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스드메.
결혼을 앞둔 일반 남성들을 공포에 떨게하는 신조어.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한국 예식의 특수성이 고스란히 담긴 결혼 전 밑 준비는 결코 쉽지가 않다.
솔직히 돈 걱정에서는 자유로운 상황이라서 나는 이 부분에서 다소 방심하고 있었다.
“자, 다음은 이걸로 한 번 입어 보실 게요.”
“네.”
연아는 마치 배우 오디션이라도 보는 깐깐한 감독처럼 매의 눈길로 예식 정장을 걸친 나를 판별했다.
‘이것도 아니구나.’
나는 연아의 눈빛에서 이번에도 탈락임을 깨달았다.
“눈치챈 것 같네? 그럼 다시 들어가. 여기 좀 더 핏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추천해주시겠어요?”
“네. 다음은 이걸로 한 번 입어 보실 게요.”
연아의 주문에 업체 직원은 새로운 예식 정장을 가져왔다.
보통은 여성 드레스 쪽을 많이 고르고 남성은 대충 넘어가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연아는 맞춤 드레스를 주문한 덕분에 정작 한 큐에 끝나버렸고 오직 나만 챗바퀴 돌 듯이 무한 착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흠……. 이것도 살짝 처지는 느낌이네.”
“그렇지? 차라리 아까가 나았는지도.”
“그렇게 생각하죠? 뭔가 컬러감이 좀 어두운가?”
이 상황에서 정말로 얄미운 것은 바로 홍기도와 쉬린칭 커플이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가서 본인들 데이트나 할 것이지, 어째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냐?
“자, 다시. 여기 좀 더 톤이 밝은 것으로 추천해주세요.”
홍기도는 뭘 잘못 먹기라도 했는지, 손짓과 말투도 묘하게 여성스러운 제스쳐를 취하며 마치 패션업계 에디터라도 된 것마냥 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데이트 안 해도 돼요?”
“저희도 곧 결혼 할텐데, 이런게 다 예습이죠.”
“네. 저희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아니, 니들 말고 내 걱정하는 거거든?
안 그래도 연아의 커트라인을 맞추는 것도 힘든데, 저 녀석들까지 끼어서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는 통에 골치가 아프다.
그렇게 정말로 한 시간이 넘도록 착장을 반복한 끝에 겨우 겨우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럼 이제 메이크업 하러 가시죠.”
“메이크업도 심사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받아야죠!”
“그럼요. 그럼요.”
그러니까, 왜 너희가 대답하느냐고…….
나는 살짝 도끼눈으로 홍기도에게 위협을 날렸지만, 녀석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연아에게 뭐라 뭐라 말을 거는 것으로 내 공격을 방어해냈다.
이거 진짜로 쉽지 않다.
하지만 예상 외로 메이크업은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후우……. 좋아. 이제야 겨우 앉는구나.”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네 결혼식 때 두고 보자.”
“오! 제 웨딩촬영도 따라와 주시게요? 역시 우리 대부님.”
아, 내가 말 실수를 했구나.
“그런데 대부는 또 뭐야?”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희 아이 대부시라니까요?”
“니들 성당 안 다니잖아.”
“에이, 꼭 성당 다녀야 하나요?”
“여러모로 감사해요.”
윽! 적당히 발빼려던 찰나에 쉬린칭이 대뜸 감사하다는 말을 던져버렸다.
이분은 우리 회사의 VIP.
이분은 우리 회사의 VIP.
이분은 우리 회사의 VIP.
“감사하긴요.”
“걱정마세요.”
순간 홍기도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도 형님 아기의 대부가 되어줄 거니까요.”
“아니, 내가 부탁도 안 했잖아.”
“그런건 꼭 말로 할 필요가 없죠.”
다 알면서, 라는 눈빛으로 홍기도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쳤다.
진짜 엘보 한 방 먹이고 싶은데, 여기서 또 쉬린칭이 등판한다.
“제가 빚지고는 못사는 타입인거 아시죠?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이분은 국내 최고 부자보다도 더 부자시다.
이분은 국내 최고 부자보다도 더 부자시다.
이분은 국내 최고 부자보다도 더 부자시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일말의 부담감 때문이랄까?
나는 이번에도 공손히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오케이!”
“좋았어!”
부부사기단에 가까운 홍기도, 쉬린칭 커플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키득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어때?”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연아의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 속에서 애인의 드레스 차림을 본 남자들이 멍하니 홀린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볼 때마다 너무 과장된 연기라고 생각했었다.
항상 보던 모습일텐데 굳이 드레스 하나 입었다고 이렇게까지 놀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고 생각했었더랬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일단 평소에 보던 모습이 아니다.
착장공간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과 평소보다 짙은 메이크업이 어우러진 탓에 외모부터가 달라 보인다.
거기에 화려한 드레스가 더해지니 정말로 딴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예쁘다.”
“그래?”
“정말 예쁘다.”
“고마워.”
“너무 예쁘다.”
“……크큭. 오케이 거기까지.”
내 넋이나간 듯한 중얼거림에 연아는 만족했다는 듯이 킥킥 웃었다.
“어쩜…….”
“너무 훈훈하네.”
그리고 내 감동을 깨트리는 잡것들의 리액션이 이어졌다.
