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결혼 4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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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지락, 꼼지락.
우리 딸 인아는 낮잠을 잘 때, 손발을 꼼지락 거리를 습관이 있다.
세상에 왜 딸바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인지를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인아가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곧바로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굴복하고는 아이의 발과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우우······.”
순간 깨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화들짝 놀랐지만 다행히 깨지는 않았다.
크으······. 이 짜릿함이라니!
막상 인아가 깨어나면 한바탕 정신 없는 시간이 시작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띵동!
갑자기 벨이 울렸다.
“홍 패밀리 등장!”
포대기를 이용해 캥거루처럼 아기와 함께 홍기도가 밝게 웃었다.
“무슨 일이냐?”
“지난번에 통화로 오늘 놀러 온다고 했었잖아요.”
“아! 그랬었지?”
회사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집에서 육아에만 전념하다 보니 날짜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일단 들어와.”
나는 홍기도와 녀석의 아들인 세인이(이름이 같다는 것이 참 복잡한 기분이다)를 거실로 안내했다.
“마침 인아도 자고 있었군요?”
“응. 방금 잠들었어. 한, 두 시간 뒤에나 깨지 싶은데?”
“세인이도 재우면 되겠네요.”
홍기도는 그렇게 말하면서 포대기를 푸르고 세인이를 인아 옆에 뉘었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네가 아직 짬밥이 부족해서 모르나 본데, 아이들은 그렇게 쉽게······. 어? 잠들었네?”
“우리 세인이는 누가 옆에서 잠들면 바로 골아떨어져요. 키 클 거라는 증거겠죠?”
“뭐, 잘 자면 좋지.”
“자, 세인아 누나 옆에 가서 한숨 자.”
홍기도가 세인이를 내려놓자, 세인이는 아장아장 걸어서 인아 옆에 누웠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무슨 전원스위치를 끈 것도 아니고 눕히자마자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드네?”
“태명을 잠만보라고 지을 걸 그랬나봐요.”
홍기도 아들내미 아니랄까 봐, 세인이도 퍽 특이한 녀석이다. 나중에 어떤 인물로 자랄지가 기대된다.
“그보다 너는 이제 어쩔 거냐?”
인아가 태어난 이후, 나는 육아를 핑계로 냉큼 휴직계를 던지고 집에 틀어박혔다. 거의 연아와 교대로 바톤 터치했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홍기도 이 녀석이 내가 휴직계를 내기 무섭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는 본인도 육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쩐다뇨?”
“아니, 평생 집에서 아이만 볼 것은 아닐 것 아니야.”
“아니죠.”
“그럼?”
“내년쯤에는 카이두 코리아 대표로 취임할 것 같아요.”
“크아······. 네가 대표라니.”
뭔가 근질근질한 것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렇죠? 저도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쉬린칭의 부탁이야?”
“부탁이라기보다는······. 제 나름의 목표도 있죠.”
“뭔데?”
“말했잖아요. 형한테 이기는 거요.”
아, 그 하극상인지 뭔지 하는 그거? 그거 아직도 계속하는 거였냐?
“나를 어떻게 이길 건데? 내가 이대로 영영 회사로 복귀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하하하.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반쯤 진담인데······.
“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가?”
“회사로 복귀는 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하지만 표세인이라는 사람이 게임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걸 믿으라고요? 손이 근질거려서 계속 참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가상현실 게임이라도 나오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카이두에서 요즘 그런거 개발하냐?”
“그건 아니죠.”
나와 홍기도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내 나름은 너와 남궁원이 맥베스를 이끌어가는 그림도 그렸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는 모양이군. 특히 양성태 대표님도 그 그림에 큰 기대를 거셨던 것 같은데, 너 배신자로 직힌거 알지?”
“훗, 언제나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 저의 매력이죠.”
그렇게 우리가 헛소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순간 인아가 몸을 벌렁 뒤집었다.
“아! 깼다.”
나는 서둘러 인아에게 다가갔다.
