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좋은 아침입니다.”
주말까지 포함해서 약 5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홍기도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휴가는 즐거웠냐?”
“훗……. 대표님?”
“응?”
“저는 회사가 좋은 것 같습니다.”
-투두툭!
홍기도의 갑작스러운 멘트에 양성태가 들고 있던 서류들을 바닥에 쏟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나조차도 양성태가 흘린 서류들을 줍기는커녕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대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홍기도가 지금 회사가 좋다고 한 건가?
“너 누구냐?”
“재미없어요. 그런 농담……. 잠깐만요. 왜 갑자기 명패를 들어 올리시는 거에요. 대표님 손에 그런 묵직한 물건이 들리면 신고 당해도 할 말 없는 거 아시죠?”
“일단 설명부터 해봐.”
“무슨 설명이요?”
“홍기도는 어떻게 된 거냐? 넌 뭐 중국에서 개발한 안드로이드라도 되냐?”
“후우……. 그런거 있으면 한 대 구입하고 싶네요.”
홍기도는 무척 초췌한 표정으로 창문 밖을 향해 아련한 시선을 보냈다.
대체 이 녀석 휴가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아니지…….
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짚이는 것이 없지는 않다.
쉬융레이와 홍기도 아버님의 조합이라면, 매일 삼시세끼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 이제 일을 시작해보죠!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홍기도는 의욕적으로 손바닥을 비볐다.
진짜 무섭다.
양성태는 아직도 서류를 떨어트린 모습 그대로 굳어 있을 정도였다.
“부사장님……. 부사장님?”
“네? 아! 네.”
내가 두 번이나 부르자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양성태.
“조금 전 일은 못들은 것으로 하지요. 이 바쁜 시기에 저 녀석의 트랜스포밍까지 걱정하다가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양성태는 한 발 늦게 서류를 주웠고 홍기도가 냉큼 그것을 도왔다.
“잠깐만요. 게임 3개 동시 개발 프로젝트? 이거 가능해요?”
“그냥은 불가능하지.”
“흠……. 재미있겠군요. 한동안 바빠지겠네요.”
“하하하. 네가 입을 열때 마다 점점 무서워지니까. 너 그냥 한동안 집에서 쉴래?”
“아! 진짜 왜 그래요!”
결국 홍기도가 빼액하고 소리쳤다.
잠시간의 소란이 지나고 우리는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거 보기만 해도 머리 아파지는 계획이네요.”
“그래.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어.”
맥베스에서 차기작 하나를 개발하고 기둥소프트 역시 자체적으로 하나를 개발.
그리고 남은 하나는 외부 스튜디오를 영입해서 개발.
“마굴팀이 개발중인 머신 라이더는 어쩌고요?”
“그 부분을 문상무님과 협의를 봐야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문상훈을 마굴팀에 접목할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맥베스야 인원수가 상당하기에 차기작 착수에 문제가 없다.
아니, 연아의 계획이 아니었더라도 맥베스는 차기작 개발을 시작할 타이밍이다.
개발은 초기와 중기가 미친 듯이 바쁜 대신에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리소스를 제외한 기타 인력에 여유가 생긴다.
따라서 여유 있는 인력을 균형 있게 배치하여 맥베스와 기둥소프트의 인력들이 2개의 프로젝트를 다시금 진행 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컨트롤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역할을 문상훈에게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거 문상무님께는 전달하셨나요?”
“어떨 것 같냐?”
“아침에 오는 길에 콧노래까지 부르시던 것을 보아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딩동뎅. 현재 문상무님은 그저 차기작 프로젝트를 컨트롤하는 줄만 알고 계시지.”
나는 작성이 완료되었으나, 아직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은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거 보냈다가는……. 문상무님 고혈압 같은 것은 없으시겠죠?”
“지난번 건강 검진 결과가 나이보다 10년은 젊게 나왔다며 자랑하셨으니까, 큰 일은 없으시겠지.”
“그럼 보내죠.”
“어?”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홍기도가 대뜸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야, 이거 일단 상황 좀 보려고…….”
“우리 지금 바쁘잖아요.”
“바쁜건 맞는데…….”
