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버츄얼 스트리머(virtual streamer).
일본에서 시작된 신종 인터넷 방송의 한 장르다.
본인의 실제 모습이 아닌, 페이스리그와 같이 페이스와 모션을 3D 캐릭터로 전환해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가상의 캐릭터를 내세워 인터넷 방송을 하는 것을 뜻한다.
“내가 이걸 경험하게 될 줄이야.”
먼 훗날 페이스온 기술이나 모션 캡쳐 기술이 더 발달하면, 우리가 흔히 꿈꾸는 가상현실 게임에서나 사용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이거 긴장되는데?”
게임의 시스템적 운용을 사람이 운용하고 프로그램적 영역은 주사위로 대체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건 정말로 가상현실 게임에 가장 가까운 영역이 아닐까 싶다.
“훗, 기대되십니까?”
홍기도 녀석이 한껏 들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살짝 아니꼬왔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지.
“솔직히······. 놀랐어. 엄청 기대되는데?”
“클클클. 내 말하지 않았더냐? 준비 많이했다니까?”
“정말로······.”
너무 많이 하셨네요.
나는 조팀장을 향해 엄지를 들어올렸다.
“그럼 시작 전에 잠시 담배 한 대 하지.”
함성준이 나를 보며 고개짓했다.
“그러시죠.”
나와 함성준은 밖으로 향했다.
“물건은 준비됐나?”
“······갑자기 목소리 깔고 그런 멘트를 날리시면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무슨 미국 마약딜러나 할 법한 대사를 하고 그러십니까? 지난번 거부할 수 없는 제안도 그렇고······.
의외로 갱스터 무비를 좋아하시나?
“여기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벽조목은 아닙니다.”
“그, 그렇군.”
함성준은 내가 내민 작은 주머니를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그 안에 담긴 주사위를 꺼내들었다.
“오오오!”
오! 함성준처럼 호들갑을 떤 것은 아니지만 나도 살짝 놀랐다.
개미가 들어있는 맑은 호박색의 주사위.
“진짜로 자네에게 부탁한 보람이 있군. 호박석이라니······. 이건 생각도 못했어.”
“이건 사실 홍기도 그 녀석 도움이 컷습니다. 아이디어부터······. 호박석도 그 녀석 아버지의 수집품이거든요.”
“그, 그렇군. 나중에 따로 감사인사를 해야겠어.”
“수석을 수집하신다고 합니다.”
“그래? 잘됐군. 마침 나도 집에 좀 있지.”
함성준은 나를 보지도 않고 오롯이 호박석 주사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주사위를 들어 햇볕에 비춰보거나 손안에 넣고 흔들었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라서 나도 기뻤다.
“주사위 함도 준비해 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거기까지 부탁드릴 수는 없더라고요.”
감사의 의미로 아버지를 통해 산삼주를 하나 보내드리긴 했는데,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모르겠다.
“정말로 고마워. 으흐흐흐.”
평소와는 웃음소리까지 달라진 함성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정작 담배는 태우지도 않고 다시금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 다 됐습니다. 우선 자리에 착석해주세요.”
“네가 진행자냐?”
“캐릭터 메이킹까지만 제가 합니다. 조팀장님은 바쁘시거든요.”
“그렇군.”
“우선 캐릭터 외모부터 정할까요?”
“외모를 정해? 고정된 모델이 아니야?”
“어차피 우리 회사 페이스온 기술 덧씌운거잖아요. 스파이스 게임에 접목된 커스터마이징 일부를 통째로 뜯어왔어요.”
이제는 더 이상 놀랄 기운도 남아있지 않다.
“의자 조율이 끝났으면 VR 써주세요.”
“알겠어.”
그렇게 내가 자리에 앉을 때였다.
“아! 늦잠자서 죄송합니다.”
“?”
갑자기 함송희가 잠옷차림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함께라고 했지? 그런데 왜 늦게와서가 아니라, 늦잠을 잤다는 거야?
“저는 어제 먼저와서 최종점검 끝내고 그냥 잤거든요. 헤헤.”
“네 캐릭터는 어제 메이킹 끝냈으니까. 지금 가서 씻고와.”
“네. 알겠습니다.”
홍기도의 지시에 함송희는 등을 돌렸다. 하긴······. 이 정도 엄청난 짓을 벌이려면 함송희 정도의 특급 프로그래머가 필요했겠지.
