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333화 (333/346)

333.

특성과 배경까지 정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참고로 내 캐릭터 설정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름 : 세이안

직업 : 검사

스텟 : 근력 18, 민첩 16, 체력 15.

일단 스펙은 남부럽지 않은 완벽한 상황.

장비는 롱소드와 핸드건. 사실 총을 쓸일은 없을 거라고 했지만, 기왕 총이 있는 세계관이니 권총이라도 안 드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총은 민첩 능력치로 명중률 보정을 받는다고 하는데, 정작 총사인 이걸영의 캐릭터보다도 내 민첩 수치가 높지 않은가?

나는 잠시 멀리서는 총을 쏘다가 거리가 좁혀지면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적들을 썰어버리는 내 캐릭터의 활약을 상상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참고로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이런 상황이었다.

함성준 : 하멜(암살자)

이걸영 : 리건(총사)

홍기도 : 키드(사제)

함송희 : 발렌타인(마법사)

“그럼, 일단 저녁식사 전까지 튜토리얼을 시작해보기로 하지.”

조팀장은 양성태가 준비해준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다시금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음성변조 스위치를 ON으로 설정했다.

그러자 아까 들었던 전혀 다른 전문 성우 같은 음성이 다시 출력되었다.

[아크로 폴리스의 민간보안업자들은 식스헬이라는 펍에 모여 의뢰를 수주하거나, 한 잔의 독한 알콜로 하루의 피곤함을 달랜다.]

[당신은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 덕분에 식스헬을 찾았다. 부디 큰돈을 만질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코를 찌르는 정체불명의 연초형 약물 향과 알싸한 알콜 내음으로 가득한 바. 그런데 오늘따라 마스터가 먼저 당신을 불렀다.]

[이봐, 이리로 와봐. 좋은 건수가 있어. 마스터의 부름에 반쯤 전면이 오픈된 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당신과 비슷한 인상의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당신은 본능적으로 이들이 당신과 같은 민간보안업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조팀장이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노련한 이걸영은 이것이 우리의 차례라는 것을 바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저 친구가 마치막인가?”

리건(이걸영)의 질문에 마스터(조팀장)가 대답했다.

“맞아. 의뢰인이 원한 숫자는 다섯명이었고 이걸로 다섯명이 모두 모였지. 이제 일 이야기를 시작할까?”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야? 최소한 통성명 정도는 할 시간을 줘야지. 절대로 함께 일을 하면 안 되는 타입일 수도 있잖아?”

“······너만 조심하면 다른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우와, 이걸영과 함성준 그리고 조팀장의 미친 열연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음성변조 프로그램을 이용해 목소리까지 평소와 다르기 때문일까? 정말로 게임 속 캐릭터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함성준의 목소리와 말투는 진짜 완벽했다. 음성변조 기능을 이용하는 것은 현재 이걸영과 조팀장 뿐이었다. 함성준은 지금 본인의 목소리로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멋지다. 조금만 목소리를 낮게 깔면 이렇게 멋진 음성이었구나 싶다.

과거 일개 과장이던 시절에 전무군단을 이끄는 맥베스 최대 파벌의 수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런 카리스마 그대로라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 이미지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너무 멋지다.

“지금 시비 거는거야? 머리통에 납탄 피어싱 하나 박아줘?”

“가장 곤란한 동료가 바로 당신 같은 트리거 해피지. 누가 누굴 가늠해보겠다는 건지 원······. 마스터, 내가 왜 팀플레이를 선호하지 않는지, 잘 알 텐데?”

“자자, 그만들 하라고 여기에는 신참도 있어.”

“신참? 지금 나에게 베이비시터 역할까지 시킬 셈이야? 이거 큰 건이라면서?”

“그 신참들을 보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들어보라고. 일단 이쪽에 사제분부터 시작해볼까?”

“안녕하십니까. 매장교단의 키드라고 합니다.”

와, 홍켓몬 이 녀석! 그럴듯하게 끼어드는구나!

“놀라지 말라고 무려 매장교단 대사제가 직접 추천서를 보낸 인물이야. 차기 신관이 되기 전에 순례행을 하러 속세에 나왔다는군.”

“매장교단······. 쯧, 그 미치광이들과 얽히면 좋은 일이 없는데.”

“그래도 저희와 척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쯧.”

물흐르듯이 이어지는 연기에 나는 당황했다. 대본도 없는 이른바 즉흥극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나 자연스럽다니?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홍기도 이녀석은 분명 TRPG가 뭔지도 잘 모른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연기라니? 이녀석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이쪽분은 마법사지. 어설픈 길거리의 점쟁이들이 아니야. 강철 도서관에서 온 진짜배기 마법사라고, 그거면 보증수표 아닌가?”

“뭐, 마법사야 필요하지.”

“······발렌타인이다.”

“그게 다냐?”

“여기가 살롱이라도 되나? 친목도모라도 하고 싶은 거면,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것 같군.”

우와······. 홍기도 녀석의 연기에도 놀랐지만 함송희도 그에 못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낮게 깔린 목소리라니!

생각해보면 처음 함송희를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리 밝고 하이톤의 음성이 아니었었다.

“이년이!”

-쾅!

이걸영은 진짜로 자신의 테이블을 치며(살짝 소리만 냈다.) 이를 갈았다.

“······.”

“······.”

잠깐의 대치상황.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이제 나의 턴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여기서 제가 돌발 액션을 취해도 됩니까?

-뭐든 자유야.

-검을 뽑아서 앞에 있는 술병의 입구를 자를 수 있을까요?

