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
함성준은 상당히 오랫동안 주사위에 관련해 내게 부탁을 해왔었다.
하지만 나도 아버지에게 부탁만 해놓고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전무군단의 후임자로 지목된 덕분에 사내의 입지를 수월하게 다져나갈 수 있던 것도 함성준의 덕이 컸다. 그런 만큼 뒤늦게 나마 은혜 갚음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
-어쩐 일이냐?
“전에 말씀드렸던 주사위 있잖습니까?”
-아아, 그거 말했 듯이 진짜 벽조목은 그렇게 쉽게 들어오는 물건이 아니라고······. 아니면 짝퉁도 상관 없다냐?
짝퉁은 좀 그렇다.
“꼭 벽조목이 아니더라도 뭔가 괜찮은 것 없을까요?”
-반드시 필요한 거냐?
“네. 상황이 조금 그렇게 됐네요.”
TRPG에서 나를 지원해주겠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는 제외하고서라도 함성준 전 전무에게는 이래저래 신세 진 일이 많기 때문에 이 기회에 다소 보답을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알겠다. 한 번 알아보마. 그런데 뭐가 좋으려나······.
아버지도 딱히 아이디어가 없으신 모양이었다.
“부탁드립니다.”
통화가 끝나자 홍기도가 냉큼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별건 아니고 전에 부탁받은 일 때문에······.”
나는 함성준에게 부탁받은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는 뭐 아이디어 없냐?”
“아! 그거라면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뭔데?”
“저희 아버지가 수석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수집하시는 취미가 있으시거든요?”
“그런데?”
“그중에서 호박석도 있어요.”
“호박석?”
뭔가 그럴듯한데?
“벌레가 들어 있는 호박석은 아주 귀한 물건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이건 인터넷으로 알아 볼 수 있을까?”
“몇 개 가져다 드려요?”
“몇 개? 그게 가능하겠어?”
“그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 부탁이라고 하면 아버지 수집품 전체도 기꺼이 쾌척하실걸요?”
“음······. 그래도 너희 아버님 애장품을 받는 것은 점 꺼려지는데.”
“에이, 가족끼리 그렇게 눈치 볼 필요 없죠.”
“······가족?”
“제 아들 대부님이시잖아요. 그럼 가족이죠.”
“일단 내가 수락하지도 않았거니와. 네가 아들을 낳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냐?”
“쉬린칭이 원해요. 반드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싶다고 해요. 쉬린칭네도 아들이 귀하고 저희 집도 그렇기도 해서 모두가 응원하고 있죠.”
“그러냐······.”
“저희 아들 이름 지난번에 들으셨지요? 홍세인.”
“아들 이름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장난이라니요! 저는 진심이라니까요? 아무튼 호박석은 제가 구해다 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나는 이 녀석이 가족 운운할 때마다 묘하게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가급적 이 화제가 나오면 말을 돌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불길하다.
어쩐지 이 녀석 말대로 언젠가 진짜로 이 녀석과 가족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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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멤버는 결정 된 겁니까?”
이영걸의 질문에 조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니, 그게 말이지. 사실 지금까지 시간을 끈 이유가 바로 플레이어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였거든.”
“저와 성준형님, 거기에 표세인 부회장까지 세 명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 한 명 더, 이상적인 숫자는 2명 정도가 더 있었으면 좋겠군.”
“지난번처럼 양대표를 끼우는 것은?”
“그때 기억 안나? 연기도 못하는 녀석이 주사위 운만 좋아 가지고는 플레이 흐름을 깨버렸잖아. 다른 것은 몰라도 양성태 그 녀석은 TRPG에서는 못 써먹어.”
“그건 그렇죠.”
연기도 발 연기인 주제에 주사위 운은 좋아서 다른 사람들 활약할만한 지점을 싹쓸이해버리니, 빈말로도 좋은 플레이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꼭 인원을 딱 맞춰야 하는 겁니까? 애초에 레벨 디자인을 왜 그렇게 맞추신건데요?”
“나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이제와 뺄 수가 없더군.”
“그렇군요. 그런데 이번에는 상금이 뭡니까?”
“그게 궁금해?”
“그래도 우리 나름 그 상금과 페널티 덕분에 긴장해가면서 주사위 던지지 않습니까.”
“흠, 요즘에는 그렇게 현물을 걸고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조팀장의 말에 이걸영도 순간 아! 하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렇네요. 우리가 TRPG 손 뗀지 시간이 너무 지났군요.”
“그래. 그때야 회사 복지 차원에서 남는 혜택 누구에게 밀어 주느냐로 상품 걸었지만, 지금은 이래저래 문제가 있지.”
“그건 그런데······. 그러면 이번에는 상품도 페널티도 없는 겁니까? 그러면 너무 재미 없지 않습니까?”
“어떨 것 같아?”
“네?”
“정말 없을 것 같아?”
“뭔가 생각해 놓으신 것이 있군요?”
“나 조양길이야.”
“아이고, 그 말투는 좀 지양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문상훈이에게 귀에 못 박히게 들었습니다.”
“흠흠, 아무튼 내가 따로 생각해 놓은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보다는 후보자나 생각해봐.”
“흠, 누가 좋을까요. 이거 면접이라도 봐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
“면접이라······.”
“하하, 농담입니다.”
“면접이라······.”
“······저 농담한거라니까요?”
“아니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생각해보면 면접 볼만한 인원이 아예 없지도 않아.”
“누구요?”
“이번에 실장으로 진급한 홍기도 실장.”
“아, 홍실장······. 네 뭐 그 친구 성격이면 확실히 잘 할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친구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문상무는 어떻습니까?”
“문상훈이? 그 친구가·········.”
