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부르셨어요?”
남궁원은 다소 쭈뼛거리며 내 방에 들어섰다.
“표정이 왜 그래?”
“음…….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한 모양이네요.”
“네가?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앞에 두고 긴장할 필요가 뭐가 있나?
내가 그렇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자, 남궁원이 본인도 다소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대표실에는 처음이다 보니까요.”
“아, 그랬던가?”
“저 같은 일반 사원이 대표실에 자주 올 일이 뭐가 있나요?”
“그렇군. 그럼 일단 그것부터 해결해야겠네. 일단 앉아.”
내가 자리를 권하자 남궁원이 소파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차를 들고 온 홍기도가 나와 남궁원 앞에 차를 대령했다.
“음……. 너 여기서는 이런 느낌이었구나?”
홍기도는 대답 대신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니, 가지 말고 너도 앉아라. 이 이야기 너희 둘 모두 들어야 할 이야기다.”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홍기도는 남궁원 옆에 앉았다.
“너 진짜로 여기 서는 이러냐?”
“아니, 저놈 너 와서 장난치는 거야. 가끔 이럴 때도 있긴 하지만……. 알잖냐. 홍기도야.”
“그러면 그렇지. 깜짝 놀랐네.”
“나도 할 때는 하는 남자지.”
“얘 요즘 이상하죠?”
“계속 붙어지내는 나는 어떻겠니? 무서울 정도야.”
나와 남궁원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무슨 일이신데요?”
이제 장난도 질렸는지 홍기도가 평소의 가벼운 텐션으로 돌아왔다. 다리를 꼬고 한 팔을 소파 등걸이에 걸친다.
“맞아요. 뭘 해결하신다는 거에요?”
홍기도와 남궁원은 내 용건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일단 간단하게 말할게. 나 부회장으로 진급한다.”
“음……. 축하 드릴 일 맞죠?”
남궁원이 다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대표 취임 자체를 내가 그리 달가워하지 않던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응, 뭐 일단은…….”
“잠깐!”
홍기도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부회장 취임……. 개근상 급 우수 오너인 회장님의 결근…….”
“갑자기 넌 왜 미친 소리냐?”
남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홍기도를 바라보았지만, 나 역시 다른 의미로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놈, 이거…….
정말 장난 아니구나?
“축하드립니다.”
갑자기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손을 덥썩 잡는 홍기도.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부분에서는 정말 눈치가 귀신이다.
“아기 이름 아직 안 지으셨죠?”
“어? 아니 그게…….”
“표기도 어떻습니까? 저도 아들 낳으면 홍세인이라고 지을까 하는데, 좋죠?”
“아니, 너무 싫어. 진짜 싫어. 그러니까 하지마.”
“제 아들 대부면서 이러시깁니까?”
“내가 대부였어? 처음 듣는데?”
“이런 중요한 걸 꼭 말로 해야 아나요?”
“그런 중요한 걸 말도 안하고 정하냐?”
갑작스러운 홍기도의 미친 소리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대부라니…….
우리가 크리스찬도 아니고 이 나라에 그런 문화도 없지 않은가?
“헛소리 그만하고 앉아.”
“넹. 하지만 표기도. 강력 추천합니다. 사람이 이름 따라 가는 것 아시죠?”
“…….”
지금 추천한답시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표기도……. 이거 웃기네요.”
남궁원 조차 홍기도의 말이 황당한지 평소처럼 화도 내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정말이에요?”
“응.”
“축하드려요. 대표님.”
“그래. 고마워. 솔직히 아직도 얼떨떨하긴 하지만…….”
그래. 살면서 축하 받을 일 중에 가장 큰 일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나?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회사내 급격한 인사 이동이 있을 예정이야.”
“그럼 신임 대표는 누구에요?”
“그거야 뻔하지. 양성태 부사장님 말고 누가 있겠어?”
“아아, 하긴.”
홍기도의 말에 남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거야 모두가 대충 예상할 법한 일이 아니겠나?
솔직히 부끄럽게도 지금도 명함은 내가 대표지만, 실제로 대표가 할만한 일들의 상당수를 부대표인 양성태가 도맡아 하고 있다.
나는 명함만 사장일 뿐, 어떤 의미에서는 개발실장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래. 양성태 부사장님이 대표로 취임하실 거야. 그리고 그것 관련으로 너희도 승진해줘야겠어.”
“승진을 해줘야 한다니……. 뭔가 말투가 묘하네요.”
“뭐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알고 있잖아. 승진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르는 법이니까. 팀장 진급한지 얼마 안 된 너에게 더 큰 짐을 맡기려니 좀 미안하다만…….”
“흐흐흐. 농담이시죠?”
남궁원이 그녀 답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즐거워 죽겠다는 인상이었다.
남궁원이 이런 타입이라서 정말로 다행이다.
“남궁원 팀장.”
“네.”
“조만간 인사 발표가 있겠지만, 먼저 말하지. 실장 취임 축하해.”
“오예!”
남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따지고 보면 남궁원은 한번 어긋났던 도박이 이제야 성과를 낸 셈이다.
탁월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이전 회사와 같은 작은 회사를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빠르게 승진하여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손에 넣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맥베스로 오게 되었을 당시 그녀는 다소 무기력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결국 그녀는 본인이 이전 회사에서 노리던 것 보다도 훨씬 빠르게 실장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게 되었다.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하겠지만……. 너는 겨우 실장 정도에서 머물 인재가 아니야. 앞으로도 지금처럼 최고의 성과를 보여주길 바란다.”
