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야.”
홍기도는 고개를 들어 남궁원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더욱 짙어진 다크서클과 푸석한 머리칼이 그녀가 짊어진 업무의 과중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그녀의 눈빛은 훨씬 더 생기가 넘쳐흘렀다.
염원하던 자신만의 개발실을 꾸리고 자신이 생각하던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된 상황. 남궁원에게는 잠잘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기쁜 나날이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홍기도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남궁원이 좌우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표세인 부회장님 언제 회사에 복귀하신대?”
“갑자기?”
“너라면 알 것 아니냐?”
“육아휴직 신청하셨잖아. 그런데 누가 그러는데 임원이 육아휴직 신청은 전례가 없고······. 또 임원은 기본적으로 계약직이라서······.”
“표세인 부회장님이 일반 임원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정말 1년 가까이 자리를 비우실 것 같아?”
“응. 정확히는 1년 넘게 안 돌아오실 것 같은데?”
조연아 회장이 출산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것과 동시에 바톤 터치라도 하듯이 표세인은 회사를 떠났다.
무려 육아휴직이라는 핑계에 모두가 황당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표세인은 육아휴직과 동시에 정식으로 부회장 직책에서 사임했다.
이미 임원 승진 시점에서 계약직으로 전환한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그는 부회장 직책을 사임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맥베스의 소속원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상당히 파장이 클 수밖에 없는 내용이기에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었다. 사실 공표 된다고 해도 크게 동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그는 맥베스 회장의 배우자가 아니던가?
‘그렇다고는 해도 남궁원 입장에서는 다소 데미지가 올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겠지.’
이제는 이런 표현도 다소 우스워지긴 했지만 이른바 표세인 팀이라 불리는 팀원 중에서 남궁원은 다소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다.
홍기도와 함송희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팀원이라는 느낌이라면 남궁원은 표세인에게 자신의 후계자와 같은 느낌이었다.
딱히 스승과 제자라는 인식은 아니지만, 표세인은 내심 자신이 떠난 빈자리를 남궁원에게 맡길 계획은 은연중에 계속 드러냈었다.
당장 고작 대리급(물론 당시 표세인도 과장급이었다.)에 불과한 남궁원에게 프로젝트 컨트롤을 통째로 떠맡기거나 하는 것에서부터 홍기도는 내심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는 불만조차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세인이 떠난 뒤의 이야기니까.
자신은 표세인이 떠난 후의 맥베스에 딱히 큰 미련이 없는 사람인지라, 표세인의 빈자리를 지키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긴 해.”
“뭐가?”
“너에게는 직접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까, 뭘.”
“바람 쐬러 가자.”
두 사람은 옥상으로 향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올라오냐. 너 담배 끊지 않았느냐?”
“······알면서 그렇게 당당하게 담배를 꺼내냐?”
“쉬린칭이 끊으래?”
“아니. 나도 곧 아빠가 되니까.”
“······그, 그렇군.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네.”
남궁원은 살짝 당황했지만 그러면서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전에 너 실장으로 진급할 것 같다고 했던 것 기억하지?”
“응.”
“그것에 연장선 같은 이야기인데, 네가 표세인······. 형의 후계자라는 거지.”
“형? 후계자?”
“솔직히 말할게. 세인이형 부회장직 내려놨어.”
“뭐? 잠깐, 임원은 계약직이잖아.”
“그래. 핑계는 휴직이지만 공식적으로는 회사를 떠난 셈이지.”
“안 돌아온다고?”
“돌아와도 정말로 몇 년은 지나야겠지. 솔직히 돌아오지도 않을 것 같지만.”
“대체 왜?”
“그건 나도 모르지.”
표세인이 회사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홍기도조차 알지 못했다. 그것이 표세인이 오랫동안 바라온 꿈이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든 형은 너를 후계자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나에게 맥베스 물려준다고? 아니면 기둥 소프트?”
“······그게 아니라 핵심 개발자로서 해야 할 역할 말이야.”
“아!”
“그리고 그것은 조연아 회장님도 동의하는 느낌이잖아. 너도 느끼고 있지? 지금 너에게 쏟아지는 기대를?”
신임 실장임에도 가장 큰 개발실을 꾸려버렸다. 이와 같은 전례 없는 전폭적인 지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묘한 움직임 때문에 더욱 표세인을 만나서 대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너도 참 너다.”
“뭐가?”
“용건이 있으면 전화하면 될 것 아니야? 휴직 중이라고 전화도 못 받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어쨌든 휴직 중인데 회사 일로 전화하기가 좀 그랬어.”
“그래. 아무튼 너는 이제부터 조연아 회장님과 자주 뵙게 될 거야. 회장님의 오른팔이 되어서 맥베스를 이끌어가는 거지.”
“훗, 내가 회사를 이끌어도 괜찮겠냐?”
남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홍기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밖에 없잖아.”
“너는?”
“나는 안돼.”
“왜? 갑자기 안 하던 엄살이냐?”
“나 곧 회사 그만둘 거거든.”
“뭐?”
홍기도의 갑작스러운 말에 남궁원은 화들짝 놀랐다. 이 무슨 뜬금없는 퇴사 선언이란 말인가?
자신과 함께 최연소 실장으로 고공행진 중인 상황에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다니?
