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330화 (330/346)

330.

“좋은 아침입니다.”

“오냐. 준비는 끝났지?”

“여기요.”

준비까지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좀 우습기는 하지만 어쨌든 준비했다.

물론 나는 딱히 한 것은 없고 연아가 분주하게 준비해주었다.

마치 해외 출장 준비를 한 것 같은 수준으로 짐을 싼 것이 좀 우습지만. 나는 캐리어를 들어 무게를 재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큰 캐리어를 번쩍 들어올리다니, 네가 참 힘이 좋긴 하구나.”

“부모님 등골 뽑아 먹으면서 운동에 매진했는데, 힘이라도 좋아야지요.”

“클클클, 그래. 그거 맞는 말이다.”

딱히 농담은 아니었는데, 조팀장님의 입맛에 맞았는지, 클클 웃으신다.

“그럼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못들었어?”

“······누구에게 들을 수 있는 거였나요?”

애초에 오늘부터 TRPG를 할 거라는 말 외에는 들은 바가 없다.

“홍실장이 픽업차량 몰고 오기로 했다.”

“흐음, 요즘 홍기도 녀석이랑 부쩍 가깝게 지내시네요.”

“갑자기 뭔 소리냐. 이제는 나도 홍실장과 붙어 지낸 것도 제법 되지 않았나. 그 왜 인디게임 개발 때부터 시작된 인연 아니냐.”

“그건 그렇죠.”

조직개편으로 인한 혼란과 개발 일정에 누락과 위해 급조한 계획에 불과했던 임시방편에 가까운 프로젝트였지만 당시 홍기도는 냉큼 조팀장을 자신의 팀에 편입해서 팀을 꾸렸다.

당시에는 두 사람의 궁합이 어찌될까 궁금하기도 했었고 약간 걱정도 됐었지만, 의외로 조팀장은 자신 눈치를 보지 않는 젊은 직원들과 궁합이 잘 맞는다.

사실 나도 그런 조팀장의 서글서글한 성격 덕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묘하게 불안하다.

“왜 그리 꿍한 표정이냐. TRPG가 안땡기냐?”

“아니요. 그건 기대됩니다. 사실 다른 걱정이 들어서요.”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홍기도 녀석과 조팀장이 무언가를 준비하면 묘하게 불안한 느낌이 든다.

“걱정할 것 없다. 우리 열심히 준비했어.”

네. 그 ‘열심히’가 불안해요. 조팀장의 완벽주의와 홍기도의 의외성이 결합 되면 항상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지지 않던가?

-띵동!

“도착한 모양이군.”

조팀장의 말에 나는 현관으로 나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홍기도는 이른 아침부터 기운이 넘쳤다.

“너는 출근도 이시간에는 안하지 않냐?”

“출근이야. 업무시작 시간 전에만 도착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음······. 맞는 말인데 요즘들어 왜 이렇게 이녀석 말은 인정하고 싶지가 않은 건지 모르겠다.

괜히 꼬투리를 잡아볼까 하는 마음이 샘솟는 사이, 눈치 빠른 홍기도 녀석은 쪼르르 조팀장에게 달려가, 그의 여행가방을 들었다.

“준비는 잘되었나?”

“네.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어제 제가 최종적으로 마무리 점검까지 끝냈습니다.”

“역시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

도저히 내가 아는 조팀장과 홍켓몬 간의 대화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멘트와 진중한 표정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이 차는 뭐냐?”

“렌트했어요.”

“렌트······ 그런데 우리 오늘 어디로 가냐?”

“조팀장님께 못들으셨어요?”

“응.”

“그럼 저도 노코멘트······. 저 지금 운전대 잡았습니다. 뒤에 형네 장인어른 탑승 중이세요.”

참신한 협박에 나는 손을 뻗으려던 것을 급히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하는 수 없이 나는 뒤에 앉은 조팀장에게 질문했다.

“클클, 가보면 안다. 뭘 그리 성화냐.”

“아니, 제가 지금 납치 되는 기분이라서 그래요.”

“······우리 둘이서 너를 납치하는 것은 무리지.”

