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 (1)
차석에게 주어진 상품은 반지였다. 수석은 지팡이를 가져갔고, 말석은 로브를 챙겼다. 세 개의 물건은 다 값어치가 있었지만, 지팡이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개는 하자가 있었다.
“예상대로인가.”
시온이 받은 녹색 반지는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켜주지만 그만큼 마나를 소비시켰다. 그나마 시온은 첫 번째 고리를 달성해서 망정이지 고리조차 달성하지 못한 수련 마법사라면 반지는 그저 계륵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페라라 가문에서는 도팽 가의 여식이 일 등을 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지.”
중상급 물건이면서 고리를 완성한 수련 마법사에게 가장 적절한 지팡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가져갔다. 팔이 안으로 굽고 끼리끼리 논다는 것은 이것을 뜻할 거였다.
중세는 현대보다도 자기들끼리 친목을 다지면서 철저히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많았다. 대가문이 몇백 년 동안 별일 없이 그 지위를 누리는 것은 이렇게 작은 것이라도 자기들끼리 독점하고 선물하듯이 공유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도팽 가의 여식을 떠올리니 시온은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흠, 나도 모르게 실수를.”
유년기부터 준비했던 것을 생각해보자면 벌써 몇 년이나 준비했다. 어떻게 보면 사냥꾼이나 격투기, 각종 수렵 기술에 매진했던 것도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용병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용병도 나쁘진 않아. 용병 단체를 끄는 것도 영지를 가지는 것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일이지.”
용병 단체라는 것도 성공할 수만 있다면 대단한 위세가 있었다. 영지를 소유하는 것보다야 급이 떨어지는 것은 맞았지만 잘 훈련된 용병 단체는 움직이는 돈 덩어리였다.
지금 시온이 머무르기로 마음을 먹은 황금 도끼단도 꽤 유명한 용병 단체 중 하나였다.
ㆍㆍㆍ
시온이 마법사로 이름을 등재 하기 위해 등재소에 찾았다. 그곳엔 이번 수련 마법사 시험에 합격한 합격생들로 가득했다. 절차 자체는 간단했다. 증명할 수 있는 신분이 있다면 증명하면 됐고 그저 등재만 하면 됐다.
등재되면 마법사의 탑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제 마법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원한다면 해당 마법사급에 맞는 교육을 신청할 수도 있었고 각종 정보를 열람하는 것도 가능했다.
“저 녀석 맞지?”
“루시 도팽을 들어 올렸잖아.”
“도팽가가 수석이고 저 사람이 차석이라는데.”
“저렇게 보여도 귀족 가문이야. 니벨룽이라는 성이 있더라고 내가 확실히 읽었어.”
“역시 끼리끼리 노는 건가.”
시온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화두가 되고 있었다. 시온 역시 듣기는 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입방아에 오르게 되는 것은 시온의 실수인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시온의 몸에서 이제 유일하게 빛이 나는 물건이 생겼다. 바로 녹색 반지였다. 마나를 증폭시켜주고 많이 소모해버리는 반지. 상품으로 걸어둔 만큼 외관은 깔끔했다.
줄이 줄어들고 곧 시온의 차례가 됐다. 시온은 남자 앞에 섰다.
“오, 자네가? 몰라볼 수가 없구먼. 체격이 좋다더니 내 생전 자네 같은 체격에 마법사를 하겠다는 자는 처음 보네.”
“감사합니다.”
“여기에 이름을 적고 서명을 하게 이 서명은 마법사의 탑으로 가게 될 거야. 즉, 자네가 진짜로 마법사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일세, 지혜의 등불을 켤 각오는 되어 있나?”
각오라. 의례 묻는 말일 것이었다. 마법사라는 자격만 달고 있어도 용병 일을 구할 때도 쉽고 수습 단계는 그냥 건너뛸 뿐만 아니라, 행정 지식을 쌓으면 하급 관리에 지원할 수 있고, 각종 전문 직업에 혜택이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가 서류를 가져감과 동시에 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마법사 폐를 줬다. 마법사 패에는 보안 마법이 걸려 있어 해당자의 마나를 각인시켜야 했다.
마나가 없다면 그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마나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온은 수련 마법사 패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시온 니벨룽 이라는 음각이 되어있는 패가 푸르스름하게 빛이 돌았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LED처럼 보였다. 그런 것일 리가 없겠지만, 시온은 그것을 감상했다.
시온이 마법사 패를 품에 집어넣고 나오고 있는데 익숙한 남자가 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살짝 들어 시온에게 인사를 했다.
“축하한다.”
둘째 형인 기드 니벨룽이었다. 니벨룽 가문의 차남이었고 현재 가문 상단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도시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시온에게 금화를 지원해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고마워.”
시온은 사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이곳에서 시온 니벨룽이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시온은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형제라고 해도 진짜 형제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시온의 경험상 귀족의 가족관계는 철저히 이해관계로 가득 차 있었다. 타인보다 나은 것은 그나마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이 있다는 정도일 거였다.
“음, 처음엔 얘기를 들었고 나중엔 직접 봤다.”
“있었다고?”
의외였다.
“음, 네가 마법에 재능이 있는 줄은 정말로 몰랐다.”
“.........”
“알았더라면 너에게 굉장한 투자를 했을 거야.”
기드가 진지하게 말했다. 여기서 투자를 한다는 말은 시험에 집중할 수 있게 거처를 잡아주고 생활할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해준다는 거였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장비까지 지원해 준다는 얘기일 것이었다.
