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너무 늦잠잤네.’
연아는 커튼 사이로 비쳐 드는 오후의 햇살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도 휴일에는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매일 같이 이런 식이었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쉽게 피로하고 기운이 없으며 자꾸 잠이 쏟아졌다.
무엇보다도 입맛이 없는 것이 걱정이었다. 약간의 음식 냄새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려서 좀처럼 무언가를 입에 넣기가 힘들었다.
“시작부터 너무 괴롭히는 것 아니니?”
연아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아빠처럼 건강하다는 증거겠지?”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다시금 웃음이 새나온다.
그때였다.
-지금 집에 있죠? 놀러 가도 돼요?
갑자기 쉬린칭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
*
“오랜만이에요. 제가 너무 늦게 찾아왔죠?”
“아니야. 잘 지냈어요?”
“그럼요. 요즘 너무 즐거워요.”
쉬린칭은 여느때처럼 발랄한 모습이었다. 다소 힘이 없는 자신과 더욱 비교되었다.
“몸은 어때요?”
“솔직히 좀 기운이 없네요.”
“일단 이거 받아요.”
쉬린칭이 대뜸 연아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죠?”
“제비집 스프에요. 예로부터 임산부에게 으뜸으로 취급 받는 음식이죠. 태아에게 좋은 것은 물론 임산부의 심신을 편안케하고 자양보신 효과가 있어 체내 독소를 빼준다고 해요.”
쉬융레이의 딸 아니랄까봐, 의외로 쉬린칭도 이런 지식에 능한 편이었다.
“고마워요.”
이런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워낙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들은 연아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은 호의조차도 그 속에 깃든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덕분에 연아는 빈말로도 교우관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쉬린칭은 어떤가?
그녀는 연아에게 무언가를 바라기는커녕 오히려 굉장한 도움을 주고 있다.
애초에 재산 규모만으로도 자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대부호인 것이었다.
게다가 실제 나이는 쉬린칭이 더 많은데도 마치 동생처럼 발랄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아직 식전이죠? 이거 내가 데워줄게요.”
“요리도 할 줄 알아요?”
“하하하, 이거 데우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솔직히 무언가 입에 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연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간이 약한 음식이지만, 이건 특별히 더 옅게 했어요.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지만 한입이라도 드셔보세요.”
“음……. 고마워요.”
안 그래도 성의껏 준비해온 음식인데, 자신이 제대로 먹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참이었다.
“음!”
맛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미무취에 가까운 느낌. 탱글한 식감만이 입안에서 잠시 머물다가 금세 입안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이건, 괜찮네?”
“그렇죠? 우리 엄마도 저를 가졌을 때 입덧이 심했는데, 이것만은 먹을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3개월 동안 매끼니마다 이걸 엄마에게 대접했다고 하더라고요.”
3개월간 매끼니……. 제비집의 가격을 고려하면 일반 가정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호사다.
“매끼니는 좀 그렇긴 한데, 확실히 하루 한 끼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이거 의외로 고단백 식품이라서 태아에게도 무척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쉬린칭은 자신도 스프를 한입 입으로 가져가며 정신없이 떠들었다.
“그래서 쉬린칭은 기도씨와 장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하하, 우리는 아직이죠. 아빠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부터 낳으라고 성화지만……. 일단 제가 총국장 자리부터 은퇴를 해야 결혼도 할 수 있죠.”
“어? 은퇴?”
갑작스러운 말에 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중국 공무원들이 외국인과 혼인하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 소지가 있거든요.”
“아……. 그런거라면 반대로 기도씨가…….”
홍기도가 중국 국적으로 옮기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읽은 쉬린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차피 의미 없어요. 귀화든 뭐든 약점이 될 것이 뻔하니까요. 솔직히 제가 어중간한 자리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한다면 공산당 고위 간부직 정도가 아니면 안되죠. 하지만 여성에 외국인과 결혼이라는 약점을 짊어지고 도전하기에는……. 텃세가 너무 심해요.”
“그런가? 아쉽지 않겠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자유의 몸이 되면 사업가로서는 훨씬 운신이 편해지죠. 게다가 이미 후임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뽑아뒀으니, 문제는 없어요.”
쉬린칭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원래도 정치보다는 사업쪽에 관심이 있다고 했었지요?”
“물론이죠. 그래서 이미 맥베스와 손을 잡고 합자회사를 만들고 투자금을 외부로 돌렸잖아요. 걱정 마세요. 총국장이 아니더라도 저는 여전히 카이두의 대주주랍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연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에 누가 쉬린칭을 걱정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녀는 본질적으로 정치인보다 사업가 기질이 충만한 타입이었다.
비슷한 연배로서 가끔은 경쟁심까지 생길정도로 쉬린칭의 능력은 인상적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로 쉬린칭을 걱정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에요.”
“그거 칭찬이죠?”
쉬린칭은 귀엽게 배시시 웃었다.
“어머? 다 드셨네요? 조금 더 드실래요?”
연아는 잠깐 고민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더 먹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포만감은 없었고 나중에 또 먹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요. 고마워요.”
“잘 드셔서 너무 기쁘네요.”
쉬린칭은 남은 스프를 더 담아 건네주었다.
“이제 곧 결혼하시네요. 부러워라.”
