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팽가의 초대(3)
작업대에 대한 허락을 맡은 뒤부터는 시온은 마음이 아주 편했다. 사실 이곳에서의 사교 모임은 시온의 성격과는 영 맞지는 않았다.
누구를 같은 편으로 정하고 누구를 적으로 정하고 그런 일에 전력을 하기엔 아직 시온은 갈 길이 많았다.
에릭은 잘생긴 외모 덕에 그새 귀족 여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춤. 그랬다, 현대인이었던 시온에게 있어서 춤이라는 것은 어설픈 몸짓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런 취미도 없었을뿐더러 그런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귀족은 귀족다운 춤을 출 줄 알아야 했다. 자유분방한 게 아니라 일종의 파트너를 갖추고 격식이 있는 춤이었다.
시온은 에릭이 생각보다 춤사위가 능숙한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배워두면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지금이야 고리를 쌓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일정 고리가 쌓아지고 마법사 승단 시험 자격을 얻고 시험을 보다 보면 귀족다운 모습을 점점 보여주는 편이 유리할 것이었다.
시온의 니벨룽 가문은 장자에게 그런 교육을 거의 전담시켰기 때문에 시온은 그런 혜택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다.
‘나하고 춤을 추고 싶은가 보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정말로 못하는걸.’
시온은 베아의 요구에 대해서 정중히 거절하고 자세히 설명했다. 열심히 설명하자 베아는 시온이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시온과는 다른 이유로 번번이 귀족 남자들의 신청을 거절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시 도팽이었다.
루시 도팽이 이 모임의 주인공인 것도 있지만, 그녀의 가문이 주는 후광은 대단했기에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해가며 한 명의 남자를 보고 있었다. 시온 이었다.
‘뭐하는 거지? 눈치도 없나? 저 바보가.’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한 마디도 꺼내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시온의 신청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시온은 멀뚱멀뚱 생각에 잠겼다가 가벼운 수다나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어나서 시온에게 가서 춤 신청을 하거나 집사를 시켜 시온을 불러오게 하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시온이 귀족의 예의라는 것을 알 줄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 모를 줄이야.
그녀는 초조해 하고 있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수가 보이긴 했지만, 작업대에 대한 허락을 해줬으니 빚이 있는 것인데 보통 귀족이라면 이런 혜택을 받으면 영애에게 거절당한다 해도 춤을 신청하러 와야 했다.
그런데 시온이 정말로 모르는 것 같자 그녀는 자포자기해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뜻밖의 인물이 초대에 응해서 왔다.
페라라 가문의 자제였다. 페라라 가문은 이곳 자유도시 페레시를 다스리는 가문이었다. 이번 시험의 책임과 대도서관은 페라라 가문의 것이었다.
시온 역시 새로운 흐름이 들어오는 것을 흥미롭게 봤다. 현재 시온에게 있어서 고마운 절대적으로 고마운 가문이었다. 녹색 반지는 원래 소유자는 페라라 가문이었다.
페라라 가문이 녹색 반지의 정체를 몰라 창고에 썩혀 두고 있었다가 이번 기회에 시온에게 선심 쓰듯 준 것이었다.
‘이것에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페라라 가문과 도팽 가문의 사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둘의 사이는 경쟁 가문이라는 것이 맞았다. 백 년 전에 영지 분쟁을 한 적이 있었을 만큼 원한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 페라라 가문이 도팽 가문을 항상 질시하는 것이 마나의 정수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진짜 좋은 정수는 밖으로 돌지 않고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쓰이기 마련이었다.
그 정도의 기술력이 페라라 가문에는 없었다. 페라라 가문은 대신에 무역 수준이 높았고 그에 기반을 둬서 좋은 장비를 많이 구매하거나 유적 도굴에 정기적으로 용병을 고용해 보내곤 했다.
녹색 반지도 그와 같은 형태로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날 협박해서 빼앗으려고 하겠지.’
금박의 정수에 대한 제조법은 그 정도 가치가 있었다. 하급 제조법도 구성이 특이해 기존에 유통되는 것들보다 효율이 높은 것 같았다.
시온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 새로운 화제의 인물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페라라 가문의 차남인 오비초 페라라였다.
페라라 가문의 문장인 바다를 날아가는 흰색 갈매기가 보였다. 오비초 페라라도 에릭만큼이나 뭇 여성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잘생긴 탓이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차남이라는 지위 정도일 것이었다.
ㆍㆍㆍ
오비초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에드바르를 찾아 인사를 했다. 마법사의 탑에서 나온 다섯 개의 고리의 마법사는 함부로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오비초 역시 마법사인 탓이었다.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후배 마법사이고 상대가 마탑에 속해있다면 인사 정도는 해야 한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나서 오비초의 다음 시선은 시온을 향했다. 에드바르와 친분이 있던 오비초는 에드바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았다.
시온 니벨룽의 이름에 대해선 이미 가문의 대리로 나가 있던 마법사들에게 들었다.
‘저 녀석인가?’
