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 (3)
조금씩 겨루기의 틀을 봐주고 사례금을 챙긴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시온이 현대의 기술에 목을 맨 것도 아니었고 그 수준이 아찔할 정도로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본만 하는 수준. 거기에 단련된 힘으로 찍어 누르는 수준밖에는 되질 않았다. 사실 가르칠 거라곤 자세 교정 몇 개 해주는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릭은 배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지만. 에릭이 이렇게 시온에게 매달리는 이유도 있었다. 시온은 이제 마법사의 길을 걷게 되지만 에릭은 기사의 길을 걸어야 했다.
기사라고 그냥 모두 같은 기사는 아니었다. 기사 역시 종자, 베테랑 종자, 수습 기사, 대리 기사 평 기사, 상임 기사 가야 할 길이 많았다.
위로 갈수록 기사 역시 입증해야 하는 조건이 많았다. 전장을 몇 번 돌파해야 하는지, 목을 몇 개를 베어냈는지. 일기토에서 이긴 적이 있는지. 어떤 영주에게 서임을 받아야 하는지. 어떤 유명한 대회에 입상했는지.
기사가 가지는 대회에서 가장 쳐주는 것은 왕국 급의 마상창대회이지만 레슬링이나 중세 격투기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것들도 인지도가 좋았다. 기사라는 것이 꼭 사람을 죽여야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 귀족이나 몸값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인물을 포획하기 위해서 제압할 수 있는 기술도 중요시되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시온 경. 제가 너무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시온 경과 저는 장차 사돈이 될 사이이니······.”
사례금을 금화 백 개를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백 개면 장비 하나를 구할 수 있는 마당이었다. 다만 시온이 고민하는 것을 에릭이 오해한 상황이었다.
에릭이 오해할 만도 했다. 어쨌든 시온의 현대적인 격투기가 아무리 기본적인 것이라 해도 그 특수함은 누가 봐도 가문의 비전 기술로 보였을 것이었다.
니벨룽 가문이 유명하지 않다는 점도 한몫했다. 기수 가문이고 기사를 대대로 배출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명성을 크게 얻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당장엔 구해야 하는 게 있으니까. 일단은 가르쳐 볼까.’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봅시다. 에릭 경.”
시온이 입을 떼자 에릭이 환한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가문 비전 기술을 알려주시겠다니, 제 여동생의 자태가 어디 빠진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비전 기술 정도는 아닙니다. 가문 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저와 선조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러시다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선조인 발뭉 니벨룽이 남겨 놓은 고안을 제가 나름의 방법으로 개선한 것이라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에릭은 그 말을 듣고 시온이 범상치 않은 인간이 맞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지금 시온이 하는 얘기는 대부분 기술을 혼자서 만들어냈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ㆍㆍㆍ
황금 도끼단도 도시의 중심부쯤에 있지만, 제국 용병 관리소는 더욱 중심에 있었다. 그 정도로 각 도시의 허브 역할을 하는 중요한 건물이었다.
도시와 연관이 있는 하급 용병이나 중상급용병이 모두 이곳을 자주 들러야 했다. 유명한 용병 단체는 각기 패를 발급하지만 가끔은 이해관계가 얽혀 그 이상의 공신력이 있는 패를 요구하기도 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패가 나오는 곳이 바로 제국 용병 관리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와 직결로 연결되어있는 것이 이곳이었다.
일일이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의 장은 황제가 직접 임명을 했다.
“역시 시온 경은 멋을 아는군.”
에릭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기사라고 해서 용병업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세라는 곳은 하나의 타이틀이 정해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에 역대 황제 중에는 용병단체를 만들고 직접 지휘하고 전장에서 섰던 자도 있었다.
황제조차도 이러하니 기사나 마법사도 여러 자격을 같이 얻어두는 건 일상다반사 같은 일이었다.
시온이 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비슷했다.
제국에서 관리하는 건물인 만큼 건물은 오래됐고 거대했다. 안은 각종 용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용병에게 물건을 팔려는 행상인 까지 있는 탓에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특이한 자들도 있었다. 용병 중 사람을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막 사냥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팔과 다리에 쇠사슬을 걸어두고 무언가를 관리자에게 증명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마법사의 역할이 전투, 건설, 의료에서 발명까지 다양한 만큼, 기사들이 건드리지 못할 많은 일을 용병들이 해치우고 있었다.
“호오, 저기 저 녀석 저도 현상금 수배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법 악명이 있는 녀석입니다.”
재미있는 광경이긴 하지만, 지금 시온의 안중엔 그것이 없었다. 시온은 예쁘장한 여자 직원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용병 등록을 하러 왔소만.”
큰 눈의 토끼 같은 생김새의 어린 여자는 시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뒤에 분도 같이 인가요?”
“에릭 경?”
“아, 저는 됐습니다. 저는 이미 있습니다.”
“그렇다는군요.”
여자가 시온의 덩치를 보고는 빙긋 웃었다. 무난히 발급 시험을 치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수련 마법사 면허 시험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고 상시 있는 시험인지라 영지 전이라도 날 거 같으면 일주일마다 시험이 있곤 했다.
지금은 그 정도의 일이 없으니 보름에 한 번은 있었다.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최하급 패는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건 아무리 빈번하게 시험을 치른다 해도 이곳에서 패를 받는 것이 다른 곳보다 가장 어렵다는 점이었다.
“대단한 실전을 겪으셨던 것 같네요. 다른 곳에서 받으신 패는 이곳에서 보여 주시면 돼요.”
