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도시로 가는 길(3)
나름 누군가 도착해서 불을 나눠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역시 식량과 동전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과 일이 있는데 두 개가 없으면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쥐와 같은 설치류가 빼먹지 못하게 단단히 여미어놨다. 덫을 확인해보니 오늘은 쉽게 식량이 생기지 않을 건가 보다.
하지만 이럴 줄 알고 차선의 계획을 세워놨다. 페레시와 이어지는 가도를 따라 흐르는 작은 시내는 물고기가 풍부한 편이었다.
어제 설치해 놓은 돌덩이 둑을 따라서 물고기가 고여 있었다. 유속이 있는 곳에 넓게 입구를 잡고 나갈 길을 막으면 그곳에 모이기 마련이었다.
바로 칼집을 빼서 하나씩 내려쳤다. 누가 보면 경악할 일이었다. 이곳에선 검을 가지고 이렇게 함부로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귀족은 이런 게 더 심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랬지만 알게 뭔가, 이게 쓰기가 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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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 시로 가는 가도가 정평이 나 있는 이유는 역시나 가도를 이루고 있는 마름돌 때문이었다. 꼼꼼하게 박혀있는 이 길의 용도는 당연히 물자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물자라고 한다면 제일 꼽히는 건 역시 소금이었다. 페레 시와 연결된 대도시 에스테는 소금과 향신료의 무역으로 유명한 편이었다. 에스테와 수도로 연결된 길은 아예 소금 관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나저나 시온은 발피르 산맥의 아래로 내려온 것 같았다. 갈림길이 세 개 있었고, 이제야 사람의 꽁무니가 보였다. 그렇다고 반가워할 일은 아니었다.
도시로 내려갈수록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현대나 이곳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온은 반지 세 개가 교차해 있는 가문의 문장이 잘 보이게 옷을 정비했다.
오히려 이럴 때는 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안전한 법이었다. 귀족이라는 것 때문에 사기꾼이 꼬일지언정 함부로 시비를 터는 인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제국법에 따라 시온에게 고소를 당했다가는 벌금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법이나 재판관이나 모두 귀족 출신인 것은 당연했다.
다만 그건 말단 귀족과 그 위의 귀족과의 규칙도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즉, 사람을 잘 가려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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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군이 가도를 장악하고 있다더니 시온은 저 끝에 갑옷을 입은 병사가 즐비한 곳을 발견했다. 긴 줄이 있었고, 그 앞을 검문하고 있었다. 저것이 그 남자와 교환했던 정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높이 나부끼는 중인 가문 문장을 봐야 하는 것이었다. 그 사내가 왕국 군이라고 했지만 그게 정말로 왕국 군인지 아니면 제국의 라인인지, 그도 아니면 마법사 가문인지를 봐야 정확한 대처가 가능한 법이었다.
선홍색의 사자가 햇빛을 받으며 흩날리고 있었다. 왕국 군이라던 그 사내의 말은 정확했다. 이러면 부담이 조금 적어진다.
왕국 기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만 페레 시 안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이러는 거라면 뻔한 일이었다.
적어도 페레 시에서 승인을 받지 못한 애매한 경우라는 것이다. 즉 권력 압박이라고 봐야 했다. 누가 옳은지는 모른다.
어쩌면 둘 다 문제일지도 모른다. 싸움은 그들이 피해는 아랫사람이 지는 법이었다.
“시간 낭비로군. 망할 놈들.”
“왕의 깃발의 앞이다, 거기 입을 조심해라.”
“나는 당장 이 물건을 팔아야 한단 말이오. 나으리. 전투가 난 것도 아닌데 이런 수색이 다 무슨 소용이오?”
“국가 교란죄를 진 몽포르 백작이 에스테 시에 망명을 신청했다. 왕은 몽포르의 목을 원하신다.”
시온의 강경한 둘의 대화를 듣고는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죄를 짓고 있는 몽포르가 잡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공령인 에스테 시에 망명을 신청했으니 아마 근방의 도로를 죄다 막아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마탑은 그 망명을 받아들인 것이고. 그러니 밖에서 이런 식으로 포위망을 짜놓은 거였다.
현대와 다를 정도로 무섭게 힘의 논리가 철저히 돌아가는 곳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곳에 몽포르가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저기서 팔짱을 끼고 있는 기사가 이곳의 도륙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게 그의 권한인 것이다.
‘흠.’