“잘 잤어?”
“아빠!”
“응?”
“얘 왜 와써?”
인아는 옆에 누워 있는 세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왔냐고? 언제 왔냐는 거지? 조금 전에 왔어.”
“그러쿠나. 근데 왜 자? 놀러 온 거 아니야? 자러 왔어?”
세상 모든 것을 질문화 할 수 있는 질문질문열매 능력자 답게 인아는 일어나자마자 속사포 같은 질문 세례를 던졌다.
“안녕 인아야?”
“아! 안녕하세요.”
홍기도를 발견한 인아는 벌떡 일어나 어설픈 배꼽 인사를 했다. TV에서 본 모양인데, 저 자세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우리 인아는 오늘도 너무 이쁘네.”
“이히히.”
인아는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 꼬며 웃었다.
“아저씨는 우리 집에 왜 와써요?”
“세인이 데려다주려고 왔지?”
“세인이는 왜 데려왔어요?”
“인아랑 놀고 싶대서.”
“놀고 싶은데 왜 자요?”
“너 모르는구나? 자는 것도 노는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녀석은 은근히 아이들을 잘 상대한다. 이제는 학교에 다니는 홍시도 잘 따랐었다.
“인아는 호기심이 많은 것을 보니 나중에 공부 잘하겠네요.”
“저 나이 때는 다들 그렇지 않아?”
“은근히 차이가 있지요. 우리 세인이는 반대로 뭐든 뚱해요. 리액션이 없죠. 대를 넘어서 우리 부모님께 이어받은 충청도의 피를 각성했나봐요.”
“쉬린칭 어릴 때는 안 저랬대?”
“네. 엄청 깨발랄했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나도 연아도 어릴 때 딱히 질문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자식이 꼭 부모를 닮는 것은 아니지.”
“그래도 얼굴은 두 사람 쏙 뺏잖아요. 우리 세인이가 저희를 좀 안 닮았지.”
“세인이도 더 자라면 태가 나겠지.”
지금은 너무 퉁실퉁실해서 이목구비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거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인아는 정말로 나와 연아를 쏙 뺐다.
눈매는 나를 닮았고 코와 입은 연아를 닮았다.
팔불출이라 욕먹어도 어쩔 수 없지만, 솔직히 우리 인아는 이미 미래에 미녀가 될 가능성이 100%인 셈이다.
“아! 일어났다.”
“······.”
인아 목소리에 잠이 깬 것인지 세인이도 금방 일어났다. 다소 멍한 표정으로 인아를 멀뚱히 바라본다.
“너 왜 왔어? 놀러 왔어?”
인아의 질문에 세인이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나 장난감 상자 꺼내주세요.”
“응. 잠깐만.”
나는 폼블럭 위에 장난감 상자를 올려두었다. 그러자 인아는 장난감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경찰서 만들자.”
이번에도 세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아를 도와 블록 장난감을 손에 쥐었다.
“인아는 말문이 트이고부터는 쉴새 없이 떠드는데, 세인이는 참 조용하네?”
“네. 놔두면 하루에 한마디도 안할때도 있어요.”
“그래? 말은 그래도 곧장하지?”
“저 좋아하는 만화영화 볼 때는 대사를 그대로 줄줄 외워요.”
“과묵한 사나이구나.”
뭔가 귀엽다는 느낌이 들어서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커피라도 마실래?”
“커피 말고 주스 있나요?”
“오케이.”
“아빠! 나도!”
인아가 손을 번쩍 들자, 세인이도 덩달아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냈다. 그렇게 주스를 마시며 느긋하게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둘이 참 잘어울리죠?”
“······단어가 좀 이상한데? 애기들이야 원래 잘 어울려서 놀지.”
“에이, 그 뜻이 아니라 나중에 둘이······.”
“잠깐! 거기까지. 우리 인아를 넘보다니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단순한 희망사항이죠. 지금은······.”
“지금은?”
“흐흐흐. 이렇게 어릴 때부터 붙어 지내다 보면······.”
