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뭐야? 설마 간담회 준비 확인이라도 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문상훈은 양성태를 향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 것 아닙니다.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커피?”
문상훈은 의아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양성태가 커피 따위를 권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서로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비교되는 탓에 의식하는 것 뿐, 업무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좀처럼 엮일 일이 없었던 사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커피씩이나? 설마 간담회 때문······. 아니지. 아니야.”
간담회 준비를 나에게 맡겨서 사죄의 의미로 커피를 사려는 건가? 라고 말하려다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내가 호구처럼 간담회를 혼자 떠맡은 상황이면 안 되지.’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양성태를 밀어내고 간담회 준비를 지휘하는 것이다. 실제로 양성태도 내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다. 문상훈은 스스로 자기 최면이라도 하듯이 머릿속을 정리했다.
“간담회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용건이냐니까? 솔직히 우리가 용건도 없이 커피나 마실 사이는 아니잖아?”
문상훈은 내심 궁금한 상황이었지만 일단 한번 운을 뗐다.
그러자 양성태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시간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제가 아니라 문상훈 차장님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도움?”
“네.”
결국 그들은 카페로 이동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셨나?”
어쩐지 양성태가 자신에게 목을 메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라서 문상훈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 드리는 이야기는 비밀입니다.”
“비밀엄수? 음······. 께름직한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가 않은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
“만약 이 이야기가 새나가면 곤란해지는 것은 제가 아니라 문상훈 차장님이니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회장님께서 문상훈 차장님을 서포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회장님? 서포트?”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문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포트라니? 난데없이 조회장이 자신을 왜 서포트한단 말인가? 그리고 서포트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상훈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회장님께서 문상훈 차장님께 과제를 내주실 겁니다.”
“과제?”
“예. 그 과제를 무사히 수행하시면 회장님께서 직접 보상을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영문을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음?”
양성태의 도발적인 질문에 문상훈의 눈썹이 꿈틀했다.
다른 누구에게라도 무시당하는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그 상대가 양성태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하자······. 회장님이 나에게 줄 만한 보상. 그리고 나에게 보상을 줘야 하는 이유.’
과제니 뭐니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애초에 문상훈 본인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먼저 꺼낸 이야기다.
‘회사의 오너가 줄법한 보상이라면 뻔하다. 그러면 왜 주는 걸까? 가만 보상 이전에 서포트라는 단어를 썼다.’
딱히 이런 정치적인 견해에 조예가 있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머리 하나는 좋은 문상훈이었기에 그의 사고는 금세 해답을 향해 내달렸다.
“나를 키워서 함성준 전무의 대항마로 삼기 위해?”
“······정말 대단하시군요. 이걸영 상무님을 건너 뛰고 본인을 대항마라고 생각하시다니.”
“아니, 뭐······.”
한 발 늦게 양성태의 말대로 함성준 전무의 대항마는 이걸영 상무라는 것을 떠올린 문상훈은 머쩍다는 듯이 슬쩍 눈을 돌렸다.
“회장님께서는 문상훈 차장님이 이걸영 상무님의 오른팔이 되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걸영 상무의 오른팔이라······.”
문상훈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 문상훈에게 러브콜을 보낸 상급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문상훈은 어디와도 손잡지 않았다. 하지만 슬슬 이제는 한계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제는 성과 보다는 정치력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내가 만약 이걸영 상무 파벌은 싫다고 한다면 회장님의 서포트라는 것도 아웃인가?”
“그럴리가요.”
“아니야?”
“예. 서포트는 별도입니다. 이걸영 상무님의 오른팔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입니다.”
“그, 그래?”
“네. 물론 문상훈 차장님께서는 어차피 이걸영 상무님의 손을 잡으시겠지만요.”
은근슬쩍 이걸영의 오른팔이 되는 것을 손을 잡는 것으로 돌려 표현했다.
조회장의 뜻을 따르지 않아도 서포트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로 안심시키고는 은근슬쩍 화제의 무게감을 바꾼다.
실로 양성태 다운 한수였다. 그리고 문상훈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해보십시오. 함성준 전무님의 파벌이 요즘 어떤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까?”
“전무 군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네. 정말로 유치한 별명이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매우 적합하지요.”
솔직히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던 문상훈은 찔끔 당황했다.
“닥치는 대로 힘있는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문상훈 차장님이 가담해봤자, 티도 나지 않겠지요.”
“그렇겠지?”
임원들도 즐비한 함선준 전무의 파벌에 가담해봤자, 티도 나지 않는다. 문상훈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이걸영 상무님의 파벌은 아직 여러모로 그 기반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거기라고 임원급 인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차장급인 내가 오른팔? 이건 이걸영 상무님을 너무 띄엄 띄엄 보는 것 아니야?”
“이걸영 상무님의 오른팔은 차장급으로는 무리지요.”
“그걸 아는 사람이······. 아!”