보아하니 쉽사리 길을 내줄 생각이 아닌 듯했다.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확인하는 속도가 무슨 굼벵이 같았다. 여자라고 해도 가차 없이 가슴을 만져서 확실히 여자인지 확인을 했다.
엉덩이도 만지는 것이 잔뜩 사심을 채우는 중인 것이 눈에 보인다. 어쨌든 시온은 오늘은 도시에서 잠을 자고 싶었기에 지금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이런 일이 있을까 해서 미리 신분증서를 받아놨다. 가문에 속해있다고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확인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시온은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앞을 가로질렀다. 사람이 쳐다보고 수군거렸다. 가문의 문장을 확인한 것이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병사의 소리가 먼저 도달했다.
“멈춰라.”
“검을 내려놔라. 병사.”
시온이 바로 반답을 했다.
병사 여러 명의 눈짓이 이어진다. 가문 문장을 봤으니 귀족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대할 수 있는 깡을 가지고 있는 건 귀족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시온이 노린 바였다.
“망명자를 찾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반말이었던 병사가 존대로 시온에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의 할 일을 하고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드디어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갑옷이 햇빛을 반사했다. 투구 안에 눈이 문장을 확인하고는 곧 그가 투구를 벗었다.
긴 금발의 기사는 이제 서른 초반으로 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강자다. 극한으로 훈련했고, 전투도 겪었을 터였다. 살인은 기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신분을 밝힌 귀족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말석의 귀족이라고 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기사 서임을 받았다 해도 영지가 없으면 귀족보다 아래의 신분이었다.
“신분을 증명하실 수 있소?”
“있다.”
그가 코를 찡긋하더니 고개를 까닥했다.
“이쪽으로.”
그를 따라서 간 곳은 작은 나무토막 아래였다. 마차가 하나 서 있었는데 기사가 소리를 치자, 누군가 한 명이 나왔다. 곰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벤느 가문의 가신이 분명했다.
늙은 남자가 바로 나를 보고는 알아봤다.
“아, 니벨룽 가문이시군요. 실례지만,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금발의 기사가 나에게 건네받은 증서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슬쩍 보더니 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증서를 보아하니 다섯째시군요.”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을 뵈러 가고 있소.”
“그러십시오. 한 가지 당부드릴 말이 있습니다. 꼭 가문의 명예와 아벤느 가의 봉신의 의무를 걸고 답해주셔야 합니다.”
시온이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몽포르 백작과 연관이 없으셔야 합니다. 그를 숨겨주셔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죄를 지으시는 겁니다.”
“전사의 가호가 있으니 나 시온 니벨룽은 맹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늙은 사내는 만족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교육을 아주 잘 받으셨군요. 니벨룽 가라. 저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답니다. 아름다운 영지지요.”
일이 잘 풀린 듯해서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 막상 하려니 뭐 발표하는 거 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긴장이 됐다.
귀족의 가문 연관 인이 신분을 증명했으니 이제 일은 일사천리였다. 병사가 길을 텄으니 이제 다시 갈 길을 가면 됐다.
그나저나 아까 핏대를 올리던 젊은 남자와 기사가 결국 충돌을 한 모양이었다. 대강의 상황이 이제 그려진다. 기사는 팔 물건을 죄다 박살을 내고 방해죄를 씌워 사내를 흠씬 두들겨 팰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정리가 되고 나면 무서워서 아무도 반기를 들지를 못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온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귀족이지만 현대인인 그는 귀족처럼 오만하게 보이려고 연기를 했지만, 실상은 빈털터리였다. 빨리 도시에 가서 짐을 풀어야 했다. 계획이 아주 빠듯했다.
빠져나온 건 시온이 유일했다. 그러겠지. 이 넓은 가도를 혼자 걷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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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 시의 앞에도 병사가 가득했다. 앞에서 저렇게 왕국 군이 설쳐대는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직무를 하고 있지 않은 거였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왕국 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살갑게 맞고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몽포르가 반란이라도 한 거요?”
“그건 아닙니다.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스럽군요. 정치의 복잡함이라는 것이 이렇지요. 하하하.”
자유 도시 답게 병사의 복장도 검문 관도 조금 숨통이 트이게 되어 있었다. 살이 찌고 피둥피둥한 그는 넉살스럽게 시온에게 답했다.
그의 질답이 끝이 나고 드디어 페레 시에 들어왔다. 곧바로 붐비는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호객하는 소리도, 거리를 다니는 용병들, 상인들, 말들이 짐을 나르고 도시 특유의 냄새도 한가득하다. 시온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