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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326화 (326/346)

326.

‘분명 어제까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표세인의 눈치를 살피며 홍기도는 입맛을 다셨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주말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 버렸다.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메뉴를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의 표세인은 전투 모드를 넘어 살기등등한 상태였다.

‘오늘 피바람 불겠네.’

이럴 때의 표세인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된다.

홍기도만이 아니라 다른 팀 사람들도 그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개발자라는 직종은 파트를 불문하고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주로 프로그래머들이 그런 경향이 강하지만 기획자라고 해도 별 다를 것은 없다.

‘피곤한 하루가 되겠구나.’

홍기도는 표세인에게 보내려던 문건을 일단 보류했다. 어차피 표세인의 성격상 이런 살기등등한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는다.

아무도 지뢰를 밟지 않고 하루 정도만 지나가면 곧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꼭 이럴 때 기어코 지뢰를 밟으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윤현창이 오늘의 당첨자였다.

“야! 표세인!”

갑자기 들이닥쳐서 대뜸 소리부터 지른다.

‘이크, 왔구나.’

아무래도 아마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일감 덕분에 업무 포화 상태가 된 것에 불만을 토로하러 온 것이 틀림 없었다.

평소의 표세인이라면 어르고 달래서 잘 다독일 것이고 사실 윤현창 본인도 일개 기획자인 표세인이 아무 힘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래머에게 있어 기획자는 언제나 자신들을 바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는 탓에 이렇게 종종 푸념의 대상으로 찾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중간에 커트 안 해주고 이렇게 막무가네로 일감 투척하기 있······.”

“······.”

순간 표세인과 눈이 마주친 윤현창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씨, 좆됐네. 얘 오늘 눈빛 왜 이래?’

윤현창은 한발 늦게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홍기도는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퇴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

“······아, 아니. 별거 아니다. 바쁜 것 같으니······. 아니,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네. 점심 맛있게 먹어라.”

“야.”

“······.”

스산한 한마디.

로봇처럼 뻣뻣한 동작으로 자리를 피하려던 윤현창을 표세인은 기어코 불러 세웠다.

“내가 니들한테 일 떠넘기는 사람이야?”

“······.”

“누구는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커트? 어떻게 커트해. 이거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는 것을 몰라? 일이 하기 싫으면 회사는 왜 나와?”

“아, 자식. 오늘 따라 왜 이러냐. 기분 안 좋은 것 같은데 화 풀고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나마 눈치가 있는 윤현창은 금세 줄행랑을 쳤다.

홍기도는 그것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그날 하루 동안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었다.

“표과장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표과······. 나중에 다시 오지.”

이건 뭐 맹견주의라도 써붙여야 하나? 하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나마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자 표세인의 살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쯤이면 되겠지?’

평소라면 진작에 짐을 챙겨서 회사를 벗어났을 테지만, 오늘 같은 날은 그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홍기도는 작전을 바꾸었다.

“담배 한 대 태우러 가시죠.”

“······그래. 그러자.”

순간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냐? 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마침 타이밍 상으로도 담배 한 대 태울 시간이었기에 표세인은 순순히 홍기도의 제안대로 옥상으로 향했다.

“과장님.”

“응?”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뭐?”

“그렇잖아요. 아니, 사실 무슨 일은 주말에 있었던 거겠죠. 월요일에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출근하신 분이 오늘은 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내가 좀 심했나?”

“심한 정도가······. 솔직히 오늘 과장님이 다른 팀들 업무 죄다 펑크 내신 건 아시죠?”

기획이 컨펌을 내주지 않으면 다른 파트들은 이래저래 업무에 지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물론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할 수도 있으니, 하루 정도로 큰 차질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정신을 차린 표세인으로서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음······. 한동안 석고대죄 모드로 다녀야겠네.”

“네. 그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솔직히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직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닌 탓에 홍기도는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십시오.”

“음······.”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너한테 위로까지 받다니.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네.”

표세인은 깊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다소 묘한 느낌의 맞선이었지만 표세인은 연아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어제 어머니께 받은 번호로 전화를 하자 뭔가 심각하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혹시 송연아씨 번호 맞습니까? 저 어제 선을······.”

-아! 죄송해요. 안 그래도 거절하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

이야기를 듣자 하니, 송연아 본인은 맞선 장소에 나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럼 대체 내가 만난 사람은 누구야?’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

연락처도 모르는 탓에 답답함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 덕분에 회사에 출근 한 후에도 심기가 불편해서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진짜 답답해 미치겠네.’