“연기는 양대표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흐음······. 좋아. 일단 실장급 이상 인재들 중에서 한번 쓸만한 친구들을 추려보자고.”
“이번에 진짜로 판을 크게 벌이실 모양이시군요.”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오랜만인 만큼 제대로 해야지. 우리 나이들을 생각해. 이게 마지막일 수 있어.”
“에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너 먹는 것을 보면 정말로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니까?”
“······지난번에는 칭찬해놓고선.”
“입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나 털고 말해라. 너 그러다 정말 죽어.”
조팀장의 핀잔에 이영걸은 흥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끝까지 과자를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
*
*
“몸은 좀 어때?”
“그냥 그래. 후아암.”
연아는 기지개를 켰다. 만삭에 가까워지자 연아는 부쩍 잠이 늘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짧은 잠을 이루는 탓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얼마 없을 정도였다.
“나 살쪘나?”
“쪄야지.”
“남 일이라고 말 막하네?”
연아가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이런 실수다.
“나중에 산후조리는 제가 전력을 다해서 보필할테니.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 아이가 최우선이지.”
원한다면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있었지만, 첫 만남의 기쁨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의사 선생님에게 아이의 성별을 전달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출산 일이 가까워지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아이의 성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이야기가 들리던데.”
“이상한 이야기?”
“아빠네 팀에서 새로운 멤버를 뽑는다던가? 무슨 면접이야기가 있던데?”
“면접? 아아······.”
나는 피식 웃었다.
“웃는 걸 보니 업무 관련이 아닌가 보네.”
“응. 장인어른이 TRPG 준비가 끝났다고 함께 할만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 같더라고 요즘 칠 층 아주 분주해.”
“기껏 숨 돌릴 타이밍을 얻었는데도 요란하네. 정말로 오빠가 따로 개발팀을 꾸리지 않았으면 적적해서 큰일이셨을 거야.”
“활기차면 좋잖아?”
물론 TRPG 인원을 뽑겠다고 실장급 이상 인재들을 상대로 면접 계획까지 꾸민다는 것이 회사 입장에서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활기가 넘치는 것은 좋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마굴팀이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근래 막 출시가 끝난 세 개 프로젝트 동시 출시에서도 그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담당한 게임과 그들이 담당한 게임은 클라우드 서비스의 플레이타임 1, 2위를 겨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기세로 치솟고 있었고 우리는 다소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날 하루는 집에 안 들어 오겠네? 쉬린칭이라도 놀러 오라고 할까?”
“그게 무슨 말이야? 집에 안 들어오다니?”
나는 연아의 배가 불러오는 시점부터 술도 마시지 않고 퇴근 후에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딱히 연아가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했기 때문이다.
“아, 오빠는 모르나?”
“뭘?”
“TRPG 그거 하루만에 안 끝나.”
“나도 인터넷에서 글은 읽었어. 그런데 집에 안 들어온다는 것은······. 설마 밤새서 플레이를 한다고?”
아니, 무슨 보드 게임을 밤새서 플레이한다는 말인가?
이건 상식을 넘어도 너무 넘은 것 아닌가?
“예전에도 호텔 잡아서 이박삼일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이박삼일?”
나는 농담일까 싶어서 연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 농담하는 것 아닌데?”
“그렇구나······.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나?”
“뭐가?”
“이제는 다들 연세도 만만치 않으신데 설마······.”
“보면 알겠지. 그리고 오히려 밖으로 나돌 기운이 없으니까, 그런 보드게임 같은 것에 훨씬 더 진심이시지 않을까? 외국에서도 TRPG나 미니어쳐 게임들을 즐기는 분들 중에는 머리가 하얗게 쇤 은퇴한 분들이 많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영국 사람들이 그런 것에 진심이라는 말은 들은 것 같기는 한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박삼일이라는 말에는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다.
“양대표님도 그 기간에 연차내신다고 하셨어.”
“연차? 양대표님도 참가하신데?”
전에 지나가듯이 듣기로는 양성태의 플레이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며 참가시키지 않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 수발들 사람이 자기 밖에 더있겠냐면서 웃더라고. 진짜로 아빠는 무슨 복이 있어서 양대표님 같은 사람을 얻게 된 걸까.”
대표자리까지 앉은 사람이 은퇴한 회장의 수발을 들기 위해 연차를 내다니······.
정말로 상식 밖이다.
“양성태 대표님은······. 정말 멋지다고 밖에 못하겠네.”
조팀장이 현역 회장일 당시야,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굽신거리는 이들이 한 트럭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퇴한 이 시점에, 그리고 양성태는 현재 맥베스의 대표다.
그런데도 조팀장의 취미 생활을 돕겠다고 연차까지 쓰다니!
양성태라는 남자에게는 언제나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나도 양성태 대표님 같은 아랫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빠에게는 홍실장이 있잖아?”
연아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그 녀석은 내 수발이 아니라, 제 즐거움을 위해서 나를 감금하겠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야.”
“쉬린칭이 말하기로는 정말로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홍세인이라고 지을 거라고 하던데?”
“쉬린칭은 그래도 괜찮대?”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더라.”
음······. 성씨가 좀 튀는 느낌이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이름이 이쁘다는 이야기는 종종 듣기는 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럼 나중에 오빠 캐리어나 준비해야겠다.”
“아니야. 내가 할게.”
“아니야.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 그런 거라도 운동 삼아 하게 해줘.”
연아의 말에 나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연아는 정말로 이박삼일 이상 TRPG가 이어질거라고 생각하는 듯, 속옷과 양말을 넉넉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이박삼일······.”
이건 뭐 거의 체력 싸움 수준인데? 취미 생활에 너무 진심인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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