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사람을 무슨 사기꾼으로 보나, 초보자가 많으니 배려차원에서 기본 프리셋을 준비한 것 뿐이야. 싫으면 주사위 굴리시던지.”
조팀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듣기에는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플레이어인 함성준과 이걸영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한번 까 보시라니까요?”
“주사위 결과값하고 프리셋 세팅 비교 좀 해봅시다. 그래야 우리도 프리셋을 고를지, 주사위를 던질지 판단이 설 것 아닙니까?”
“요즘 세상에 정보 규제는 안통합니다. 우리에게는 알 권리가 있어요?”
“그렇지. 이게 무슨 대기업 횡포도 아니고 말이야. 과자도 포장지 전부 투명으로 바꿔야해.”
TRPG 캐릭터 메이킹에 대한 주제는 어느새 국내 제과업계의 폐단을 성토하는 주제까지 이어졌다.
“하여튼 늙으면 의심만 많아진다니까. 그래 보여줄게.”
결국 한참을 팽팽하게 맞선 끝에 조팀장은 자신의 프리셋을 공개했다.
“소총은 1D6+4. 최대 데미지 값은 10이군요.”
D6이라는 것은 6면체 주사위를 1번 굴려서 나온 값을 말한다. 그러니 소총의 최대 데미지 기댓값은 10이라는 것.
“그에 비해 검은 2D8에 힘보정 수치가 들어간다는 거로군.”
“힘 보정치 최대값이 5라고 했죠? 그럼 21이로군.”
노련한 플레이어들 답게 기성 룰북을 이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조금씩 발전시킨 독자적인 하우스룰을 사용하는 탓에 초보자인 나는 따라가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기획자다.
나는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대략적인 데미지 공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명중 보정을 계산하면 이거 총기가 너무 우세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도 않아. 근접은 결국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잖아. 게다가 우리는 예전부터 은, 엄폐 시스템 적용하고 있으니까.”
“흠흠, 그건 그렇죠.”
함성준과 이걸영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잊고 있던 TRPG 감각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는 다 이해한 거야?”
“룰을 숙지해 오는 것은 매너 아닌가요?”
“······무슨 룰인지도 안 가르쳐 줬잖아.”
“농담이에요. 저는 조팀장님 거드느라고 종종 살펴봤거든요.”
“여기 룰은 쉬워요. 부회장님.”
여기서 룰을 제대로 숙지 못한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인 것 같다.
하지만 게이머 경력이 몇 년이던가? 이런건 충분히 눈썰미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조팀장과 함&이 콤비가 외교전을 방불케하는 열띈 교섭을 벌이는 사이 기본룰들을 숙지했다.
“좋아. 그럼 프리셋은 관두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자고.”
“흐흐흐. 좋습니다.”
나는 이 부분이 사실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마스터도 결국은 기획자다.
모든 기획자들은 결국 유저가 게임을 클리어 하기를 바란다.
기획자의 성향이나 게임의 장르에 따라서 난이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클리어가 불가능하도록 설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팀장을 믿는······.
“이거봐 완전 함정 카드잖아. 이 총사 캐릭터 다좋은데 특성에 야맹증 붙어있어. 이거분명 어두운 장소나 밤에 전투 이벤트 붙이겠지.”
“이 검사는 수전증이야. 명중 패널티 붙여놨잖아. 템만 좋은 걸 쥐어주면 뭐해?”
“꼭 이런걸로 웃기려고 한다니까? 우리도 좀 편안하게 즐겨봅시다!”
“끄응······.”
내 믿음은 시작부터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일단 각자 입맛대로 포인트를 따져서 설계해보자고, 이 단계에서는 마스터 눈치 볼 필요 없어. 본인도 양심에 찔려서 이런 부분에서는 트집 안잡을 거야.”
“그럼, 그럼. 다 같이 웃자고 하는 건데······.”
뭐랄까.
묘하게 믿음직하다.
결국 나는 홍기도와 함송희의 도움을 받아서 캐릭터를 만들기로했다.