아무리 기반 작업을 미국지부의 제프리팀이 담당해줬다고는 해도 직접 여기서 손보는 것은 함송희 정도 되는 특급개발자가 아니라면 무리일 것이다.
진짜 고작 TRPG 한번에 맥베스 핵심인력들이 총동원되는 구나······.
“이게 본인들이 컨트롤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는데, 당장 거기까지는 무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화면을 넘겨드릴테니까. 선택해 주세요.”
“그럴거면 내가 그냥 모니터보고 만드는 것이 빠르지 않냐?”
“그러면 맛이 안 살잖아요! 지금 우리 여기 놀러온거라고요!”
“그, 그랬었지.”
분명 맞는 말이긴한데, 나는 왜 이렇게 신기술 체험 설명회라도 참여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걸까?
나중에 버츄얼 보드게임 카페 사업이라도 고민해 볼까? 단가만 맞출 수 있다면 이색 데이트 코스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머리색부터 골라주세요.”
“검은색.”
“아니, 아직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스파이스 캐릭터 메이킹 시스템 누가 기획했는지 모르냐? 검은색. 헤어 스타일은 14번.”
나는 검은 머리에 올백 헤어스타일을 선택했다.
“······진짜 싸움 못했으면 친구 없었을 것 같은 타입인거 아시죠?”
“너는 친구 많은 것처럼 말한다?”
“저는 많죠!”
“그때 클럽에서 본 걔들?”
“아니요. 걔네는 그냥 지인. 제 친구 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 궁금하지 않으니까. 말 안 해도 된다. 메이킹 계속하자.”
“흥!”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던 모양인데, 딱히 영양가 없는 헛소리일 가능성이 99%라서 나는 단칼에 잘라냈다.
“얼굴은 어떻게 할까요? 배경에 맞춰서 백인처럼 바꿀까요? 아니면 검게?”
“아니 그러고 보니 배경스토리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것을 보고 말았다.
“여······캐?”
“뭘 놀라나? 게임은 여캐가 진리 아닌가?”
“이걸영 상무님? 맞아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음성변조 기능까지 들어가 있어?
3D로 구성된 훤칠한 키에 눈가에 상처까지 있는 하드보일드한 여성 캐릭터를 보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리가 VR헤드기어를 통해 전달되는 덕분에 음성변조에 잡음도 없을 정도였다. 어쩐지처음 들어설 때부터 묘하게 방음도 잘 되어있고 뭔가 스튜디오 같은 느낌이 난다 싶더라니······.
“이건 정말 좋구만. 항상 저 녀석의 기괴한 콧소리 섞인 연기 때문에 몰입이 쉽지 않았는데······.”
반면 함성준은 잿빛 수염과 포마드가 잘 어울리는 장신의 미중년 캐릭터로 변신해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래봬도 제가 최다 MVP 수장자라는 것을 잊으셨어요?”
말투도 묘하게 여성스럽다. 무서울 정도로 위화감이 없다.
“클클클, 생각해보니 이걸영이에게는 아주 물만난 셈이로군.”
“제 이름 똑바로 불러주시죠. 마스터의 기본 아닌가요? 몰입감 깨지 마시고요.”
“······내가 실례했군. 이름이 뭐지?”
조팀장은 뭔가 검은 연기? 같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시스템을 대변하는 마스터인 만큼 일부러 독특한 처리를 해둔 모양이다.
“아! 그리고 배경설정은 곧 알려줄 테니까. 일단은 대강 캐릭터 외형 설정만 끝내둬. 어차피 세부적으로 메이킹 들어가면 소소하게 세팅 수정을 해야 할거야. 클래스와 배경설정에 따라서 본인이 원하는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은가?”
“오오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뭐랄까 진짜로 신개념 게임을 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곧 시작될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미칠 듯이 치솟고 있다.
“그럼 일단 나도 테스트 좀 해보지. 다들 느긋하게 들어보라고.”
순간 조팀장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마법과 기공, 거기에 이능력과 신성력과 같은 특별한 힘들이 혼재된 세계. 몇가지 부분에서는 현대의 기술력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나, 어떤 기술들은 형편없이 낙후된 불안정한 세계에서 여러분은 지금 아크로 폴리스라는 거대 도시의 민간보안업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평소의 조팀장의 목소리보다 보다 젊고 맑은 톤의 음색이었다.