“그러면 망설일 시간 없죠. 빠르게 처리해야죠.”
“그래도 인마, 왜 네가 누르냐!”
“원래 대표님 메일 보내는 것은 비서인 제 역할이죠. 뭘 새삼스럽게…….”
아…….
듣고 보니 맞는 것도 같다.
“그럼 일단 그쪽은 문상무님 오시면 처리하면 될 거고, 일단은 스파이스와 머신 라이더 개발 일정 조율이 최우선이겠네요.”
“그렇지.”
“그럼 제가 일정표 좀 짜볼게요.”
“네가 일정표를 짜겠다고?”
“왜요? 전에도 한 두 번 해본 적 있었잖아요.”
예전 회사에서 홍기도와 단 둘이 외주개발팀을 굴리던 무렵에는 우리 개개인이 메인디렉터나 다름 없어서 개발 일정까지 도맡아서 작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홍기도는 그동안 그런 일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일정표처럼 손 많이 가고 골치 아픈 일은 죽기 보다 싫어하던 녀석이었는데…….
“진짜 무슨 일 있었냐?”
“그냥……. 일이 하고 싶어요.”
나는 더 이상 홍기도 녀석에게 질문할 수가 없었다.
*
*
*
“이번 프로젝트는 아예 문상무님이 주도하신다고요?”
최기환의 질문에 문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시간이 촉박한 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해. 일단 너희 쪽 팀은 완전히 차기 프로젝트로 옮겨야 할 거야.”
문상훈의 말에 최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수순이니까.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것은 시간이 촉박하다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 프로젝트가 있기는 하던가?
“대체 시간이 얼마나 촉박한 겁니까?”
“AAA급 게임인데 최대 1년 반.”
“네?”
최기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아, 물론 표세인 대표님처럼 전권을 잡고……. 아니, 그래도 수정한 번 없이 완벽하게 조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표세인 대표님 외에는…….”
최기환은 벌써 몇 번이나 표세인의 능력을 확인했다.
표세인의 개발 속도는 가히 경의적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수정이 필요 없는 완벽하게 짜여진 기획에 있다.
물론 그 이상으로 전권을 잡았기에 그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밀어붙이며, 맥베스라는 거대 기업의 모든 맨파워를 집중 시킬 수 있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과연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이 가능할까?
한 명의 뛰어난 에이스의 능력을 보고 난 후에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은 결과 값을 기대하는 것은 회사로써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런 경우는 결과가 좋지 않다.
최기환은 살짝 걱정이 됐다.
“그게 가능할까요? 이거 표세인 대표님이 아니면…….”
“우리라고 언제까지 표세인 대표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지 않나?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반드시……. 응?”
때마침 사내메신저를 통해 업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문상훈은 대수롭지 않게 그 메일을 열었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상무님? 갑자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 이거…….”
갑자기 식은땀까지 흘리는 문상훈을 보며 최기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삼인방 스튜디오와 기둥소프트 맨파워를 컨트롤해서 새로운 차기작 개발을 컨트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밖에도 여러 문구가 있었지만 결국 포인트는 하나였다.
기어코 표세인이 칠층 마굴팀과 자신을 옭아매 버린 것이었다.
“표세인 대표……. 정말로 이러긴가…….”
“대체 왜 그러십니까?”
조금 전까지 어떠한 역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목표를 이루겠다던 문상훈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강력한 정신 공격에 당해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홍기도의 손끝에서 시작된 파장은 단순히 문상훈에게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문상무, 거기 있나?”
“헉!”
낯익은 목소리…….
조회장의 등장이었다.
“회, 회장님!”
“클클, 회장은 무슨, 이제는 팀장이야. 그만 적응하라고.”
“아, 그랬지요. 죄송합니다. 이게 쉽지가 않네요.”
최기환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팀장님, 설마 표세인 대표에게 메일을 받고 오신 겁니까?”
“그래.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지.”
“으음……. 이거 제가 요청한 것 아닙니다. 저는 추호도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유감? 지금 무슨 헛소린가?”
조팀장은 전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문상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왕군 사천왕 답게 정신 좀 차려.”