“진심이냐?”
“진심이지. 솔직히 그것 때문에라도 표세인의 후계자는 너였던 거지.”
“······.”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표세인의 후계자 같은 것에는 관심 없어. 따지자면 하극상에 관심하고 있지.”
“······그러냐.”
아무리 홍기도라지만 설마 퇴사와 같은 주제로 장난을 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로 담백하게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미 그의 내면에서 정리가 끝난 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동안 고마웠고 잘 지내라.”
“그래서 여기를 떠나서 뭐 할 건데?”
“나도 육아에 좀 전념하려고.”
“뭐? 아니, 너 진짜 정신병자냐? 표세인 부회장님이 육아 휴직한다고 너까지 그걸 따라 하겠다고?”
“따라 하는 거 아니야. 쉬린칭이 중국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필요한데, 알다시피 중국이 지금 상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니까.”
세계적으로 판데믹의 기세가 주춤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독 중국은 진통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아는 한국에서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쉬린칭도 안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야?”
“쉬린칭은 일반인이 아니니까. 이런저런 신변 정리를 해야 할 일이 많지.”
“일반인이 아니라니······. 하긴 세계 기준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지. 너 진짜 인생 폈구나.”
“난 딱히 원래도 돈 걱정은 한 적 없는데.”
뭔가 얄미운 대답인지라 남궁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홍기도가 딱히 돈 자랑을 하는 타입은 아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래. 언젠가 또 보겠지.”
“······나 그렇게 바로 가는 것은 아닌데?”
“너는 표세인 부회장님께 말씀 드린 거냐?”
“아니. 이제 슬슬 해야지. 그리고 내가 당장 한국을 떠나는 것도 아니니 너무 비장미 넘치는 이별 이벤트까지는 필요 없잖아?”
“하긴 그렇네.”
“아무튼 힘내라. 에이스! 맥베스의 미래는 네 손에 달려있다.”
“킥, 에이스라······.”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표세인은 자신을 그렇게 불렀었다.
우리 팀의 파이터.
우리 팀의 에이스.
“좋아. 표세인 팀의 에이스로서 제대로 한 번 보여줘야겠네.”
“그래. 파이팅이다.”
“그런데 너.”
“응?”
“표세인 부회장님을 좋아해서 맨날 흉내 내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예고 없이 사라지는 것까지 흉내 내지는 마라. 주변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미리 언질 정도는 줘.”
“······그렇게 할게.”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
*
*
“무슨 일이십니까?”
양성태는 자신의 방을 방문한 홍기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음······. 안 괜찮았으면 좋겠군요.”
“네?”
“음······.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지요.”
양성태는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나 응접용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차는?”
“아무거나 주세요.”
“네.”
양성태는 보이차를 내주고 건너편에 앉았다.
“언제쯤으로 생각하십니까?”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번 일은 표세인 형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그렇습니까?”
“네. 쉬린칭이 중국으로 가야 하는데, 거긴 지금 육아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니까요.”
“음······. 솔직히 말입니다.”
양성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표세인씨나, 홍기도씨 모두 꼭 본인들 손으로 육아할 필요는 없는 분들 아니십니까? 물론 제가 아이가 없는 탓에 부모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부모가 보육시설을 이용하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니까요.”
“그렇죠. 그게 일반적이죠.”
“그런데 굳이 본인들 손으로 육아하겠다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건 설득이나 이런 차원이 아닌 순전히 제 개인적인 호기심입니다.”
조연아 회장이 산후조리를 끝내고 회사에 복귀하겠다는 소식을 전하던 날이었다.
‘저 육아휴직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신청이요? 누구에게요?’
당장 회장이 없는 상황에서 부회장인 표세인이 대체 누구에게 육아휴직을 신청한다는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당황스러웠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더욱 양성태를 놀라게 했었다.
‘얼마나 휴식기를 가지실 예정이십니까?’
안식년이라고나 할까? 최대 1년 정도를 넘기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표세인은 양성태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적어도 3, 4년 정도는······. 게다가 아마도 저는 맥베스로는 다시 복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7층 마굴 팀의 발족 이후 어쩌면 이런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표세인이라는 남자는 기본적으로 권모술수에 능하고 사람들을 장악하는 능력까지도 뛰어나지만, 사람의 재능과 그의 성향이 완벽히 일치하는 경우는 의외로 드문 법이었다.
표세인은 순수 개발자이며 천성적으로 이런 대기업의 시스템, 그리고 임원의 역할에는 맞지 않는 타입이었다.
언제나 한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마굴팀의 모습을 지켜보며 입맛을 다시던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 왔었다.
아마도 표세인이 새롭게 개발자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마굴팀과 같이 보다 자유롭고 속박이 없는 개발팀과 함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세인이 형 생각은 모르겠고요.”
“그것도 드문 일이군요.”
“제 생각은 간단해요. 저 우리 아들 멋있게 길러야 하거든요.”
“멋있게?”
“네. 그래야 나중에 표세인 형의 딸 인아를 내 며느리로······. 아, 이건 일단 못 들은 걸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홍기도의 말에 양성태는 살짝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새끼가······. 표세인하고 관계없다더니······’
[외전] 있는 남자, 양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