처음으로 직원에게 대표 다운 말을 했다는 느낌이다. 그 대표 직함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넵! 명심하겠습니다. 제 목표는 맥베스 대표가 되는 것이니까요!”
“어? 언제부터?”
“얼마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양성태 부사장님 계시는 동안은 무리지…….”
“닥쳐! 난 너처럼 강적에게 꼬리 내리지 않아!”
“하극상의 아이콘 같은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생각해보면 항상 내가 홍기도와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물론 나와 홍기도야 체급 자체가 차이 나서 이런 식의 핑퐁 게임은 아니지만, 아무튼 향후 맥베스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이 이런 관계라니…….
약간 걱정이 된다.
“그럼 홍기도는요?”
남궁원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아, 이 녀석도 실장 달아야지. PM으로 프로젝트 컨트롤하려면 직함이 중요할 테니까.”
“음……. 실장……. 이거 괜히 일만 늘어날 것 같은데…….”
“요즘 일이 하고 싶다며?”
“그렇긴한데, 제가 스스로 하는 것과 해야 해서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이죠.”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새삼 대표자리가 쉽지 않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용건은 이것이 전부인가요?”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전례가 없는 큰 시련을 앞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진급까지 더해져서 정신 없겠지만……. 그래도 믿는다.”
“넵!”
“알겠습니다!”
남궁원과 홍기도는 힘차게 대답했다.
*
*
*
“다녀왔어.”
“어서와.”
연아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컨디션은 어때?”
“그냥 조금 피곤하네?”
“뭘 보고 있던 거야?”
내 말에 연아가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테블렛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일하는 것 아니야. 웨딩스튜디오에서 보낸 자료들 훑어보던 거야.”
“아, 내가 뭐 도와줄 것 있어?”
“크큭,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나는 뭐라뭐라 변명을 해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맞는 말이다.
결혼을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예식장 분위기나 다른 여러 가지 상황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남자들의 무관심함이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의 주 싸움 소재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다소 찔리는 심정으로 연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연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일이나 잘 해주세요. 이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흐흐흐. 이럴 때 마다 제가 얼마나 복 받은 남자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약간 찔리네. 사실 나도 크게 관심 없어서 웨딩 업체에 맡겨 놓은 것이 전부니까.”
“드레스 디자인 같은 것은 관심이 있지 않아?”
“너무 별로만 아니면 뭐……. 솔직히 웨딩 사진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얼마나 오래 가겠어? 금방 관심 식을걸?”
“그럴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쪽이지. 이거나 봐봐.”
“뭔데?”
타블렛을 슬라이드하자 새로운 화면이 나왔다.
이것은 아이방 개조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런 것들 알아보고 있던 거야?”
“내가 알아 본 것 아니야.”
“그럼 누가?”
“우리 아빠가.”
“장인어른이?”
“갑자기 이걸 보내는데……. 업무에 집중 안 하냐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 다가……. 생각해보니 내 직원이 아니더라?”
“크큭, 그렇지요. 제 직원이지요.”
“그쪽 대표로서 직원 근태에 좀 신경 쓰시는 편이 어떨까요?”
“기둥소프트 직원들은 일당백입니다. 그리고 이런 숨 돌리기가 때로는 업무 능률 향상에 더 도움이 되는 법이지요.”
“크큭, 나름 대표님 다운 대답이시네요.”
“이젠 맥베스 대표도 끝이지만.”
“그보다 오빠는 괜찮겠어?”
“뭐가?”
“이 집에서 계속 살아도?”
연아의 질문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넓디 넓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과거의 나라면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이렇게 큰 저택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연아처럼 아리따운 여성과 미래를 약속하고 조팀장과 같은 나를 아껴주는 멋진 장인어른과 생활하는 것은?
내가 원하던 게임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삶은 또 어떠한가?
하나, 하나…….
일일이 열거할 때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 아니겠나?
“나는……. 네가 좋아.”
“나도 알아.”
“장인어른도 좋아.”
“그건 좀 기쁘네.”
“이 집도 좋아. 넓고 우리 아이가……. 아니, 아이들이 뛰놀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연아는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원래부터 결혼 전까지 잠깐 함께 지낼 생각으로 이 집에 들어온 것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일종의 처가살이에 대한 설움을 느끼는 남자들의 애환을 걱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그런 면에서 행운아다.
내가 눈치 보기도 전에 이렇게 먼저 나를 신경 써주는 사람들로 가득한 낙원 같은 장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제 와서 우리가 나간다고 하면 장인어른 너무 크게 실망하실걸?”
“아빠 신경 써주는 것은 기쁘지만, 그래도 오빠가 먼저지…….”
“난 정말로 좋다니까?”
내가 그렇게 대답할 때였다.
“표세인이!”
“네?”
갑자기 계단 위에서 조팀장이 나를 불렀다.
“나 지금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깐 올라와봐!”
라고 말하고는 다시금 집무실로 들어가 버리는 조팀장.
“이봐, 내가 어떻게 이 환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어.”
“크크큭. 그래. 고맙고. 어서 가봐. 아빠 기다리는 것 싫어하잖아.”
“나도 궁금해서라도 빨리 가봐야겠어.”
나는 연아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추고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행운의 아이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