“그래요. 저희에게 너무 가혹하시네요. 거의 디스 수준인데요?”

내가 디스를 한건지, 당한건지 모르는 사이 어느새 차는 서울을 벗어났다.

“이 방향이면······. 설마 가평?”

“정답!”

“그냥 말해줬으면 됐잖아. 어? 잠드셨나?”

“그러면 재미 없잖아요. 어? 진짜로 운전자 폭행은 현행범 체포도 가능해요!”

내가 슬쩍 뒤를 돌아 조팀장이 잠든 것을 확인하자, 홍기도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귀신이다.

“음? 도착했나?”

“거의 다왔습니다! 이제 눈 감지 마세요!”

“쳇.”

눈치만 빨라가지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주먹을 풀었다.

나의 작은 응징계획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게 홍켓몬에게 응징의 기회를 노리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팬션을 예약하셨어요?”

풀장에 테니스코트까지 딸린 커다란 팬션.

“TRPG 끝나고 레크레이션이라도 즐기시려고요?”

“우리가 원하는 설비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라서 잡은거다. 다른 시설들은 신경쓸 것 없어.”

“설비?”

나는 이때까지도 앞으로 닥칠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왔군!”

마침 함성준과 이걸영이 선글라스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채로 선배드에 누워 바캉스 기분을 내고 있었다.

“휴가 분위기 나네요. 그런데 두 분 그 차림이 잘 어울리시네요?”

“내가 원래 옷 태가 좀 나는 편이지.”

“단추도 못잠그는 주제에 뻣대기는······.”

“어허, 원래 우리 대학때도 형님들은 여성들에게 인기 하나도 없었지만, 저는 다르지 않습니까. 저 아시잖습니까, 우리 동아리 1등 훈남. 이걸영.”

“······언제적 이야기냐.”

함성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먼저 와계셨군요.”

실내에 있던 양성태도 모습을 드러냈다.

“네 저희가 1시간 정도 먼저 도착했습니다.”

“마스터가 우리 보다 늦게 오다니.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점심 안먹고 달릴 거냐?”

“······밥은 먹어야지요.”

괜히 한마디 던졌다가 본전도 못 찾은 이걸영이 깨갱하며 물러섰다.

“일단 제가 적당히 장을 봐둔 것으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양대표님이 식사를 준비하셨다고요?”

“네. 걱정마십시오. 이래봬도 저희 집 주방은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서울 상경 20년차 내공이라는 것이지요.”

“서울 상경? 원래 서울분 아니셨어요?”

“공주가 고향입니다.”

와, 우리 중에서 가장 도회지스러운 남자가 정작 서울 출신이 아니었다니······.

“원래 다 그런 법 아닌가? 여기에 서울 출생 있어?”

“제가 서울 출신입니다만? 기도 너도 그렇지 않냐?”

“저는 사실 태어난 것은 외국이고······. 하도 떠돌아 다녀서 고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어요.”

“너 외국에서 태어났냐?”

“태어나기만 했어요. 어차피 한국은 이중국적 인정 안 되는 나라잖아요. 군대도 다녀왔는데, 국적 수호해야죠.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요. 이놈의 강제 애국 세뇌······.”

“우리 회사에 군필 별로 없는데······. 어째 임원급들은 죄다 군필이구만.”

한창 IT 열풍이 불던 시기에 방위산업특례로 명문대 출신자들이 게임회사에 미친 듯이 밀려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경향이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이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위직으로 성장했기에, 우리 회사도 임원진 면면을 따져보면 군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특이하네. 너 정도면 보통 군대 안가지 않냐?”

“안갈 수도 있었죠.”

“그런데 왜 갔어?”

“······쉬린칭에게서 탈출하려고······.”

쉬린칭이라는 이름이 등판하는 순간 전원이 거의 동시에 홍기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하지만 말하지 마라. 듣고 싶지 않다.