“일단 주사위를 굴려주세요.”
“하하하! 스텟 주사위 굴림은 무엇보다 중요하지. 여기 내 주사위를 쓰라고.”
갑자기 함성준이 내가 선물한 호박석 주사위를 꺼내들었다.
“어엇! 그거 뭡니까?”
“하하하. 표세인 부회장에게 선물 받았지.”
함성준은 나를 보며 찡긋 윙크했다.
“이거 호박석 아닙니까? 용케도 이렇게 멋지게 가공을 했군요. 지난번 조팀장님 주사위도 물건이던데······. 표세인 부회장, 진짜 이러기야? 왜 나만 없어?”
“어허! 이게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 인줄 알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지, 네가 알아?”
순간 이걸영까지 주사위를 부탁할까봐 간담이 서늘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함성준이 중간에서 커트해주었다.
“······좋은 물건이군.”
“형님 것도 좋지 않습니까.”
“훗, 그렇지.”
조팀장도 우리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고급스러운 나전칠기 상자에서 벽조목 주사위를 꺼냈다.
“언제봐도 명품입니다.”
“네 것도 진짜배기 물건인 것 같은데 뭘.”
조팀장과 함성준은 서로의 주사위를 훑어보며 미소를 나누었다.
“일단 6면체 주사위 3개를 굴리세요.”
호박석은 3개뿐이라서 20면체와 10면체 그리고 6면체가 각 1개씩 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주사위들을 이용해야 했다.
“잘해보라고, 스텟은 정말 중요하거든.”
“알겠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굴렸다.
“오! 6!”
“6!”
“6?”
운이 좋았던 걸까? 처음 굴린 주사위는 3번 연속 6이 나왔다.
“와, 부회장님 운 좋으시네요.”
“몇번 더 반복하셔야 해요.”
힘, 민, 체.
간략함을 추구하는 하우스룰의 규칙에 따라서 나는 연거푸 주사위를 굴렸다.
“세상에······. 18, 16, 15? 주사위 운이 너무 좋으신 것 아닌가요?”
“뭐야 이거! 제 2의 양성태야?”
“아니요. 저는 지난번 최고 점수가 17이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운이 좋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게 내 캐릭터는 힘 18, 민첩, 16, 체력 15라는 사기적인 스텟으로 완성이 되었다.
“스텟이 좋으면 무조건 검사를 하세요.”
“검사가 나은가? 나는 그냥 뒤에서 총질이나 좀 하려고 했는데?”
“총은 템빨로 밀어 붙여도 돼. 물론 막상 직접 썰어보면 결국 총은 안 들게 되겠지만. 이 스텟에 총은 아깝지.”
“그럼, 그럼. 지금 상황에서는 네가 우리 근딜 에이스 확정인데.”
함성준과 이걸영의 적극 권유에 나는 순순히 나의 클래스를 검사로 정했다.
예상보다 캐릭터 메이킹에 걸린 시간은 길었다. 그리고 결국 캐릭터 메이킹이 끝났다.
표세인 : 검사
함성준 : 암살자.
이걸영 : 총사
홍기도 : 사제
함송희 : 마법사
묘하게 근딜은 나뿐인 괴상망측한 결과물이 나와버렸다.
“밸런스가 좀 아슬아슬하지 않습니까? 근접이 저뿐인데요? 암살자도 총 쓰죠?”
“암살자라고 근접을 아예 감당 못하는 것도 아니니, 나름 이게 맞아. 부무장에 단검 있잖나.”
“그래. 게다가 조팀장은 예전부터 총기가 들어가는 룰에서는 묘하게 근접 전투에 박한 페널티를 먹였거든, 그러니 자네 정도 되는 스펙이 아니면 하는 수 없지.”
아무튼 그렇게 클래스까지 정해지자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려나 했는데, 아직 준비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번에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보상과 페널티가 어떻게 됩니까?”
이걸영의 질문에 모두가 조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것이 있었지.
솔직히 딱히 상품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냥 뭘지가 너무 궁금하다.
