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표세인······. 이제는 이름으로 불러도 되려나?”
“네. 그럼요. 본인도 그러라고 할 겁니다.”
문상훈이 슬쩍 자신의 눈치를 살피자 양성태가 잔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 한동안 얼굴 보기는 힘들겠지?”
“얼굴만 보려는 거라면 방문할 수도 있겠지만······.”
“내 말이 그게 아니란 것을 알지 않나.”
문상훈의 지적에 양성태는 또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압니다. 저도 안타까워서 말해본 겁니다. 네. 아마······. 아니, 어쩌면 앞으로 회사에서 얼굴 볼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홍실장 그 친구도 사직서를 제출했다면서?”
“그······! 네, 그 친구도 그랬지요.”
순간 양성태가 그답지 않게 살짝 급발진하려 했지만 금방 자신을 다잡았다.
‘내 계획이 틀어졌군.’
표세인이 자신을 대신할 차기 개발의 핵심 인력으로 남궁원을 택했다면, 양성태는 관리의 핵심 인력으로 홍기도를 낙점하고 있었다.
물론 이 계획에 대해 표세인은 우려 섞인 반응이었지만, 의외로 마굴팀을 비롯한 윗사람들의 평가는 괜찮은 편이었다.
직급이 낮을 때야, 높은 사람들에게 눈총을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이후로 홍기도만큼 모두에게 두루두루 호의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인물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의외로 리더쉽(?)이라고 할 만한 묘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여러 일을 주도하는 포지션에 서는 기질이 있었다.
“솔직히 저는 홍기도 그 친구는, 어떤 의미에서 표세인 보다도 리더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인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하긴 뭐 마굴 팀과도 잘 지내고······. 한번은 조팀장님을 휘하에 두고서도 프로젝트를 잘 이끌었지?”
“네. 천성적으로 위아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시대가 조금만 더 전이었으면 빈말로도 리더로 좋은 재목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요즘 시대에는 나쁘지 않은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연륜이 붙으면······. 지금은 단점이라 여겨지는 많은 부분도 모나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 가만······. 혹시 조팀장님이 약간 그런 타입 아닌가? 장난기 많고 의외로 섬세하고······.”
“네. 약간 그런 느낌이 있죠.”
많은 사람이 표세인을 기꺼워하지만 유독 조양길과 홍기도는 표세인을 좋아했다.
그리고 조양길과 홍기도가 표세인과 굉장히 죽이 잘 맞는 것은 그 두 사람이 무척 닮은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양성태는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네? 그럴 듯한데?”
회장이라는 묵직한 직책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그의 곁에서 오랜 시간 관찰하다 보면 누구나가 알게 된다.
조양길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다소 가볍고 장난기가 많은 인물이다.
문상훈을 비롯해 임원급 중에서 조양길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홍기도를 떠올려보면 같은 위치에 올라가서는 똑같이 장난을 치고도 남을 녀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살짝 오싹한데?”
“그렇습니까?”
“생각이 그쪽으로 치우치니까, 정말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껴지는데? 게다가 키는 좀 차이가 나지만, 둘 다 마른 체형이라는 점도 그렇고······.”
“조팀장님도 젊은 시절에 무척 미남이셨습니다. 조연아 회장님을 비롯한 자제분들도 모두 훤칠하시지요.”
“이걸영 상무님이 대학 시절에는 자신이 킹카였고 다른 두 분은 별것 없었다고 하시던데?”
“네. 본인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자신은 대학 시절에 게임을 만들거나, 플레이하는 것에만 집착하느라고 여자 그림자도 못 보고 살았다고요.”
“그건 좀 다르네.”
“도플갱어 이야기도 아니니까요. 어쨌든 아쉽군요.”
양성태는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소 강경한 성향의 조연아를 정점에 두고 좌우에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남궁원과 주변을 두루 아우르는 부드러운 홍기도의 성향이 맞물리면 무척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그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홍기도는 휴직계가 아닌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군요.”
“그 친구가 유망하다고는 해도 아직 자네가 겁먹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문상훈이 놀랐다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양성태가 슬며시 송곳니를 드러냈다.
“반대입니다.”
“반대?”
“제 계획을 아주 산산이 부서졌으니······. 적으로 만나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겁니다.”
“······자네가 이렇게 열을 내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군.”
현재의 온화한 양성태의 모습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양성태는 기본적으로 온화했으나, 때때로는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냉기를 뿌려대기도 했다.
“홍기도 그 친구······. 고생 좀 하겠구만.”
훗날 홍기도는 정말로 카이두 코리아를 경영하며 양성태에게 몇 번이고 발목을 잡히며 고생하고, 그렇게 성장하게 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언제고 이 빚을 갚아줄 기회가 있겠지요.”
“······독기가 바짝 올랐구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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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녀석이 그렇게 떠나버렸구나.”
조양길이 아쉽단 듯이 중얼거렸다.
“내 뒤를 이어주길 바랐는데.”
“아빠의 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듣고 있던 조연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응? 아, 그거 말고 기둥 소프트 팀장 말이다.”
“아! 그렇네요. 솔직히 거기 말고 맥베스에서의 역할을 구상했는데······. 양성태 대표가 그린 미래계획. 그것참 그럴듯했단 말이죠.”
“나도 들었다. 홍기도와 남궁원이를 네 좌우에 두는 것이었지? 그럭저럭 괜찮은 그림인 것 같더구나.”
“그래서 참 아쉽네요.”
