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이 시간부로 우리는 한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문상훈은 마굴팀과의 회의에 앞서 가볍게 분위기를 전환했다.
“흥, 우리랑 있기 싫은 것이 아니었어?”
“그렇지. 나름 챙겨주려고 했더니, 냉큼 달아나기나 하고 말이지.”
“이러다가 또 표세인 대표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하는 거 아니냐 이거지.”
이걸영의 말에 함성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하하,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이라니요. 저 문상훈입니다. 그런 쩨쩨한 남자가 아닙니다.”
문상훈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마굴팀 반응은 심드렁했다.
“자자, 헛소리들은 이쯤 하면 됐고, 일 이야기나 하자고 문상무 말이 맞아. 지금은 모두 힘을 합쳐서 달려야 할 시점이야.”
“아직 머신 라이더 출시도 안 했는데, 너무 급박한 것 아닙니까?”
함성준의 말에 백용현은 피식 웃었다.
마굴팀 멤버들이 원래 어떤 위치에 있던 인물들인가?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직접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을 못 한다고 벌써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다.
“잔말들 말아. 이게 좋아서 다시금 이곳에 둥지를 튼 것 아닌가. 개발자로서의 시절을 그리워했던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요.”
“네, 뭐…….”
백용현의 말에 이걸영과 함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말은 아니었다.
이런 끊이지 않는 퀘스트와 같은 회사 업무 루틴도 그들이 바라던 것 중에 하나가 아니었던가?
의외로 사람이란 위에서 지시 내리는 것 보다 내려오는 미션들을 하나씩 수행해나가는 것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지시를 내리는 입장이 되어보지도 못한 젊은 개발자들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마굴 멤버들이 이제와 개발자로 복귀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바랐던 것이 컸다.
“일단 앞으로 우리 프로젝트의 컨트롤은 문상무가 맡는다. 그러니 다들 괜히 괴롭히거나 하지는 말고 잘 따르라고.”
“에이, 저희가 언제 괴롭혔다고…….”
“어허.”
조팀장의 짧은 일갈에 이걸영과 함전무는 입맛을 다시며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정말로 일을 할 시간이었다.
“일단 제 계획부터 말씀드리자면 일정표에 있는 이관 작업 일주일. 일단 이것부터 줄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냥도 벅찬텐데 그걸 줄여?”
문상훈의 말에 모두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부분에서 템포를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시간이 필요할 때 발목을 잡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프로젝트 전체의 핵심 멤버이니, 제 생각에는 메인 코딩을 담당하는 한부장이 이관 작업을 도맡아서 진행한 다음 그것을 끝내고 이쪽으로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문상훈은 말미에 한명수를 바라보았다. 마굴팀내에서야 어느 정도 직급 없이 지내던 한명수였지만(물론 직급상 본인이 가장 높다), 본사 상무인 문상훈 앞에서는 가급적 말을 삼가고 있었다.
“저도 그게 옳다고 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발이고 남은 마무리와 버그 수정은 QA팀과 프로그램팀이 맡아서 조율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듣자 하니, 이번 프로젝트는 시간도 무척 촉박하다면서요.”
한명수의 말에 문상훈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급 인사라면 남은 마무리 작업을 일임하는 것에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봅니다. 다들 동의하십니까?”
문상훈의 질문에 마굴팀 전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일이 동의를 구할 필요 없네. 그러면 한명수 부장.”
“네.”
“자네는 가보게, 지금도 작업 중이던 것을 손 놓고 달려온 것 아닌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비록 갑작스러운 회의지만, 워낙 구성원들이 전 임원들인 덕분에 임원회의에 참석한 심정으로 있던 한명수가 멋쩍게 되물었다.
“그럼, 안 그래도 바쁜데……. 사소한 것들 일일이 신경 쓸 것 없어. 이제부터는 정말로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까. 자네도 오직 일을 마무리하는 것. 그것 하나만 명심하고 움직이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명수는 주섬주섬 자신이 들고 온 물건들을 챙긴 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럼 일단 이관 작업은 한부장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고……. 남은 것은 개발 프로세스에 관한 것이겠군.”
“혹시 계획 중이신 것이 있습니까?”
“나는 없어. 하지만 표세인이는 있는 것 같더군.”
“표세인 대표가요?”
“그래.”
조팀장은 이걸영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가 노트북에 연결된 프로젝터를 켰다.
“연동형게임?”
첫 타이틀부터 다소 모호한 내용인지라, 문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고민할 것 없어. 그냥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게임을 2개 만들자는 거야. 그리고 한 게임에서의 선택지가 다른 게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방식이지.”
“아……. 흥미로울 것 같지만……. 굳이?”
이미 촉박한 시간 안에 AAA급 게임 개발을 완수해야 한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굳이 더 복잡하고 큰 효과도 예상되지 않는 방향성을 잡았다는 것이 다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른 게임과의 연동이라면……. 이거 스토리라인 규모와 복잡성이 차원이 다르게 어려워지는 것 아닙니까?”
단순히 A라고 말하면 되는 상황을 두 게임의 선택지에 따라서 B, C로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텍스트 몇 개 추가 정도의 일이 아니다.
조건식을 달고 다른 게임의 세이브 파일을 연동해서 즉각적으로 계산하고 수행해야하는 것.
“너무 복잡한데요. 이건……. 솔직히 좀 악수라고 여겨집니다만…….”