“훗, 그래 그러고보니 너무 시간을 끌었군.”
“그렇죠. 그렇죠. 이제 본게임 들어가기 전에는 공개해주셔야지요.”
“그럼요. 대체 뭐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시는지.”
함성준과 이걸영은 아주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비해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입들은······.
‘뭐지? 얘들 눈빛 왜 이러지?’
마치 주인이 맛난 간식을 꺼내려는 것을 눈치챈 애완견들의 눈빛이 저것과 비슷할까?
아무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는 오직 나뿐인 것 같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 맥베스는 일론 머스크와 여러모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시작부터 일론 머스크가 언급되었다? 설마? 나는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비록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와 협약을 맺고 일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이번 상품은 그의 회사 중에 하나인 스페이스X와 연관이 있지!”
“오오오!”
“진짜로?”
“대박!”
나를 포함한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페이스X가 거론되었다면 나올만한 이야기는 단 하나뿐이지 않은가?
“얼마 전 일론 머스크가 이벤트성 기획으로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우주여행을 신청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었어.”
“잠깐, 그런거라면 조팀장님이 아니라 조연아 회장 소관인 것 아닙니까?”
“연아가 나에게 관심있냐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냉큼 집었지.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나는 리얼 아웃도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잖냐.”
“오오오!”
얼핏 듣기로는 하루에 40억 수준이었다고 했다. 보통 2박 3일 기준이라고 했으니, 120억······.
솔직히 여기에 있는 인원들 중에서 돈이 쪼들리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조팀장과 나 그리고 홍기도를 제외하면 만만치 않은 금액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금액이 무료라니?
“일단은 회사 홍보도 겸하고 여러 가지 협의가 있던 덕분에 우주 여행관련으로는 모두 맥베스에서 지원하지. 그 외에 소소한 경비는 나 조양길이가 책임져줄 거야. 정말로 몸만 가면 된다는 거지.”
“우, 우리 나이에도 갈 수 있는 겁니까?”
함성준의 말에 이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지난번 우주여행도 억만장자 중에서 제법 연배들이 있는 이들도 있었지 않나? 건강 체크야 그쪽 기준에 따라서 상당히 신경을 써야겠지만······. 내가 말했잖나. 이건 양도가 가능한 상품이라니까?”
“크으······. 스케일 미쳤네요.”
홍기도 마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홍기도의 연인인 쉬린칭은 여기있는 모두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부자지만, 세상에는 돈으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했고 우주여행이라는 것도 그 중에 하나다.
“무료로 가는 우주여행······.”
어려서 운동하던 시절에 돈이 없어서(용돈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간식비로 다 써버려서) 집까지 버스 대신 런닝 트레이닝을 선택했던 시절의 표세인이 깨어난다.
공짜!
우주여행!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이 있을 수가 있을까?
“다들 눈에 기합 좀 들어갔군? 원래는 다른 것들을 생각했었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 클클.”
모두의 들뜬 모습에 조팀장도 기분이 좋은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우주여행에 대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함성준이 슬며시 나와 눈이 맞추쳤다.
‘아! 그러고보니 나를 지원해주겠다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캐릭터 스텟도 그렇고······. 이래저래 나에게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다. 나는 함성준을 향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홍기도의 아버님의 컬렉션까지 받아서 호박석 주사위를 만든 보람이 있다.
그런데······.
함성준의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뭐지, 이건?’
내가 의아함을 느낄때였다. 텍스트 메시지가 들어왔다.
-자네는 TRPG가 처음이라고 했었지?
함성준이 보낸 메시지였다.
-네. 맞습니다.
-그렇군. 내가 조언하나 해주지.
아무래도 내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러면 그렇지 전무군단을 이끌며 맥베스라는 거대 기업을 호령했던 남자가 고작 상품 하나에 눈이 멀어서 배신을 결심할 리가······.
-아무도 믿지 말게.
-????
생각해보니······.
이 사람 주사위 하나에 목숨을 걸던 사람이었다.
[외전] 내 눈을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