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도시로 가는 길(2)
“관련은 있습니다.”
신분체계라는 것은 강력한 효력이 있다. 대부분 귀족은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밝히곤 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누구의 아들인지 어떤 가문에 속해있는지 얘기만 해도 평민은 예의를 갖춰야 했다.
그게 몰락해가는 귀족이라고 해도 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의무도 따라오길 마련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면 가문과 관련된 것이다.
희생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그걸 따라야 한다. 이것이 명예라는 것이었다. 실상은 주먹구구식이지만. 권리만 취하고 의무는 내팽개치는 귀족이 대부분이다.
다만 니벨룽 가의 막내라는 것을 표하지 않은 것은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시온은 현대인이기 때문일 거였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여러 가지를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신분을 숨기고 그냥 지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관련이 있다고 하면 정보 정도는 교환할 수 있고 혹여나 나쁜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귀족 가문의 보복 원칙에 따라 낯선 자에게 안전할 수 있었다.
“늑대 숲은 어떻소?”
“별일 없습니다. 가도는요?”
그가 고개를 절래 저었다.
“이쪽은 평소 같진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윗분들께서 마찰이 있어서요. 검문이 있을 겁니다.”
나름 좋은 정보였다. 늑대 숲은 니벨룽 가문의 근방에 있는 숲을 말하는 거였고, 가도는 페레시와 연결되어있는 길이다. 그것의 상태를 물은 거였다.
“도적은 없겠네요.”
그가 껄껄 웃었다. 도적, 마적, 갖가지 불순한 무리가 도로에 출몰하곤 했다. 하기야 왕국 군이 내려와 있는데 말썽을 부리는 바보는 없을 거였다. 보통은 잽싸게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도적질을 할 것이었다.
고로 시온은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몇 가지 지리를 빠르게 물었다. 별 내용은 없었다. 뒤쪽의 길은 쭉 뻗어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행상에는 상단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타고 있었다. 아마도 견습을 하는 것일 거였다. 호기심 넘치는 눈이었지만 귀족 자제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으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저 이곳에서 전서를 옮기는 심부름꾼 정도로 보였을 거다.
사람이 멀어지고 시온은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여자든 남자든 이곳에서는 직업의 자유라는 것은 쉬운 편이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상인이라면 상계를 배우고 아버지가 대장장이라면 쇠 치는 법을 배운다.
시집가기 전의 여자들도 아버지 일을 도와줄 수 있는 것부터 배운다. 방금 사라진 여자애도 조금씩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물건 파는 법을 배우는 거일 거다.
호객도 할 것이고, 장부도 쓰고, 특산물을 사는 법이나 재고를 정리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나이가 찬다면 좀 더 아버지의 일을 거들게 되나 일반적으론 길드 교육장을 다니다가 조금이라도 업계에서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
비단 귀족만 정략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날씨는 아주 맑았다. 이제 거친 길을 벗어나 제대로 된 길에 들어갈 수 있었다. 페레시에서 정비한 가도는 기술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방금 교환한 정보에 의하자면 가도는 왕국 군이 주둔 중일 것이었다.
황제, 왕, 그리고 대마법사, 언제나 치열하게 패권을 다퉜다. 보통은 자유로운 대마법사의 영지를 둘러싼 황제나 왕의 시비였다. 더 자세한 얘기는 내려가서 들어봐야겠지만, 왕의 군이 주둔해 있다는 건 뻔한 얘기였다.
그리고 이 얘기는 시온과도 관련이 있었다. 시온의 니벨룽 가문은 왕가에 속해있는 말단 봉신 가문이었으니까. 심문은 까다로울 것 같긴 했지만 별다른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온이 우려하고 있던 점은 도적을 만날 수도 있다는 일이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페레 시가 용병업이 활발한 이유는 다름 아닌 갖가지 이유로 발생하곤 하는 도적들 때문이었다.
이유도 가지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페레시와 얽힌 상단은 돈이 되기 때문일 거였다.
페레시는 중간 정도의 도시인데도 이렇다. 마도령으로 유명한 대도시 에스테에 가면 부유한 만큼 그 부를 노리는 단체도 정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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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잡았던 토끼를 꺼내고 가죽에 칼집을 냈다. 벌건 살이 모습을 보였다. 칼을 댔으니 빠르게 부패할 거였다. 어차피 오늘 저녁에 다 먹을 생각이었다.
거꾸로 매달아 피를 마저 뺐다. 불을 붙여야 했다. 원래라면 간단한 도구를 이용했어야 했으나 시온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법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마법이라는 것을 익히려면 까다로운 훈련이 필요한 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흔했고 나중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은 만큼 딱히 정해진 건 없다.
다만 대부분의 수련 마법사란 딱지를 달기 위해선, 마나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 공통점일 거였다. 그러기에 실제 마법사에게 개인 과외를 받는 게 매우 유리했다.
그래서 왕가 정도면 대부분 간단한 마법은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었다. 마나를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이론적으로는 기초 마법은 죄다 배웠다.
물론 시온이 받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높은 가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익히기 편한 기사계 기수 가문이라 가장 아는 것이 많은 가문 어르신도 기초적인 것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시온의 스승은 장서에서 부서져 가던 오래된 책자였다. 대략 선대의 선대의 선대가 남긴 책으로 소유자는 발뭉 니벨룽이었다. 일지를 보자면 아마도 마법을 어지간히 배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거금을 들여 마법서를 사다가 읽으며 노력한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간단히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누구도 개인 과외를 받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법서라는 것은 아무래도 일상 문자와는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본 소양에는 이 문자를 읽을 줄 아는 게 필수였다.
문자를 안다고 해서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면 말짱 헛수고이지만.
하지만 여기서 현대인이라는 것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마법서의 빼곡히 채워져 있는 문자는 다름 아닌 한글이었다.
정확히 똑같은 건 아니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불을 피우기 위해 모아둔 짚에서 어렴풋이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몇 번 크게 되 불었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장작더미에 올렸다.
마나를 느끼는 것뿐만이 아니라 불길 정도는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괜히 형들의 질투를 받을 수도 있었다.
미리 점찍어뒀던 나뭇가지로 털이 벗겨진 토끼를 꿰고 세워둔 나뭇가지 두 개 사이에 걸쳤다.
최대한 연기로 익히게 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하면 탄 부분을 줄이고 맛있게 익혀 먹을 수 있었다. 이곳의 토끼는 몸집이 커서 삼 인분까지 나올 수준이었다.
대략 삼십 분에서 사십 분 정도 있으면 잘 구워질 거였다. 오늘 불은 조금 더 세게 피울 생각이었다. 어제따라 붙은 동물이 오늘도 주위를 배회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여기가 가도의 시작이니 완전히 들어서게 되면 그것도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짐승,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을 경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