“지금도 기도씨와 함께 지내는 것 아니에요? 빨리 결혼이 하고 싶어요?”
“그럼요. 그냥 함께지내는 것 보다 확실히 이 사람이 내 일생의 동반자라고 확정을 지어두고 싶죠.”
“그렇군요.”
솔직히 연아는 표세인과 함께 지내면서 더욱 결혼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단순히 한지붕 아래 머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담백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쉬린칭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쉬린칭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네요. 부러워요.”
“어머! 눈에 확 띄는 미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쉬린칭도 예쁘잖아요.”
“ㅎ하하, 그건 그렇죠?”
쉬린칭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지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거실로 나와 따뜻한 차를 마셨다.
“이번 프로젝트 중에 하나를 기도에게 맡기셨다면서요?”
“네.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양성태 대표의 말에 따르면 맥베스의 차세대를 책임져야 할 인재이니, 우리 오빠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게임을 개발하는 경험을 쌓게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거 말인데, 제가 좀 거들어도 될까요?”
“거들어요?”
“사실 기도가 먼저 묻더라고요. 중국 시장을 겨냥한 게임을 개발중인데, 어디까지 지원이 가능하냐고요.”
두 사람 모두가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탓에 이런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업무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두 사람에게는 무척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중국시장……. 확실히 파트너인 남궁원 실장은 이미 중국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죠.”
“그분이라면 오행전기뿐만이 아니라 좀비로얄에서도 활약했었죠? 좀비로얄은 중국에서도 잘 나가니까요.”
쉬린칭의 말에 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사람의 조합이니, 중국시장을 공략한다는 것은 무척 올바른 접근 방법 같네요. 그런데 거들어도 되냐고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카이두가 개발에 상당부분을 책임질테니, 투자자로 합류시켜 주시면 좋겠어요.”
“흠!”
연아는 팔짱을 껴고 고개를 치켜 들었다. 단순한 마케팅 지원 정도가 아니라 개발 부문에서 상당한 책임을 나눠 갖는다.
투자자로 합류시켜 달라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이건 당장 다급한 맥베스의 상황을 의식하고 일방적인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너무 빚지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으세요. 뭐니뭐니해도 홍기도는 제 남자니까요.”
이런 부분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남자라고 밝히는 것이 참으로 쉬린칭 다운 담대함이라고 느껴진다.
“사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어떤 도움이든 가릴 처지는 아니니, 잘 부탁 드릴게요.”
“감사해요.”
“그런데…….”
“?”
“기도씨 계속 우리 회사에서 근무해도 되나요?”
연아의 질문에 쉬린칭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문맥 뒤에 숨은 의미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거야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죠.”
“뭔가 두 사람만의 별도의 계획은 없으신 건가요? 아, 물론 곤란하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는 그저…….”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있겠어요. 다만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어요. 저는 기도가 제 옆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 그를 업무 파트너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예전에는 뭔가 굉장한 평가를 하면서 높게 보시지 않았나요?”
“맞아요. 그는 행운의 아이템 같은 존재지요. 곁에 두면 복을 불러오는…….”
“음?”
뭔가 홍기도에 대한 취급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간 쉬린칭이 보인 홍기도에 대한 애정의 깊이는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연아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아무튼 알겠어요. 당장은 별 계획이 없다는 거군요. 안심이네요.”
“우리 기도가 맥베스에서 잘 하고 있는가 봐요?”
“일단 우리 회사 에이스인 표세인의 오른팔이잖아요? 굉장히 중요하죠.”
“헤헤, 기분 좋네요.”
쉬린칭은 무척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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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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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두와의 합작입니까?”
양성태의 질문에 홍기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상황에서는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론입니다. 그것이 가능만하다면야…….”
라고 말하면서도 양성태는 힐끗 홍기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홍기도의 연인인 쉬린칭이 마음 먹는다면 카이두가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쉬린칭은 대주주임과 동시에 광파전시총국의 총국장이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카이두는 당연히 움직일 것이다.
“솔직히 이런 기대도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굉장하군요.”
“그런가요?”
남궁원과 홍기도를 한 팀으로 묶었을 때, 이런 시너지를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이런 결과를 들고 올 줄은 몰랐다.
“부회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도 허가하시겠지요.”
사실 표세인은 이미 그들의 프로젝트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니,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도시 운영 형태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니……. 이건 다소 의외군요.”
“어째서요?”
“홍실장님이라면, 다소 톡톡 튀는 새로운 게임을 궁리하실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남궁실장도 그렇지만요.”
단순히 젊은 개발자로서가 아니라 홍기도의 이미지와 남궁원이 지금까지 선보인 아이디어들을 놓고 볼 때 경영시물레이션 장르를 가져올 것은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것이었다.
“단순히 도시만 경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인들도 육성하지요. 이 시스템 선협장르에 미친 중국시장 트랜드에서는 반드시 먹힐 겁니다.”
중국시장에 대한 조사까지도 확실히 끝마쳤다. 정말로 홍기도라는 남자는 종잡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이런 디테일에서는 다소 흠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여지 없이 예상을 깨부순다.
이런 부분에서는 표세인과 영락없이 똑같다.
“정말로 기대가 되는군요.”
“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홍기도는 싱긋 웃었다.
자랑하고 싶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