“남매처럼 여겨져서 연애 상대로는 인식 않겠지.”
“어? 그럼 안 되는데?”
홍기도는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돼. 아주 잘돼. 그렇게 될 거야.”
“인아야!”
“네!”
“나중에 커서 우리 세인이랑 결혼할거지?”
“아니요!”
“어?”
“그렇지! 역시 우리딸!”
“나는 아빠랑 결혼할 거예요.”
“니네 아빠 결혼했잖아. 너희 엄마랑.”
홍기도의 말에 인아는 잠깐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빠.”
“응.”
“왜 나 빼고 둘만 결혼했어?”
“그러게 내가 잘 못했네.”
“그러지 말고 우리 세인이랑 결혼하는 거야. 아저씨가 선물 많이 줄게.”
“선물이요? 나 말 갖고 싶은데?”
“내가 목장 사줄게!”
와, 이 미친 녀석······. 어린애를 뇌물로 꼬득이려 하다니······.
아니지, 사실 나도 인아에게 항상 선물로 유혹하고 있기는 하지.
“나는 까만 말이 좋아.”
“특이하네? 애들은 보통 흰말을 좋아하지 않나?”
“지난번에 TV 만화영화에서 주인공이 검은 말을 타더라고.”
“아아.”
“너는 무슨 말이 좋아?”
“나는 용!”
드물게 세인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용 어디서 파는 줄 알아?”
인아의 질문에 세인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늘에서 팔지!”
인아의 말에 세인이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너희 아빠한테 용 사달라고 해.”
“집에 있어.”
아무래도 용 모형의 장난감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인아 약속한거다? 아저씨가 말 사주면 우리 세인이랑 결혼하는 거야?”
“네!”
하, 이거······.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말도 못 하겠다. 홍기도는 인아의 힘찬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를 보며 그것보세요. 라는 의미가 담긴 묘한 눈빛을 보냈다.
“그럼 어디 한 번 찾아 볼까?”
“뭘 찾아?”
“살만한 목장이요.”
“뭐?”
예전부터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정말로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다.
“인아야. 이거 봐봐.”
“와! 말이다!”
인아는 홍기도의 스마트폰 속의 목장 사진을 보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떤게 마음에 드니? 이거? 이거? 우리 인아는 리액션이 좋아서 선물을 고르는 보람이 있네.”
“세인이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되는 거냐?”
“세인이도 나중에는 리액션이 좋아지겠죠. 누구 아들인데요.”
네 아들이니······. 확실히 그런 쪽(?)으로 성장할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뭐가 좋아?”
“다 조아요!”
“다 좋아?”
“네!”
“그럼 다 사줄까?”
“와아!”
홍기도의 정신나간 배포에 인아는 기쁨의 덩실덩실 댄스를 시전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세인이도 두 팔을 파닥거라며 자신의 흥을 표현했다.
“인아는 춤도 잘 추네요. 여자애라 성장이 빠른가?”
“애초에 나이 차이도 있잖아. 이 나이때 한 살 차이 무시 못하지.”
“하긴 그렇겠네요. 세인아. 너도 어서 커서 인아에게 춤을 배우렴.”
“내가 가르쳐주께!”
인아는 세인이의 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뭔가 훈훈하죠?”
“그래. 그런데 너 진짜로 목장 살 거 아니지? 아무리 장난이라도 도가 지나치면 곤란하다.”
갑자기 이 녀석이 목장 땅문서라도 들고 들이닥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에이 제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사회생활까지 한 녀석인데,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겠지.
“목장은 그냥 놀러 가면 될 일이니. 말이나 몇 마리 사주면 되겠죠?”
“적당히 해라······.”
“후후후.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미리 연습해 보세요. 사돈이라고 불러보시죠.”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아들 이름을 나랑 똑같이 짓냐?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뭐 제 일 아니니까요.”
아들 앞에서 때릴 수도 없고······.
[외전] 홍세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