-호오······. 주사위 굴려서, 어디보자, 네 민첩성 보정 수치면······. 10이상만 나오면 되겠네. 하지만 실패하면 좀 부끄러울 거야.

설마 내가 10도 안나올까?

나는 주사위를 던졌다.

결과는 11.

어후, 아슬아슬했네?

[리건과 발렌타인이 묘한 기싸움을 계속하는 사이. 지금까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가 번개처럼 검을 뽑아 앞에있던 보틀의 입구를 잘라버렸다. 어찌나 깔끔하게 베어냈는지, 매끈한 단면에 모두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조팀장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다들 진정하시고 한잔 받으시죠. 세이안이라고 합니다. 보시는 대로 칼을 좀 씁니다.”

“함부로 칼을 뽑다니······. 라고 말하면서 술잔을 내민다.”

[세이안의 퍼포먼스 덕분에 분위기는 다소 진정되었다. 마스터는 그 모습이 퍽 재미있다고 생각하는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딱히 이 친구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어차피 전위를 맡을 칼잡이는 필요한 법이니까. 자, 어떤가? 신참이라고는 해도 딱 구색이 맞게 갖춰진 셈이지?”

[마스터는 자신이 모아온 인재들의 구성이 생각보다 쓸만하다고 느끼며 살짝 기분이 격양되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지.”

조팀장은 나레이션과 마스터의 대화를 동시에 진행하면서도 숨소리 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의뢰는 간단해. 나흘 전 시장 따님이 납치되었어.”

“······설마 시장 딸을 구출해 오라는 것은 아니겠지?”

하멜(함성준)의 말에 마스터(조팀장)는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뭐 들은 것이라도 있나?”

“들을 필요가 있나? 시장 딸을 납치했다면 보통 녀석들이 아닐 텐데, 여기 있는 다섯이서 그런 미치광이들을 찾아가서 시장 딸을 구해오라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전에 납치한 녀석들이 누군데? 그 정도는 파악이 됐을 것 아니야?”

리건(이걸영)의 질문에 파워포인트로 제작된 인물의 신상이 올라왔다. 일러스트와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서였다.

마치 영화속에 경찰들이 타겟이 정보를 기록해둔 문서같았다.

정말 준비 많이 하셨구나.

“납치범들의 신상과 현재 위치까지 모두 조사가 끝났다. 데드락이라는 별 볼 일 없는 갱단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군용 화기들을 두르고 빌딩을 요새화 해버렸지.”

“군용화기? 하지만 자그마치 시장 딸이잖아. 국세청 징수 부대라도 보내면 되는 것 아니야?”

“물론 그렇지. 하지만 징수부대의 작업방식을 잘 알지 않나. 그 지폐염색쟁이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살육뿐이지. 인질이 시장 딸이라니까?”

“오케이. 이야기 끝났군. 징수부대도 엄두를 못 낼 정도라면 우리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거잖아? 어설프게 발을 들였다가 시장 딸이라도 죽었다가는 아크로 폴리스에 발도 못들이게 되겠지.”

리건(이걸영)은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정말로 실감나는 연기라서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될 정도였다.

영화와 드라마가 세상을 지배한다고는 해도 굳이 극장을 찾아가서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그 사람들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현장감이라니······. 정말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맞아. 하지만 여기에 한가지 돌파구가 있다 이거지.”

“돌파구?”

다시금 화면이 바뀌며 이번에는 지하도 같은 청사진이 등장했다.

“이 지하로는 과거 유명 갱단이 도피로로 삼기 위해 만들어놓은 물건이지.”

“설마?”

“그래. 상황만 허락한다면 몰래 잠입해서 시장 딸만 쏙 빼 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거지. 게다가 놈들의 무장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건물 외부에 설치된 터렛이기 때문에 지하로를 이용한다면 그것들과는 마주칠 일이 없지.”

“호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야.”

잠자코 듣고 있던 하멜(함성준)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자네들을 위한 두 번째 희소식이 있지.”

“희소식?”

“이번 일에 대한 보상금이 얼마냐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거 아니겠나?”

“뜸 들이지 말해봐. 대체 얼만데?”

“두당 1억 크레딧.”

더 이상 이견은 없었다.

“그럼 결정된 것으로 알고 이제 한가지만 결정하면 되겠군.”

“뭐지?”

“리더를 경정해줘야겠어.”

마스터(조팀장)의 말에 모두는 잠시 머뭇거렸다. 본능적으로 리더 역할을 맡는 것이 MVP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정신 없이 쏟아내는 것이 TRPG의 본질이기에 반대로 최종결정권자인 리더의 역할은 무척 주요하다.

무엇보다도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는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 이제라도 약속을 지키지는 않을까?’

나는 나를 지원해주겠다 약속했던 함성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함성준은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슬쩍 눈길을 피했다.

아무래도 우주여행만큼은 양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함송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저 친구를 추천하겠어.”

발렌타인(함송희)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지?”

“일단 사제는 안 돼.”

이 세계에서는 여러 이유로 마법사와 사제가 엘프와 드워프 정도의 관계라고 한다. 눈 마주쳤다고 죽이려 들지는 않지만, 결코 사이 좋을 수는 없는 그런 관계.

“그리고 당신들은 일단 말이 너무 많아. 리더라는 것은 묵묵히 결정을 내리는 거지. 당신들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바쁠 것이 틀림 없어.”

“흠······. 그럭저럭 타당한 이유네? 나도 찬성.”

“······리더라는 것은 좀 더 연륜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진짜로 저 지원해주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하지만 함성준 혼자만 다른 의견을 내도 소용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이 의리 없는 파티의 리더가 되었다.

[외전] 그거 불량품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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