여자는 시온을 기사나 그에 따르는 종자, 아니면 다른 곳에서 구르다 온 은급 용병 정도로 봤다.
에릭도 대단한 편이었지만 이곳에서 하급 직원을 하고 있을 만큼 많은 용병을 본 그녀가 봤을 때도 시온의 단련 정도는 흔한 경우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뒤에 있을 시온의 답변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아직 소속된 곳은 없고 첫 등록입니다.”
“그···. 그런가요? 전사 패는 저쪽입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엔 웃통을 제대로 입지 않은 털털한 사람이 살벌한 표정으로 앉아 시온과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람과 치열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시온은 그녀의 말을 정정해줄 필요가 있었다. 시온이 필요한 것은 전사 패가 아니었다.
“마법사 패가 필요합니다.”
“아, 네. 네?”
“마법사 패가 필요하다고요.”
“하지만 마법사 패는 마법사 자격이 있으셔야.”
그녀는 시온이 마법사일 것이라는 결론을 아직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있습니다. 자, 여기요.”
시온이 수련 마법사를 증명하는 것을 보여주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온 니벨룽, 아, 이번에 합격하신 마법사분이시군요!”
시온이 마나를 집어넣자 푸르스름한 빛이 강해진다.
“저 자식 마법사야? 나보다 체격이 좋은데?”
“낄낄, 우리 토끼가 놀란 모양인데.”
근처에 있던 용병들이 한 두 마디를 더했다.
신원 증명을 페레 시에 보냈으니 마법사 명부가 확인만 되면 시온은 바로 용병 패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수련 마법사 자격이 있는 자는 용병 시험을 치를 필요도 없었다.
그만큼 검증이 돼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싱글싱글 웃으며 이틀 뒤에 오라고 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ㆍㆍㆍ
대강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온은 녹색 반지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것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지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이게 뭐지?”
시온은 반지를 들고 자세히 살폈다. 반지의 표면에 새로운 글자가 떠오른 것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겨놓은 형태였다.
아직은 완전히 이것이 어떻게 변할지는 몰랐지만 이대로 팔아버렸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녹색이 상징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이나 치유였다. 관련된 고위 마법이 숨어 있을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그렇게 되면 팔지 말고 직접 쓰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이걸 페라라 가문에서 상품으로 건 것은 이것에 이러한 것이 숨겨져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비밀을 밝혀낼 것이었다.
푸른 액 덕분에 만들어진 또 다른 발견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적어도 일주일은 꼬박 걸리겠는데.”
그래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시온은 숨겨져 있던 마법이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과는 끝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시온은 용병 길드에서 석패를 받았다. 진짜로 돌로 만든 것은 아니었고 일반적인 패가 최하급을 뜻하는 석으로 구별될 뿐이었다.
그래도 발급소가 제국 용병 관리소이니 다른 곳보다는 급이 높은 것은 확실했다.
그보다 시온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건 최근에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 나가고 있는 녹색 반지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푸른 액을 모두 투자한 결과, 추측이 맞았다.
글자가 더 선명해지고 늘어났는데 그것은 암호가 있는 마법을 뜻했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자 어설프게나마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시온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신기한 현상을 보기 전까진 이 녹색 반지에 수준 높은 마법을 그냥 쓸 수 있는 고급 장비라 생각했건만 막상 보니 환상 마법이 눈앞에 단어와 재료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아직 단어들이 완전히 밝혀진 것이 아니라 환상들은 부족하게 앞에 펼쳐졌지만 시온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제조법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만들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가 없지만 마나를 증진해주거나 일시적으로 대폭 강화해줄 수 있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게 숨어있었다니. 이런 줄도 모르고 팔아버릴 생각을 했단 말이지. 하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끝이 없다는 건 맞았다. 시온은 차석의 상품이라도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석을 해서 완전한 지팡이를 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안에 이런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주는 자도 몰랐을 것이었다.
“녹색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녹색이 가지는 의미는 독과 치료이지만 무언가를 제조할 수 있는 특수 약품도 포함했다. 여기에 제조법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물건의 출처가 의심스러웠다.
‘물어볼까?’
ㆍㆍㆍ
페라라 가문이 하사한 물건에 대한 정보라, 조언하는 마법사에게 금화 하나를 주고 물어보는 참이었다.
이런 조언의 업으로 살아가는 마법사도 있었다.
“녹 반지라. 아무래도 파수꾼 반지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그것은 페라라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물건이 맞습니다. 그리고 시험자들에게 선물로 줄 수 있을 만큼 적당하지요.”
“아니 내 말은 이것을 페라라 가문에서 어떻게 얻었느냐는 것이야.”
“흠,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이런 제작자가 불분명한 물건은 분명히 유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법 장비의 제작은 제작자의 이름이 기록되길 마련이었다. 이 자의 조언은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유적?”
“그렇습니다. 어디 유적에서 나왔는지 알고 싶습니까?”
남자는 태연하게 질문을 던지며 손바닥을 올렸다.
금화를 얹혀 달라는 뜻. 시온은 그자에게서 거기까지 듣고 자리에서 나왔다. 뻔한 얘기였다. 페라라 가문이 마음 놓고 유적을 털 수 있는 곳이 이 지역 근처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적에서 나왔다고 해서 모든 물건이 고가품인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제구실 못 하는 물건이 반이 넘었다. 그리고 진짜 유적을 탐험하고 싶으면 북부로 올라가야 했다.
몬스터가 너무 많아 위험한 나머지 입구조차 건들지도 못한 유적이 수두룩했다. 그런 유적만 터는 용병도 있었다. 이들은 유적 사냥꾼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