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아, 아이가 생겼다고?”
“응.”
조팀장의 말에 연아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조팀장은 떨리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한걸음 내딛으려다가 다시 멈추었다.
하는 양으로 봐서는 연아를 포옹하려던 것 같기는 한데, 자식들과 워낙 드라이 한 관계로 살아온 탓인지 제동이 걸려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슬쩍 팔을 뻗어 조팀장님을 감싸고 남은 팔로는 연아를 감쌌다.
그러나 남은 두 사람 역시 내 의도를 깨닫고 서로를 품에 안았다.
“장하다. 장해. 정말로 기쁜 일이다.”
마음속의 격정을 억지로 내리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여실히 전해진다.
정말로 서툰 사람이다.
조팀장도…….
“고마워요.”
그리고 연아도…….
사실 정말로 이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다.
조연준도 제임스도 이런 감정 표현에는 영 재주가 없지 않던가?
물론 제임스의 경우는 자신의 가정에서는 다른 사람처럼 달라지기는 한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바빠지겠구나.”
“바빠져요? 그러면 안되지 않나요? 연아는 이제부터 조심해야…….”
“그게 아니라 결혼식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냐. 아이까지 만들어 놓고 언제까지 소꿉장난 할 셈이야.”
“아…….”
조팀장의 지적에 나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생각해보면 이게 모두 내 잘못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괜한 내기 같은 것으로 너희의 관계를 공표하지 못하게 한 것 부터가 지금까지 너희가 결혼식을 치르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싶어서 그간 전전긍긍했었다.”
솔직히 그게 아니었더라도 연아와 나부터도 결혼식에 게을렀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동거까지 시작한 이후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더더욱 결혼식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연아는 안정이 필요한데…….”
“그러니까 서둘러 결혼식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 연아는 앞으로 계속 거동이 힘들어질 텐데! 게다가 너희 아이 출생신고서에 뭐라고 쓸 생각이냐?”
“아!”
생각해보니 그 점을 간과했다. 아직 나와 연아는 정식으로 부부가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아이의 출생신고서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지.
“잠시만요.”
그때 연아가 손을 뻗어 조팀장을 제지했다.
“설마 이 판국에 일이 바빠서 안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바쁜 것은 맞지만, 저도 그 정도 구분할 수 있어요. 당연히 아이가 최우선이죠.”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래서?”
“일단 서류작업부터 하죠.”
“서류?”
“혼인신고서부터 작성해 놓죠. 어차피 결혼식이야 사실은 그냥 요식행위에 불과하잖아요.”
“으음……. 아무리 그래도 결혼식이 요식행위라는 것은 아니지.”
“저는 그냥 일의 진행 방향을 말씀드린 거에요. 혼인신고서 먼저 작성하고 결혼식 준비도 빠르게 시작해야죠.”
조팀장과 연아의 대화는 나는 그저 응응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남편이 되기도 전에 아빠가 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도무지 연아와 조팀장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연아 생각이 그냥 전부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정신이 없기도 하겠지.”
조팀장은 한눈에 내가 얼이 빠져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피식 웃으며 넘겼다.
“제 업무는 사업부 김실장과 양성태 부사장님께 상당 부분 이관해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라. 어차피 굵직한 일들은 어느 정도 정리된 상황이 아니냐.”
“그렇죠.”
게임 출시를 중심으로 개발 단계 이전에는 사업부가 바쁘고 이후에는 개발 쪽이 바빠진다.
따라서 연아는 어느 정도 업무적으로 여유가 생긴 상황.
물론 앞으로 거의 10달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장은 연아가 격무에 시달리는 것은 방지할 수 있다.
“아무것도 걱정 말고 몸조리에만 신경 쓰자.”
“너무 호들갑이야. 아직 두 달도 안된 상황이야.”
“두 달이든 한 달이든…….”
“……알겠어. 바로 구청에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 그리고 웨딩업체에 다시 연락해야겠네. 다행히 지난번에 준비해 놓은 것들이 있으니 번잡하지는 않겠어.”
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곤하다는 듯이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듯 몸을 뉘었다.
“클클, 정신이 없지?”
“솔직히……. 아직도 띵한 느낌이네요. 아버지라니…….”
“다 그런 거다. 하지만 너무 무겁게만 생각하지 마라, 의외로 순식간에 흘러가는 법이다.”
“양성태 부사장이 바빠지겠네요.”
“그것도 있지만, 너도 별도로 준비는 해야겠다.”
“준비요?”
“이참에 넌 부회장으로 올라가고, 양성태를 대표로 올리자.”
“네?”
“뭘 그리 놀라. 연아가 회사에 자리를 비우면 너라도 제대로 자리를 지켜야지. 어차피 비어있던 부회장자리 아니냐.”
“장인어른께서 회장이실 때도 우리 회사는 부회장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나마도 연아가 후계자로 낙점 된 이후에 잠시 부회장 직을 맡기는 했었다.
“그때야 필요가 없었으니 그랬던 거고……. 그리고 솔직히 너는 대표 보다는 부회장이 나아. 그러는 편이 차라리 개발에만 더 집중할 수 있을 거다.”
조팀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되었다기보다는 그냥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군. 마침 주말이니 내일 철학원이라도 갈까?”
“철학원이요?”
“아이 이름은 생각해 뒀냐?”
“아니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 꼭 철학원에서 지은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곳에 방문하면 뭐라도 떠오를 거다. 그리고…….”
“?”
“이런 소란 속에서 아버지로서의 책임감도 싹트기 마련이다. 지금은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라.”
“……장인 어른 댁으로 들어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희 여기서 평생 살아도 되죠?”
“어차피 나 죽으면 니들 집 될 것 아니냐.”