“표세인이가 없으니 남아 있으라고도 할 수가 없고······.”
“오빠도 막상 잡지는 않았을걸요?”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표세인 본인부터가 회사를 떠난 상황에서 홍기도의 거취까지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표세인의 휴직계를 빙자한 사퇴와 사직은 어찌 보면 그리 충격적일 것도 없었다. 어쨌든 현 회장인 조연아의 남편이고 전대 회장인 조양길이 팀장으로 있는 기둥소프트의 대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홍기도는 달랐다. 게다가 그의 배우자가 누구이던가?
맥베스를 몇 번은 사고도 남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재력의 소유자였다.
굳이 표세인이 회사를 떠나는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제가 반성해야 할 일이네요.”
“네가? 이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만? 게다가 원론적으로 따지고 보면······.”
조양길은 말을 하던 중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 홍기도가 퇴사하는 이유가 쉬린칭에게 있다면, 이것은 당시 싫다는 홍기도를 억지로 중국에 보낸 당시 관련자들 전원의 잘못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상태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홍기도라는 인재를 무척 아깝지만, 쉬린칭이라는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난 것은 맥베스의 큰 행운이었으니까.
따라서 이 일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는 부드러움이 좀 부족하잖아요?”
“어?”
“양성태 대표가 홍기도라는 인재를 안타까워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제가 좀 더 둥글둥글한 성격이었다면 그의 빈자리를 그렇게까지 아쉬워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조양길은 어설픈 위로 따위는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들 부녀의 소통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높은 가능성이 보이는 종류의 문제도 아니겠죠. 새로운 인재를 찾아야겠어요.”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그거야말로 경영자의 일이지.”
“추천해줄 만하신 인재가 있나요?”
조연아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좀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자신보다 나은 재주를 가진 사람에게는 지체 없이 부탁한다. 물론 그 부탁은 다소 요구처럼 들린다는 것이 퍽 그녀다운 느낌이다.
“흠······.”
딸의 부탁에 조양길은 엄지로 턱을 문대며 고민에 잠겼다. 몇몇 얼굴들이 머리에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그들의 얼굴을 지웠다.
능력의 갭차와 발전 가능성에서 남궁원에 비해 너무 뒤지며, 조연아와 남궁원 두 사람분의 날카로움을 진정시킬만한 외교관 유형의 인재는 찾기 쉬운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얼추 가능성이 보인다 싶어도 나이 차이가 너무 컸다.
그 정도 나이 차이라면 양성태가 버티고 있는 동안에는 나설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이건 안 되겠군. 양성태 불러. 나는 일선에서 물러 난지 너무 오래되었어.”
결국 그렇게 양성태가 호출되었다.
“홍기도의 빈자리······. 말씀이시군요.”
“그래. 사실 이건 우리보다도 네가 더 신경 쓰던 일 아닌가?”
양성태 본인도 아직 한창나이임에도 이후의 일에 대비해서 인재를 키울 생각부터 한다. 참으로 양성태다운 사고방식이라는 느낌이었다.
“홍기도 그놈을 대신할 만한 인재, 있지? 아무 대책 없이 일안 하나만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몇몇 있기는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무게추 균형이 완벽히 평평해질 거라는 그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끄응······. 자네 생각도 그렇다면, 난감하군.”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의 대답이 나오자 조양길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다른 방식?”
“조연아 회장님과 남궁원 실장의 예리함을 다소 무뎌 보이게 하는 방법입니다.”
“응? 그게 가능한가?”
“네. 아마도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물론 이상적인 그림은 아니지만, 다른 종류의 시너지를 기대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어떤?”
“자택 근무 중인 김태호라는 사원이 있습니다.”
“아! 인디게임 때 우리와 붙었던 매지션 서바이브를 개발한 그 녀석을 말하는 모양이군?”
“그 친구는 개발 능력 하나만 놓고 보면 두말할 나위 없는 천재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를 남궁원과 한 번 붙여 보시지요.”
“그게 가능한가? 집 밖으로 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인물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근래 다소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쿨런에 패배한 이후······. 일인 개발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매지션 서바이브도 자네가 암암리에 보조해서 티가 덜 나는 것이지, 온전히 일인개발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뭐 그렇긴 하지요.”
양성태는 대인관계를 어려워하는 김태호를 대신해 수많은 외주 업무들을 발주하고 관리하며 김태호의 까다로운 수정 요청까지도 대신 조율하며 게임 완성을 뒷바라지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지 않는 김태호였기에 더더욱 협업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태호라를 개발 원툴 인재를 심는 것으로 남궁원 실장을 다소 다른 쪽까지 빼내는 것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남궁원 실장은 사실 여러 면에서 다재다능한 인재입니다. 개발 하나에만 전념시키는 것도 아깝지요.”
“그런가?”
“대리 시절부터 좀비로얄 개발사에 상주하며 그곳 사람들을 컨트롤해온 인재입니다. 홍기도와는 분명 다르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올라운더형의 인재지요.”
“좋아. 이 부분은 역시 자네에게 맡기는 것이 답일 것 같군.”
양성태의 이 계획 덕분에 남궁원은 단순 개발자를 넘어 완전한 맥베스의 전문경영인으로 발돋음하는 계기가 된다.
덕분에 훗날 카이두의 대표인 홍기도와 남궁원의 치열한 인수합병 당시에도 양성태의 유지(?)를 지켜 홍기도를 끝까지 괴롭히게 된다.
양성태.
그는 뒤끝이 있는 남자였다.
[외전] 견원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