홍기도와 쉬린칭은 두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네. 지금의 리액션 참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약 올림 받는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연아의 모습에 홀려버린 탓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네. 이런 기분이구나.”
나는 앞으로 나아가 연아의 손을 잡았다.
“뭐가?”
“결혼하고 싶어지는 기분이랄까? 솔직히 결혼 자체에는 무덤덤한 느낌이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결혼식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싶었거든?”
“그건 나도 동의해.”
“그런데 지금 너를 보니까……. 뭐랄까 막 자랑하고 싶네.”
“자랑?”
“여러분 제가 이런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하고 말이야. 결혼식이라는 것은 자랑하는 의미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
“음……. 약간 쑥스럽긴한데,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연아는 또 한 번 키득거렸다.
“그럼 이쪽으로 이동하시겠습니다.”
직원의 말에 따라 우리는 촬영을 위해 준비된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예비 신랑님 체격이 좋으신데, 예비 신부님 한번 안아서 들어 올리실 수 있으실까요?”
촬영기사의 말에 나는 연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좋습니다. 아주 안정적이고 좋네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촬영 기사의 요구에 맞춰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결혼 준비가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
*
*
“웨딩 촬영은 잘 하고 오셨습니까?”
양성태의 말에 나는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새삼 유부남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싹트는 시간이더군요.”
“하하하. 그거 사실 제법 고난이지요. 저도 고생 좀 했었습니다.”
“네. 이제는 저도 알 것 같습니다.”
미혼남은 알 수 없는 기혼자의 비애랄까? 물론 결혼 이후의 삶은 그와는 비교도 안되는 위기와 시련이 닥치겠지만, 당장은 눈앞에 닥친 결혼 문제 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럼. 가실까요?”
“네.”
오늘은 나의 부회장 취임과 양성태의 대표 취임 이후 열린 첫 임원회의였다.
이미 연아는 일주일 째 회사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임신초기에 절대 안정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나와 조팀장이 극구 연아를 말린 탓이었다.
그렇다 보니 임원들 중에는 다소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오셨습니까?”
“부회장 취임 축하 드립니다.”
“대표 취임 축하합니다.”
회의 시작 전 나와 양성태를 향해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우리는 거듭 감사한다는 말로 화답하며 겨우 자리에 앉았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에 분위기가 진정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인사 이동으로 다소 혼란스러우실 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일단 가장 궁금해 하시는 것은 아마도 제 취임과 더불어 근래 회장님께서 회사에 모습을 비추지 않으신다는 점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몇몇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모두들 이 문제로 이런, 저런 추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내 부회장 취임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을 것이다.
맥베스의 부회장이라는 직책은 여러모로 특별한 것이었다.
조팀장이 회장이었을 당시 맥베스는 오랫동안 부회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이후 연아가 후계자로 확정된 이후에나 부회장에 취임했었고 얼마지 않아서 조팀장이 은퇴하고 연아는 회장에 취임했다.
오직 후계자만이 거쳐갔던 그 자리.
그런 자리를 생판 남인 내가 올랐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었다.
“일단 분명한 것은 제가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있는 것은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임원들 대부분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이직하시는 것은…….”
“헉!”
누군가의 한 마디에 분위기가 돌변했다.
“아니요. 그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옮길 것이라면 굳이 부회장 타이틀을 달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현재 회장님께서는 다소 안정이 필요하신 상황이기에 제가 임시로 부회장 자리를 맡았다는 의미였습니다.”
“안정이요?”
“혹시 사고라도 나신 겁니까?”
또 한번 혼란이 빚어졌다.
“홍실장.”
“네.”
내가 홍기도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준비했던 전사 메시지를 송신했다.
“잠깐 다들 스마트폰을 열어보시죠.”
보통 회의 중에는 스마트폰을 꺼두는 탓에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 할 것을 권했다.
“부회장님 결혼하십니까?”
“이거 축하드립니다.”
“경사로군요.”
“어? 그런데 이거……. 신부 측에…….”
“잠깐만 신부측 부모님이……. 조양길?”
“어?”
“어?”
“이, 이건…….”
드디어 모두가 나와 연아의 관계를 알게 되는 순간, 모두가 당황을 넘어 패닉의 단계에 놓여버렸다.
“맙소사……. 설마 이런 그림은 생각을 못했었는데…….”
“아니, 이런 거였다면 이야기가 간단하지. 애초에 이제까지 너무 제대로 단계를 밟아오신 것 아닙니까? 바로 대표로 올라서셨더라도…….”
모두가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하는 것 같기에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 밖에 없겠지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조양길 선대 회장님의 의중이셨고, 그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훗…….”
내 말에 문상훈은 다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남들 보다 먼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상당히 뿌듯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놀랐었지요.”
“그래. 그렇지.”
양성태의 말에 문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 자신의 당황스러웠던 심정을 돌이켜보는 듯 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조연아 회장님께서는 현재 사고를 당하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신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 아이…….”
“세상에!”
“네. 임신 초기인 만큼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기에 저와 조양길 선대 회장님이 극구 조연아 회장님을 업무에서 떼어 놓은 것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워커홀릭이신지요.”
“그런거였군요.”
“이거 경사로군요.”
모두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그간 고민했던 모든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결혼식은 언제?”
“이제 곧 입니다.”
그래.
이제 정말로 곧 결혼을 앞두게 되었다.
꼭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