“네? 그게 무슨?”
“우리가 표세인이 더러 마왕이라고 했더니, 자네와 양성태가 사천왕이라더만, 그정도 감투 받았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크으……. 역시 문상무님……. 표세인 대표님께도 지극한 신임을 받고 계시는군요.”
속사정 따위는 까맣게 모르는 최기환은 그저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문상훈을 바라볼 뿐이었다.
“으흠, 자네는 이만 가봐. 회……. 아니, 조팀장님과 잠시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으니까.”
어차피 이야기가 시작되면 마굴팀 앞에서 자신의 체면 따위는 산산이 부서질 것이 뻔한지라 문상훈은 재빨리 최기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곧장 저희 스튜디오 인원들에게 할당된 업무들 이관작업 지시하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돌입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역시 최기환이야. 아주 훌륭해. 문상무가 아주 잘 키웠어.”
“감사합니다.”
최기환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 숙여 인사 한 후 자리를 떠났다.
“자, 이제 우리 둘 뿐이니……. 긴밀한 대화를 나눠볼까?”
“예. 경청하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쉽지 않지요. 노동청의 감사를 각오할 수준으로 크런치를 밀어붙여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맞아. 시대가 달라졌지. 예전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개발엔진의 수준도 기타 인프라도 부족하던 시대에 MMORPG를 개발하기 위해서 개발사들은 경쟁적으로 직원들을 쥐어 짰다.
MMO와 모바일 초창기 국내 게임 개발사들의 황금기의 이면에는 이러한 개발자들의 피와 땀이 베어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도 변했고 비대해진 게임 개발사들은 예전과 같이 직원들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 기간이 길어질수록 개발비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복지와 비용 절감.
결코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두 가지 안건은 언제나 저울 양쪽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지.”
조팀장은 슬며시 미소지으며 문상훈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다소 부담스러웠기에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던 문상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표세인이는 똑똑한 녀석이야.”
“네. 그거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지금까지 표세인이 보여준 놀라운 업적들을 열거할 것도 없이, 표세인이라는 존재의 영민한 두뇌는 종종 주변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곁에서 그것을 지켜본 두 사람 모두 그 점에 동의했다.
“그런 표세인이가 굳이 우리와 자네를 엮었어.”
“그, 그렇지요?”
다소 이해가 안 되는 탓에 문상훈의 반응은 살짝 어리바리했다.
“문상훈 상무.”
“네.”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네?”
기회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맥베스의 미친개 문상훈이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지. 지금이야 표세인, 표세인하고 떠들지만……. 모두가 이건 무리다 싶을 정도의 일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하지만…….”
조팀장의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굴팀이라면 어찌 자신이 마음껏 채찍을 휘두를 수 있을까?
“내가 면죄부가 되어주지.”
“면죄부요?”
“어떤가? 전직 회장부터 임원들까지……. 그런 쟁쟁한 이름값 따위 아랑곳하지 말고 미친개의 본성을 유감 없이 드러내 보라 이걸세.”
“제, 제가 어찌…….”
“내가 보증하지. 반대로 이 프로젝트가 엎어지면……. 자네는 지금 그 불편함을 핑계삼을 생각인가? 그것이 천하의 문상훈이의 방식이야?”
조팀장의 말에 문상훈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말은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결국 프로젝트를 실패한 뒤에 핑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던가?
“천하의 문상훈이에게 면죄부라……. 감당 가능하시겠습니까?”
순간 달라진……. 아니, 그동안 숨겨져있던 들개 같은 본성이 고개를 치켜든 순간!
조팀장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래야 문상훈이 답지. 눈치 보지마. 미친 듯이 들볶아. 결과만 내라고……. 반대로 결과를 내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우면 지금 말하게. 지금이라면 내가 전부 덮어줄 수 있네.”
“조팀장님.”
“그래. 말하게.”
“이제부터 전 회장님이라는 사실은 잊겠습니다. 저 문상훈이의 관리 인력이 되시는 겁니다.”
“……이거 짜릿짜릿하구만. 한동안 심심하지는 않겠어.”
조팀장과 문상훈은 서로를 마주 보며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