현재 쉬린칭은 단순히 중국시장 관련 VIP를 넘어 맥베스와 여러 사업을 함께 하는 파트너임과 동시에 개인 자금으로 맥베스 주식을 사들여 손꼽히는 대주주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

그런 쉬린칭의 위험한 과거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충 캐리어를 방에 옮겨두고 내려온 나는 주방에서 모두를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양성태에게 다가갔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쉬고 계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요. 그리고 매번 하는 말이지만, 회사 밖에서는 형님이시지 않습니까. 형님이 애쓰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마음 놓고 쉬겠습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하지만 대충 다 끝났으니. 테이블 세팅을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양성태가 미리 빼놓은 접시들을 테이블로 옮기고 수저와 젓가락을 배치했다.

“뭐랄까 굉장히 가정식이네요?”

“양성태가 요리를 잘하는 편이지. 그러고보면 너도 제법하지?”

“하하,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인터넷 쉐프죠.”

아무래도 조팀장은 예전에 제임스네 가족 접대를 준비했을 때의 추억 보정이 상당히 강한 모양이다.

요즘 요리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 같은 것은 어디에 끼지도 못한다.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오오! 냄새 좋구만.”

“잘먹겠네.”

모두가 식탁에 모여 양성태가 준비한 점심을 만끽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랫동안 조팀장이 준비해온 TRPG가 시작되었다.

*

*

*

“이, 이게 다 뭔가요?”

조팀장이 예약한 팬션의 오피스룸에는 테이블 단위로 전면에 모니터가 2개씩 장착된 모션체어가 준비되어 있었고 팔걸이에는 VR헤드셋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TRPG라는 것이 원래 이런 느낌이 아니지 않았나요?”

“시대가 시대지 않나. 보드게임도 더 이상 아날로그적인 감상에만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지!”

“그건 그렇죠!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그럼.”

함전무와 이걸영은 놀람 보다는 뿌듯함과 기대감이 더욱 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터무니 없는 스케일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데스크탑과 모니터가 탑재된 모션체어와 VR헤드셋이라니? 대체 뭘 준비하신거지?

“이거 개당 천만원도 넘죠?”

“의자만 3천만원 수준일걸요?”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좀 지나치지 않나?

“나중에 이거 어디에 두려고요?”

내가 살고 있는 조팀장님의 자택은 분명 거대하고 지하 게임룸도 완비되어 있지만 무려 5대의 모션체어가 들어갈만한 공간은 없다.

아니, 억지로 밀어 넣을 수야 있겠지만······. 평소에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나와 조팀장뿐인데, 이걸 대체 어쩌려고?

“이것들은 맥베스 휴게실에 기증할 예정이다. 신경쓰지 마라.”

“기증이요?”

“뭘 놀라? 전 회장이 그정도 기증도 못하나?”

기증은 결과일 뿐이고, 원래 목적이 TRPG 한번 즐기려 했던 것인데······.

결국 짧은 휴가 한번에 수억을 태우셨다는 말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는 이미 자식들에게 재산 배분도 끝냈어. 남은 것은 그냥 나 사는 동안 취미생활에 투자해도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 않냐.”

“그럼요. 물론이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연배가 비슷한 덕분인지 함성준과 이걸영이 또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아니, 뭐······. 돈쓰시는 것으로 타박할 생각은 없는데······.”

아직까지도 서민 근성을 버리지 못한 나로서는 다소 낭비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허튼소리는 이쯤하고 일단 자리에 앉고 VR부터 써라. 개인 설정 조절도 해야하고 이래저래 시간이 많이 소비될 거다.”

“본 게임은 저녁식사 이후에나 가능하겠네요.”

“그렇게 되겠지.”

홍기도의 말에 조팀장은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초조한 기색이었다.

이쯤 되니 호기심을 넘어서 압도되는 기분으로 나는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VR헤드셋은 집에도 있는 기종이라서 어렵지 않게 옵션을 조절할 수 있었다.

“다 되셨죠?”

“응.”

이미 자신의 세팅을 끝낸 홍기도가 주변을 돌며 도우미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해? 뭘? 어?”

“제 얼굴 제대로 보이시죠?”

맙소사······.

내 눈앞에 캐릭터 랜더링된 홍기도 녀석의 얼굴이 출력되고 있었다.

이거 그거지? 버츄얼 스트리머?

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버츄얼 스트리머와는 차원이 달랐다.

[외전] 시작부터 함정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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