문상훈 역시 개발자다. 단순한 도표를 얼핏 본 것 만으로도 표세인의 계획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곧장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2개의 게임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힘들 수 있다.
오히려 표세인이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을 정도.
그리고 이런 반응은 비단 문상훈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모두 동의한다는 듯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클클, 나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지. 솔직히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표세인이만 아니었다면 더 길게 듣지도 않았을 거야.”
“아……. 그럼 뭔가가 있기는 있다는 거군요.”
“그래. 있더라고…….”
조팀장은 다시 한번 이걸영을 향해 손짓했고 다음 화면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없으니 포인트만 짚어서 말하겠네. 일단 같은 세계관일 경우에 리소스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똑같은 도시를 계속 다닐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주 무대는 다르겠지만 여러 부분에서 겹치는 부분에서는 공임을 줄일 수 있겠지. 일단 이 부분은 장점이라기 보다는 개발 부피를 다소 완화할 수 있는……. 단점 완화 정도로 이해해 주게.”
“일단 알겠습니다.”
기획과 프로그램킴의 업무 과중이 늘어나는 대신 그래픽 리소스는 줄일 수 있다는 건가? 문상훈은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뭔가를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시스템 적으로도 상당 부분 겹치겠군요.”
“그렇지. 그 점에서도 개발 부담을 덜 수 있지.”
“하지만 그건 확장팩 개념 아닙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인 소켓몬 같은 경우는 항상 두 가지 색상의 타이틀을 출시하지. 등장 몬스터 몇 가지만 덧붙여서 말이야.”
“그거……. 굉장히 욕먹는 상술아닙니까? 표세인 대표가 그것을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요?”
언제나 게이머 친화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표세인이었기에 그런 방식을 옹호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니야. 이건 오히려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방식에 가까워. 이건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고 표세인이가 예시로 들려준 이야기일세.”
조팀장은 손을 한 번 더 흔들어 다음 화면으로 이동했다.
“왕국을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부수려는 자?”
“서로가 다른 위치에서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지.”
“잠깐! 설마 이거?”
“그래. 맞아. 이거 단순히 본인이 2번 플레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야.”
서로 다른 게이머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표세인이 내건 연동형 게임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세이브파일을……. 아무리 클라우드 저장 시스템이라고는 해도……. 아!”
“그래. 이제야 생각해낸 모양이군. 나보다 훨씬 낫군. 나는 설명을 듣고 서야 알았어.”
조팀장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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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형 게임의 핵심은 이 게임들이 모두 저희가 서비스할 클라우드 시스템으로 제공된 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이브 파일 자체가 저희 손에 쥐어지는 것이죠.”
“그렇다는 것은…….”
“네. 설계 단위부터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트리거를 잘 계산해 놓기만 한다면 완전 실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구획 단위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은 가능하죠.”
“만약 퀘스트를 줘야 할 NPC를 상대가 해치운다면……. 뭐 이런 건가?”
“네. 그렇게도 가능하죠.”
“그렇군……. 이건 상당히…….”
표세인의 이야기를 들은 조팀장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지난번 게임의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것이었군.”
미나모토 시게오는 얼핏 유저 친화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텐도 박스의 행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과거 8비트, 16비트 게임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부터 텐도 박스는 자신들의 게임기에 게임을 출시하는 개발사들에게 가혹한 허들과 요구 사항을 강요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현재에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임에도 특정 몬스터들의 등장 여부를 미끼로 완전히 같은 게임을 2개 출시하는 등의 상술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표세인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어떤가?
이것은 단순히 리소스 공유만을 위한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아이디어를 위해 같은 리소스를 공유하는 2개의 타이틀이 필요한 것이었다.
“지난번 E3에서 미나모토 시게오씨의 철학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유저 경험, 색다른 도전. 모두 맞는 말이지요.”
“흠…….”
“하지만 네러티브의 힘을 약소 평가하는 그분의 방식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에 시스템적 특이성 말고 네러티브적인 장점도 있다?”
“이미 스쿨런에서 해본적 있지 않습니까. NPC 상호작용 시스템 말입니다.”
“아! 기획팀 태반을 갈아 넣었던 그거로군.”
“맞습니다. 이건 그보다 더욱 강렬할 겁니다. 게임과 영화의 차이는 그저 주어진 것을 전달 받는 것만이 아닌 보다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부분이니까요. 그리고 이 시스템은 그것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덤으로 멀티 기능도 있고 말이지?”
“네. 맞습니다.”
멀티 기능을 제외한다면 연동형 게임의 가치는 단순히 1과 2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그저 앞서 플레이한 결과가 적용된 게임이다.
“하지만 클라우드 서비스입니다.”
“응? 갑자기 그게 왜?”
“누군가와 이 게임을 함께 플레이 하느냐에 따라서 경험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회차 플레이인가?”
“네.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능하다면 사후 지원으로라도 보다 다양한 진행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확실히……. 그것이 클라우드 시스템을 가장 잘 살리는 방법일 수도 있겠군.”
“네.”
“하지만 이거……. 개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기초 시스템은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뭐?”
대체 어느새?
“함송희 선임연구원에게 오래전부터 독립 프로젝트로 준비시킨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빛을 볼 차례지요.”
“너……. 대체 몇 수 앞을 내다 보는 거냐?”
조팀장은 살짝 소름까지 돋았다.
“앞을 내다 본 적 없습니다. 그냥 제가 원하던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준비했던 일입니다.”
표세인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초능력이라도 생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