장비가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니 그만큼 기드에게 빚지는 것이 될 것이었고 합격 후의 행보고 기드가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투자를 한다는 것일 테니까.
“그렇게 금화가 많았어? 저번에 사람이 굶을 때 하나도 없다고 했잖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지.”
기드가 헛기침을 했다. 역시 둘째 형은 그때 금화를 숨기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예상이 맞았다.
이어서 기드가 말했다.
“이 투자는 아직도 유효해. 마법사 면허가 나왔다고 해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직 대단치 않지. 장비가 없으니까. 나라면 그 장비를 맞출 수 있을 만한 자금을 내줄 수 있다.”
기드는 시온을 유의 깊게 살펴봤다. 아닌 척을 하고 있지만, 그 정도로 지금 시온에게서 투자를 받겠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는 시험관들에게 시온에 대한 평가를 훔쳐 들었다.
‘수재, 적어도 해석에는 천재라지.’
그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막내동생은 그가 알기에 온종일 사냥해대고 돌아와서는 희한한 체력 훈련을 해대고, 마법사와 관련될 만한 행동을 하던 건 저녁에 가문의 장서에 박혀 있던 일 그 정도밖에는 없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기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온이 해석 시험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고 했을 때 약간의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내 대답은 같아. 장비가 급한 건 맞지만, 투자를 받아야 할 정도로 절실한 건 아니야.”
시온은 반쯤 거짓말이 섞인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장비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전혀 아니었다. 시온은 온종일 구해야 할 장비와 금화를 벌 수 있을 만한 좋은 방법에 대해서 골몰할 정도였다.
다만 기드가 요구하는 것이 앞으로의 자유에 방해될 것 같았다.
‘이왕에 투자를 받고 고용될 거면 큰 곳이 좋지. 우리 가문이 아니라.’
게다가 기드가 대체 무엇을 보고 거금을 들여 투자하겠다는 건지 약간의 감이 왔다. 가문 내에서의 서열 경쟁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기드가 마법사 장비를 대준다고 말할 정도라면 금화를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왜 그렇게 많은 금화를 계속해서 몰래 모으고 있는지는 뻔했다. 시온도 금화가 필요하지만, 그것의 목적에 대해서 시온의 이유는 의외로 심플했다.
마법사의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더 좋은 마나를 쌓으려는 방편의 금화였다.
반면에 기드의 금화는 니벨룽 가문의 계승자와 대립하기 위한 자금일 것이었다. 시온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오지의 가문이라 해도 가문은 가문이고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의 혈통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저리 치열하게 행동하는 것일 거였다. 거기에 시온이 가담하게 되는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싫다고?”
뭐라고 둘러댈지 잠시 생각해 보던 시온이 말했다.
“당분간 자유롭게 지내보려고.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형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게.”
“그래? 생각이 필요하다는 거구나. 그럼 됐다. 그렇다는 것은 가문에 돌아오겠다는 얘기는 아니지? 아버지께서 관심이 많으시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끌고 오라고 하더라.”
“내가 합격했다는 소식 전했어?”
“반은 했지. 내가 완전히 전했으면 난리가 나겠지.”
가문 구성원이 마법사가 됐는데 당연히 가문을 위해 활용하고 싶을 거였다. 니벨룽 가문에선 마법사 자체가 배출된 적이 없으니 초유의 사태이기도 했고.
“그래? 그러면 그냥 봐주겠다는 뜻이 맞지?”
물론 둘째 형이 아무리 끌고 가려고 한다고 해도 말뿐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시온은 힘으로 간단하게 뿌리칠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형이 사람을 쓸 거면 마법을 외울 것도 없이 주먹 찜질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네 편이라는 것만 알아둬. 아니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어. 알았어? 지금까지 아버지가 너나 나나 신경 쓴 적이 있었냐? 맨날 장남 타령이지.”
그랬다. 그러나 비단 니벨룽 가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세에서 예외적인 계승은 존재하지만 언제나 가문을 이어받는 것은 장남이었다.
그것이 이곳의 규칙이었다. 그러니 가문의 여력이 있든지 없든지 장남이 모든 투자와 관심을 받게 된다.
다른 자식은 흔히 찬밥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둘째 형과의 모종의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고 시온은 그렇게 그 자리에서 벗어 나왔다. 당장 가야 할 곳이 있었다.
ㆍㆍㆍ
이곳을 다시 찾을 때는 마법사 면허를 반드시 가져와야 했다. 대장서의 삼 층부터는 수련 마법사부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도서관의 관리인은 시온을 금세 알아봤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시온이 온갖 방법을 다 쓴 터라 약간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극도로 단련한 육체는 그냥 노려보기만 해도 위협적으로 보이는 게 현실이었다.
물론 시온은 안타까워서 바라본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런데 안 된다니까요. 귀족이셔도 안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자격이 있어야 해요.”
“여기 있다.”
시온이 방금 받은 마법사 패를 보여주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네가 말했던 자격이지. 얼마 전에 있던 시험에 합격해서 이제 나도 마법사다.”
“시온 니벨룽···. 맞네요.”
그가 슬금슬금 시온과 명패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굉장한 재능이 있으시군요. 그리고 학구열도 굉장하시고요.”
학구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시온이 이곳에 온 것은 푸른 액체의 정체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물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정체만 알게 된다고 해도 앞으로 이 수수께끼 물건을 더더욱 활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