“오오! 멋지네요. 느낌 있어요.”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전문적인 성우가 준비된 텍스트를 리딩하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지? 이 분위기는?
“역시 초짜는 가리킬 것이 많군.”
“역시 본 게임에 나서기 전에 기본적인 연습게임 정도는······. 아니지, 생각해보면 표세인 부회장은 면접도 안봤지? 낙하산이었잖아?”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주의를 줄테니, 일단 넓은 아량으로 귀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함성준과 이걸영은 그렇다치더라도, 홍기도 녀석까지 까불거리며 호들갑을 떠는 통에 나는 살짝 얼굴이 달아 올랐다.
“마스터가 나레이션 할때는 입 닫는 것이 테이블 매너입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게임의 템포를 끊은 것을 사과했다.
“흠흠, 그럼 다시 시작하지.”
조팀장은 살짝 목청을 가다듬으며 다시금 준비한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별도로 준비한 디젤펑크 풍의 음침한 분위기의 도시 일러스트까지 출력되었다.
-느낌있죠?
홍기도가 나에게 채팅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끼리 대화는 채팅으로 하는 거에요.
-알려줘서 고맙다. 그런데 저 일러스트는 뭐냐? 설마 저것까지 준비한 거냐?
-설마요. 그냥 인터넷에서 퍼온거죠. 우리가 영리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무리 조팀장이라도 일러스트까지 새로 그려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꼭 필요한 것들 제외하면 나머지는 인터넷에서 퍼온 것들이에요.
-······.
정정한다.
일러스트도 준비했다고 한다.
[아크로 폴리스는 신룡천자가 다스리는 동방제국과 서방의 제후연합의 알력 다툼 속에 서 중립권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반대로 양대 강국 사이의 무역권을 손에 넣어 무서운 기세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빛의 이면에는 어둠도 함께 하는 법.
아크로 폴리스의 부를 노리고 수많은 어둠의 세력들이 활개를 치는 무법도시라는 이면이 생겨났다.
동서의 대국들이 아크로 폴리스가 군대를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덕분에 갖은 음성조직, 변종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아크로폴리스는 자신들의 재력을 풀어 민간보안업자라는 시스템을 발족했다.]
[일당백이 가능한 이능력자들은 아크로 폴리스가 약속한 막대한 황금을 바라며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여러분들 역시 그 중에 한사람이었다.]
마법 같은 초현실적인 힘이 존재하는 디젤 펑크 세계관.
그리고 치안이 부실한 거대 도시에서 음성 세력이나 몬스터들과 싸우는 일종의 모험가 같은 포지션이라는 건가?
오케이 납득했다.
제법 흥미로운 설정이었다.
“잠깐 어드바이스를 하지. 기본 프리셋은 내가 준비했지만, 반드시 거기에 따를 필요는 없어. 하지만 반대로 기본 프리셋은 마스터링에 협조적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가산점이 붙는 다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군.”
그러니까, 조팀장이 준비한 시나리오에 적합한 예시 캐릭터들이 있으니, 그걸 선택하면 스스로 완전 자유롭게 새 캐릭터를 만드는 것보다 약간의 혜택을 부여한다는 거로군.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게된 내용이지만, 마스터링은 마스터마다 방식이 다른데, 어떤 사람은 채찍질로 플레이어들의 기강을 잡고, 어떤 이는 당근으로 살살 유도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조팀장은 당근 타입인 모양이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지 마시고 명확하게 혜택이 뭔지를 제시해 주시죠.”
“그러니까. 표세인 부회장 넋놓고 고개 끄덕이는 것 봐.”
“저요?”
함성준이 내 이름을 거론해서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잿빛 머리칼과 수염. 정말로 느낌이 색다르다.
“마스터가 제안한 것을 절대로 그냥 받아들이면 안돼. 독이든 성배일 확률이 7할이라고 생각해.”
“7할이라니요. 솔직히 조팀장님 스타일이면, 9할은 의심해야지.”
에이, 무슨 이런 놀이에 그렇게까지 의심들을······.
“쯧······.”
어? 지금 조팀장 혀를 차어?!
시작부터 함정카드?
정정한다.
조팀장은 당근이 아니라 함정으로 엿먹이는 타입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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