연거푸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표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

*

*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연아는 김인숙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주말에 우리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교통사고가 났었던 것 알아?”

“네. 알아요. 언니가 가고 나서 바로 난리가 났죠.”

“그때 표현수 과장이 사고가 났었다지 뭐야. 그래서 병원에 입원했대. 나도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몰라.”

“그럴 리가······.”

그렇다면 자신이 만났던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연아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그 후로 연락이 되지 않아서 찜찜하던 참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연아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퇴근한 이후 연아는 평소처럼 늘 찾던 카페를 방문했다.

‘대체 누굴까 그 사람은?’

묘하게 대화가 어긋난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보자마자 자신의 이름도 말하지 않았던가?

풀리지 않은 의문.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람?’

연아는 답답함을 느꼈다.

머리가 복잡한 덕분에 일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가져온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였다.

“아! 마침 계셨군요!”

“어?”

마침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카페를 다시 찾아온 표세인이 연아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왔다.

“표과장님?”

“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연아씨 맞으시죠?”

“······네.”

두 사람은 서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한자리에 앉았다.

“일단 정리부터하죠. 제 이름은 표세인입니다.”

“표세인······.”

표세인의 이름을 들은 연아는 망치로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송연아씨 맞으신가요?”

“아니요. 제 이름은 조연아인데요.”

“맙소사. 하하하.”

어이가 없는 나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서로의 오해를 해결했다.

“그렇군요. 맞선에 나오셨던 거군요.”

“면접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요.”

드디어 오해가 풀린 두 사람은 서로의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하필이면 이름이 비슷한 덕분에 제가 크게 오해했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표세인입니다. 게임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표세인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게임 기획자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연아씨는 비서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그······. 아버님 일을 이어받을 계획이시라고······.”

“아, 죄송하지만 그것은 잊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외부에 퍼트리고 다닐만한 일은 아니라서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

“혹시 남자친구 있으십니까?”

“······없어요.”

“혹시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하시면 어떨까요? 그날은 우리 카페에서 너무 겉도는 이야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식사······.”

솔직히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자신의 수족이 되어줄 사람을 찾기 위한 면접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사람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

오해가 겹쳐서 이어진 인연.

아주 가느다란 실로 엮인 상황이라서 이대로 식사를 거절하면 이 인연은 거기서 바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것은 싫었다.

“좋아요. 그러죠.”

그렇게 두 사람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러셨겠죠. 많이 당황하셨겠네요.”

선을 보러 나왔더니, 대뜸 상대방의 인생 목표까지 듣게 된 격이다. 표세인이 얼마나 황당했을지, 연아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예쁜 분이 제 맞선 상대일 리가 없죠. 하하하.”

아, 그쪽?

생각지 못한 대답에 연아는 피식 웃었다. 살면서 얼굴에 관한 칭찬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보통 그것에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표세인의 입을 통해 들은 칭찬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

“?”

“저 마트 운영이든 뭐든 자신 있습니다.”

“네?”

“아, 물론 연아씨 부친께서 무슨 사업을 하시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뭐든 자신있습니다.”

“?”

“우리 정식으로 한번 만나보면 어떨까요?”

“정식으로 만난다······.”

“물론 연아씨에게 제가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기회 한 번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야근과 철야가 빗발치는 근무환경에서 연애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연애는 꿈도 못 꾸고 지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표세인은 여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만큼이나 연아가 마음에 들었다.

“저······.”

“네.”

“좀 많이 바빠서 자주 시간을 내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연아의 말에 표세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저도 그렇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두어 번이라도 좋습니다. 롱디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표세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연아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녀 역시 지금까지 바쁘다는 핑계로 연애 같은 것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런데 마트 운영은 무슨 말인가요?”

“아! 원래 제가 맞선 보기로 했던 송연아씨가 저희 동네 할인마트 사장님 딸이셨거든요. 그래서 지난번에 아버님 사업체를 물려 받으실 거라는 말에 저는 마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크크큭.”

순식간에 조양길 회장을 동네 마트 사장으로 둔갑 시킨 표세인의 말에 연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희 아버지가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기시겠네요.”

“하하하, 전부 오해였으니, 너무 노여워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어쩐지 저희 아버지랑 잘 맞으실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저와 잘 맞으려면 게임이나 운동 쪽을 좋아하셔야 할텐데요.”

“확실히······. 한쪽은 분명히 잘 맞으실 거에요.”

훗날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죽이 잘 맞는 장인과 사위 콤비가 탄생되지만, 이 시점의 표세인과 연아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알게되는 것은 한참 훗날의 이야기.

[외전] 내가 밀어 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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