“자식이 연아 하나는 아니잖아요?”
“그놈들 몫은 따로 준비해뒀어. 내 재산을 온전히 물려받을 녀석은 오직 연아다. 뭐 네녀석 몫도 따로 좀 준비는 해야겠지만…….”
내 몫?
“뭘 그리 놀라냐. 사위도 자식이야.”
“감사하긴 한데……. 그냥 연아에게 한 번에 몰아주는 편이 일 처리가 쉽지 않을까요?”
“뭐 일 처리라고 할 정도로 많은 몫은 아닐 수도 있다. 김칫국 마시지는 마라. 나중에 너무 적다고 딴소리 하지는 말고. 사실 네 몫은 이미 챙겨준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기둥소프트를 시작으로 깨비몬 수익배분까지. 사실 나는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이 받은 셈이다.
조연준과 제임스의 몫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조팀장이 공공연히 말한대로 자신의 재산은 오롯이 연아의 몫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유류분 정도만 책정해두었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친 아들들 둘 보다도 많이 상속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왜 그러시죠?”
“어쩌다 보니 우리 집 못난 아들 녀석들 둘이 전부 네 회사에 묶이게 되지 않았더냐?”
“묶였다기 보다는……. 제임스에게는 제가 신세지고 있는 셈이고, 조연준은……. 원래는 오월동주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뭐 조금은 나아졌죠.”
안그래도 이번에는 의외로 조연준의 도움까지 받았다.
처음과는 다르게 분명히 우리와 조연준의 관계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네가 우리 집의 기둥이고, 대들보가 된 것은 사실이지.”
“칭찬이죠?”
“그래. 그러니……. 만약 내가 죽더라도 그 녀석들까지……. 잘 좀 챙겨주기 바란다.”
“그런 말씀 하시기 전에 저랑 같이 운동도 좀 하자니까요?”
“일 없다.”
조팀장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대표가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제가 갑자기 부회장으로 올라가도 별문제 없을까요? 무엇보다 현재 회장인 연아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나요?”
아무리 조팀장이 전 회장이라고는 해도 부회장 취임 문제를 이렇게 둘이서 얼렁뚱땅 진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팀장은 피식 웃으며 약지로 귀를 후볐다.
“이미 연아랑은 전부터 이야기를 나눈 상황이었다. 자신이 회장인데, 네가 대표로 있는 것 보다는 함께 회장 부회장으로 있는 편이 났겠다고, 어차피 너희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쯤에 처리될 일이었어.”
“그렇군요.”
“그리고 정말로 너보다는 양성태 그 녀석이 대표에 맞아. 너는 그냥 부회장 직함 달고 구석에서 게임이나 개발하면 딱이지.”
“……저도 칠층에서 함께 개발할까요?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번에 네가 제안한 연동게임도 재미있지만, 나는 솔직히 다음에는 규모를 줄여서 인디게임 개발에 착수하고 싶다.”
“오,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신가요?”
“쯧쯧……. 명색이 기둥소프트 대표가 돈 안되는 인디게임 개발하겠다는 말에 그렇게 흥미를 보이다니. 너는 역시 경영자로는 꽝이야.”
“에이, 인디가 돈이 안된다는 것도 옛말이죠. 스쿨런 얼마나 벌었는지 아시잖아요. 그리고 매지션 크래프트도 매출 10위권 찍은 적 있지 않습니까.”
“클클, 뭐 그렇지.”
매지션 크래프트를 언급하자 조팀장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래……. 그건 내가 생각해도 좀 괜찮았지. 덕분에 우리 팀원 녀석들도 지금 나에게 찍 소리도 못하니까.”
“그분들도 게임 개발 수도 없이 하셨을 텐데, 굳이 그것 때문에요?”
“요즘 스타일의 개발을 직접 만들지는 않았잖냐. 클클클. 나밖에 없지 안 그래?”
“그런 그렇죠. 사실 저도 나중에는 팀장님 팀원으로 일해보고 싶습니다.”
“갑자기 내 밑으로?”
“저는 관리직 보다는 역시 기획자로 움직일 때가 좋은 것 같아요.”
이건 나의 솔직한 이야기였다.
“그래……. 그것도 재미있겠지.”
“네. 나중에 한 번 해보죠.”
“그래. 그러자꾸나.”
나와 조팀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훗날을 기약했다.
*
*
*
“대표요?”
“네.”
대표에 취임해야 한다는 말에 양성태가 살짝 놀란 듯이 되물었다.
“오늘 회장님도 출근하지 않으셨다는데…….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비서실장을 그만두고 부대표가 되었음에도 양성태는 양성태였다.
아직도 연아를 비롯한 임원들 동향을 훤히 꿰고 있다.
“아닙니다. 아주 좋은 일입니다.”
“아주 좋은 일이요?”
“연아에게……. 그리고 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양성태는 전에 없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내 두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 환한 미소 속에는 너무 큰 진심이 담겨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나 역시도 절로 큼지막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아직 얼떨떨합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대표님께서는 부회장으로 취임하시게 되겠군요.”
역시 이 이야기도 양성태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부분도 알고 계셨습니까?”
“솔직히 제가 대표로 올라간다는 것은 몰랐지만……. 대표님을 부회장으로 올리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네. 임시직이겠지만, 일단 당분간은 연아의 빈자리를 채워야겠지요. 사실 이것도 부사장님께서 고생하시게 될 것 같아서 면목이 없지만요.”
게임 개발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연아가 진행하던 사업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양성태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맡겨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혹시 아기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양성태의 질문에 나는 또 한번 웃음이 새나왔다.
“그게 참 재미있는데……. 우리 아이 이름은…….”
홍세인 고려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