런 느낌이야?”
“좀 많이 다르긴 한데……. 어차피 우리가 느낄 고통은 비슷할 거야. 그러니 미안해 하는 것은 그날까지 일단 넣어둬.”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대화였다.
나조차도 알약쌈을 권하던 홍기도의 아버님과 나를 비웃던 홍시의 얼굴이 떠오르면 식은 땀이 날 정도가 아니던가?
“나도 이제 슬슬 좀 힘들군.”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쉬융레이가 이렇게 까지 정성을 들여서 준비했는데…….”
“그렇지. 원래는 우리가 접대 해야 하는데, 저쪽에서 반대로 이렇게 까지 성의를 보이는 데야. 우리가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조팀장과 함성준도 상당히 버겁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융레이가 애써 준비한 음식들을 앞에 두고 싫은 기색을 낼 수 없으니, 이를 악물고 조금씩 입에 넣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힘든 와중에도 유독 빛나는 한 사람.
“하하하! 정말 너무 맛있군요. 전복 이게 끝입니까?”
“제가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다음에는 더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저 이걸영이 이 자리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사실이 거듭 입증될 뿐이었다.
*
*
*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외부 미팅 건으로 함께 마중에 나서지 못했던 연아가 먼저 집에 돌아와 있었다.
“밥은 먹고 온 거지?”
“먹었지…….”
“나는 한 며칠 안 먹어도 될 것 같구나.”
조팀장은 소파에 쓰러지듯이 누워버렸다.
“혹시 모르니 액상 소화제라도 드릴까요?”
“아니, 그것조차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하긴…….”
나라고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정말 괜찮냐? 어마 무지하게 먹어 치우는 것 같던데…….”
“하하, 저야 뭐.”
쉽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미션을 완수해냈다는 안도감에 나는 다소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양성태 부사장도 상당하던데요?”
결국 내가 양성태 보다는 훨씬 많이 먹기는 했지만, 일반인(?) 기준에서 양성태가 먹어치운 양도 굉장했다.
정확한 리듬으로 조금씩 조금씩 쉬지 않고 음식을 해치우는 그의 모습에서는 일종의 장인 정신과도 같은 경건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 녀석도 원래는 상당히 소식하는 편인데, 가끔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먹어 치우더구나.”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것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그래. 이걸영이……. 그 놈의 먹성에 도움을 받을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당분간은 그 녀석 뭐 먹는 것에 잔소리 하지 말아야겠어.”
“솔직히 저는 상여금이라도 드려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냥 회식이나 한 번 시켜줘라. 우리는 왜 회식 없냐고 툴툴대더구나.”
“하! 그건 생각도 못했네요. 그런데 애초에 딱히 돈이 없어서 뭐 못 드시는 분들 안 계시지 않습니까?”
“이건 기분이지! 너도 아직 멀었구나.”
전직 회장이 두 명에 나머지도 창업공신급 임원 출신들인데도…….
그렇구나, 이건 내가 반성해야겠다.
“확실히 제가 제대로 생각을 못한 것 같습니다. 반성해야겠네요.”
“그래. 그런 것은 좀 신경 써주라고.”
“그런데 지금까지 팀 회식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응. 방금 말했잖아? 네가 안 챙겨줘서…….”
“제임스를 통해서 법인카드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팀장으로서 팀원 회식을……. 어? 어디 가십니까?”
조팀장은 그대로 방으로 사라졌다.
“회식 한번 시켜드려야겠네.”
“막상 바쁘다고 할 것 같은데? 애초에 아빠가 회식 같은 걸 좋아하지 안잖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은데?”
“회장이다 보니 낄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아직도 아빠를 몰라? 밖에서 사람들과 술 한잔 하는 것 보다 집에 와서 게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시잖아.”
“하긴 그렇긴 하지. 참 우리 장인 어른 건전하셔.”
내 말에 연아는 피식 웃었다.
“그보다 쉬융레이씨는 어땠어?”
“아, 그분……. 개성 있달까? 확실히 기도가 장인어른도 그분에 비하면 평범하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남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에 진심이시더라.”
“그렇구나. 그래서 분위기는?”
“아주 좋았지. 무엇보다 이걸영 상무님이 안 계셨으면 아주 곤란할 뻔했어.”