문상훈은 한발 늦게 이야기의 핵심을 깨달았다.
“정리하자면, 조회장님은 함성준 전무 파벌에 대항마로 이걸영 상무 파벌이 성장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나를 키우고자 하신다?”
“정답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해가 안되네? 그러면서도 선택은 내 몫이라며? 내가 이러다 막판에 함성준 전무에게 붙으면?”
“훗.”
“웃어?”
양성태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문상훈은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어이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어이가 없어?”
“예. 그렇지요. 지금 본인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짚어 보시면 알게 되실 것 같은데요?”
이건 도발이다. 분명 도발이다.
이 자식은 이런식으로 해실해실 웃으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일에 특화된 놈이다.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옛날의 최기환처럼 한판 붙어보자고 덤비는 녀석들이 훨씬 낫다. 아니, 나은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최기환과는 부쩍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았던가?
문상훈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성태의 말대로 자신이 뱉은 말을 복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군. 회장님 지원까지 받아놓고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회사 나가겠다는 소리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더없이 이상적인 거래가 아닐까요?”
“그래도 뭔가 찜찜한데?”
이런 것은 뭐랄까? 약간 편법처럼 느껴진다. 애초에 양성태를 두고 낙하산이라며 이를 갈던 문상훈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 본 양성태는 이번에도 슬며시 미소지으며 그를 납득시켰다.
“이거 공짜 아니니 찜찜해 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공짜가 아니다?”
“예. 말씀드렸다시피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시면 아웃이지요. 게다가 회장님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는 멍에까지 짊어지셔야 하겠지요.”
“애초에 내게 선택권은 있나?”
“없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실 분은 아니지 않으십니까?”
“크큭. 그래. 나 문상훈이가 도망치는 것은 말이 안되지.”
“자신 있으시지요?”
“당연한 것을 뭘 묻나?”
-짝!
양성태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과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디어 과제가 공개되는 순간!
“과제는 이번 신입사원 연수의 일환으로 그들과 팀을 이루어 모바일 게임을 하나 만드는 것입니다.”
“신입들과 게임을 만들어?”
“예.”
“그냥 만들기만 하면 되나?”
“물론 그냥은 아니죠. 모바일 스토어 10위권 안에 랭크 되는 게임을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뭐라고?”
스토어 10위라니? 그건 맥베스 정규 프로젝트 중에서도 이따금 실패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신입들을 데리고 게임을 개발하라니?
“아참, 기간은 3개월입니다.”
“3, 3개월······.”
확실한 컨셉이 있고 노련한 개발자들이 달려든다면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신입들과 함께? 라는 페널티에 숨이 막힌다.
“만약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신다면 지금 말씀하십시오. 일단 하겠다고 한 뒤에는 여러모로 수정이 쉽지 않을 겁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조회장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한 뒤에 어찌 못하겠다고 번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애초에······.’
과제라고 내려온 것을 어렵다고 수전을 요구하는 것은 더 우습다.
그것은 문상훈의 스타일이 아니다.
“내가 알아야할 사항은 이게 전부인가? 다른 지원이나, 혹은 주의사항 같은 것은 없나?”
“······일단 이 건에 한해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최대한 돕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시 받은 일이니까요.”
“그렇군. 자네가 내 러닝메이트이자 매니저라 이거군.”
“런닝메이트, 매니저······. 뭐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양성태는 생각했다.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매니저라는 걸까? 미국에서 자란 사람답게 문상훈의 사고 방식은 때때로 한국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현재 상황에서 양성태 자신의 롤은 분명하다. 문상훈을 도와 과제를 수행하게 하여 조회장이 원하는데로 이걸영 상무의 오른팔로 만들어 내는 것.
“일단 이번에 입사한 신입들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이들로 추려내었습니다.”
양성태는 신입사원들의 입사지원서를 꺼내들었다.
“이런걸 인사과에서 내주던가?”
“당연히 그냥은 내주지 않지요. 하지만 방법이라는 것은 의외로 찾으면 나오기 마련이지요. 아무튼 여기 한명수라는 친구가 코딩 실력이 신입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인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양성태의 말을 들으며 문상훈은 생각했다. 이 짧은 시간에 잘도 이런 것들을 준비했다. 역시 양성태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지.”
“말씀하시죠.”
“내가 메인이겠지? 자네는 그저 조력자고?”
문상훈에게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만약 그저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라면 조회장의 지시라고 할 지라도 순순히 따를 생각은 없었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문상훈 차장님의 과제인걸요. 원하신다면 저는 아예 제외하셔도 무방합니다.”
귀찮으니까.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나을지도? 하고 양성태는 생각했다.
어차피 비서인 양성태로서는 이런 일이야, 어떻게 흘러가든 본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런 양성태의 뜻을 전혀 모르는 문상훈은 대답이 흡족했던 모양인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신입사원들의 이력을 훑기 시작했다.
[외전] 경영자의 청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