“잘 드셨다는 말이지?”
“엄청나게라는 단어를 더하면 네 말이 맞아.”
아무리 먹성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젊은 연배도 아니신데, 굉장한 식성이었다.
모두가 음식이 도로 넘어올까 봐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와중에도 껄껄 웃으면서 디저트까지 추가 주문하는 모습에는 정말로 나조차 겁이 날 정도였다.
“이 이야기 퍼지면 세종이 녀석에게 놀림 받겠네. 퇴물이라고.”
“크크큭. 재미있었겠네.”
“너는 정말로 운 좋았던 거야.”
“맛은 어땠어?”
“맛있기는 정말 맛있더라. 기름질까 걱정했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더라고. 역시 비싼 음식은 다르네 싶었어.”
“다행이네. 어쨌든 오늘 못 가서 너무 아쉽네.”
“운 좋은거라니까?”
“아니, 쉬린칭과 쉬융레이씨에게는 따로 감사드려야 하니까.”
“감사?”
내 말에 연아는 무릎에 올려두고 작업 중이던 노트북을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쪽에서 우리 클라우드 서비스에 들어갈 게임들을 매입하는 부분에서 막대한 투자를 약속했으니까. 솔직히 5년 이상 외부 투자를 모집할 계획이었는데……. 정말 손쉽게 해결되어 버렸네.”
클라우드 서비스에는 고객들을 유혹할 충분한 라인업 세팅이 생명이었다.
소일연의 기술력과 스타링크의 조력으로 단순 시스템 품질이라면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라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 서비스인 만큼 고객들을 유혹할만한 게임 라인업을 충실하게 갖춰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당장은 출범해도 시범적인 사업이 될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쉬린칭이 막대한 투자를 결심한 모양이었다.
“쉬린칭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투자를 결심한 거래?”
“원래도 쉬린칭은 투자할 종목을 찾고 있었어. 거기다가 카이두 대주주잖아? 자신들이 서비스하는 게임들의 수익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30%씩 가져가는 플랫폼 스토어의 수익성에 눈독을 드리고 있던거지. 실제로도 우리 클라우드 서비스 주식의 25%는 그녀의 몫이야.”
“25%……. 굉장하네.”
“그렇지. 우리가 75%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앰플과의 계약도 있고 결국에는 다른 투자와 여러 문제로 지분율은 계속 낮아질 테니까.”
“으음, 이런 일에 도움을 줄 수 없는 능력 없는 남자라서 죄송합니다.”
“크하하하! 그러게 능력 없네.”
기둥 소프트가 제법 많은 돈을 쥐고 있다고는 해도, 저 레벨의 사업에 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농담은 그만하고 오빠는 부디 멋진 게임을 만들어줘.”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
뭐지? 갑자기 연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건 분명히 만만치 않은 부탁을 할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불안한데?”
“오빠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
“선물? 갑자기?”
“응.”
“뭔데?”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겠지만, 비록 클라우드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 나이 대의 재산 수준으로는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랭킹에 오를 정도의 자산을 보유하게 된 상황이다.
덕분에 연아의 선물 운운에는 어느 정도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뭔데 말해봐.”
“오호! 당당하네?”
“내가 뭐 때문에 돈 벌겠습니다. 우리 여자 친구님 호강시켜 드리려고 버는 거지요.”
“헤헤, 멋진 말이긴 한데 돈이 필요한 선물은 아니에요.”
“그럼 뭔데?”
“게임 좀 만들어줘.”
게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게임 개발사 회장이 사장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게임을 만들어 달라는 말에는 부쩍 호기심이 생겼다.
다름 아닌 연아가 지금까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무슨 게임?”
“무슨 게임인지는 오빠가 정해도 되는데……. 일단 최소 3개는 필요해.”
“3개? 최소?”
“응. 아무리 생각해도 라인업이 부족해. 그래서 말인데, 3개 프로젝트 동시 진행 가능하지?”
“우, 우리 결혼 안 합니까?”
지금도 일에 치여서 결혼이 치일피일 미뤄지고 있는데, 게임 3개를 동시에 개발하라니?
“이것만 끝내고 하자. 응? 응? 응?”
3개 프로젝트 동시 진행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 그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