그의 눈매가 좁혀졌다. 귀족다운 것은 없었고 마법사다운 모습은 더욱더 없었다. 니벨룽 가문이라면 자유도시와도 맞지 않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안심을 했다. 시온이라는 자가 생각만큼 마법에 열정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 마법의 길은 험난했다. 육체 단련과 병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비초의 다음 시선은 루시 도팽에게 향했다. 루시 도팽을 보자 그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오늘도 도도하군.’
오비초는 루시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다. 사실 오비초는 오랫동안 루시를 좋아했다. 그런데 가문이 문제였다. 오비초의 신분과 루시의 도팽 가문은 적당한 급이었고 약혼이 이뤄질 법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정작 루시 도팽이 오비초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이런 그가 가문의 의사에 반해서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루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항상 그래 왔듯이 그녀에게 춤 신청을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데 오비초는 그녀의 눈초리가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는 방금 그가 평가했던 시온이 있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그가 알아챘다. 왜냐하면, 여러 번 그녀에게 거절당했던 그의 눈빛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저 녀석한테 마음이 있다고? 니벨룽 가문은 아무런 가문도 아닌데, 저런 녀석과는 신분이 맞질 않잖아.’
그렇게 오비초가 루시에게 대차게 까이는 도중 시온은 베아에게 접근해오는 귀족 남자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여기에 대해선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가 이런 곳에서 원하는 게 어떤 것인지 얼마 없는 경험이지만 시온도 있었다. 그렇게 베아가 춤을 추러 간 틈을 타서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허락도 맡았으니 이제 이곳에서 볼일 따위는 없었다. 에드바르가 다시 일을 제시할 일이나 비위를 맞추는 일이나 모두 시온의 성미와는 맞지 않았다.
‘작업대의 승인을 받았으니 재료를 구해야겠는데.’
시행착오를 거치려면 넉넉히 재료가 있어야 했다. 사실 이런 무식한 방법은 길드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마나의 정수를 만들려면 핵심 재료가 꼭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보통은 마나를 듬뿍 담고 있는 특수 약초가 있어야 했다.
하급 정수를 만든다고 해도 그건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자면 그것이 중요했고, 제작 과정에서 실패하게 된다면 재료를 날리는 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배우겠다는 것은 무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온이 이것을 굳이 하려고 하는 것은 제작법을 확보했기에 그랬다. 제작법은 당연히 긴 고대어로 되어 있었으나 시온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
그러니 마치 조리법을 보고 만드는 요리처럼 어느 정도는 정확한 해석을 통해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마법사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에드바르라고 해도 고리 하나를 이제 달성한 제작 지식이 거의 없는 마법사가 이러한 작업을 하겠다? 그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는 특이 약초에 대한 문제를 시온은 푸른 액으로 대체를 해보려고 하는 것에 있었다.
“감이지만 왠지 효과가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아직은 막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지금 푸른 액을 모두 복용한다고 해도 원하는 성취인 두 번째 고리를 달성하는 건 몇 년의 시간을 꼬박 바쳐야 했다.
시온의 자질이 나쁘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세 배가 넘는 마나가 필요한 바람에 보조제가 있음에도 목표치를 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급 정수만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복용해도 기간 단축은 충분하고.”
결론은 푸른 액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시온은 황금 도끼단이 운영하는 여관의 문을 열었다.
조금 전의 장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급이 낮은 어지러운 모습들. 일 층은 식사와 술이 돌기에 한창 요란하게 시끄러운 시간대였다.
일을 마친 용병들은 술을 걸치고 있었고 욕설과 함께 다양한 도박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어리거나 예쁜 창녀들의 웃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흘렀다.
시온에게는 오히려 이런 광경이 편했다. 어쩔 수 없었다. 현대인이었던 시온은 뼈저리게 아래층의 사람이었으니까. 위쪽의 공기를 맡게 됐다고 해서 그곳이 친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머무는 곳으로 돌아와서 쌓인 마석의 마나를 이브림의 마나 수련법으로 빨아드리고 생성된 푸른 액을 복용했다.
단숨에 피로가 날아가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 다시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ㆍㆍㆍ
일단 다음날이 되자마자 시온이 간 곳은 일하던 의료상에 들린 일이었다. 하다가 마법사 시험을 치른다고 때려치운 약초 분류 업. 이곳을 운영하는 마법사와의 친분이 있으니 좀 더 재료를 싸게 사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주인인 브와디가 시온을 반갑게 맞이했다.
“허허. 어엿한 마법사가 되었구먼,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내가 그러지 않았는가 바로 합격을 할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서 성적이 어땠는가?”
브와디는 넌지시 시온의 성적을 물었다.
“차석으로 붙었습니다.”
그가 매우 놀라서 입을 벌렸다.
“차석이라고? 정말인가?”
시온이 마나를 쌓은 것이 확실하니 합격을 했을 것이라고는 했지만, 턱걸이했을 거로 생각한 상황이었다.
마법사 면허 시험엔 마법 장비가 부족하면 상위 성적을 낼 수가 없는 구조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랬다.
그 역시 젊었을 때는 숱하게 좌절했다. 이러한 의료 상을 열게 된 일도 그 좌절 덕에 방향을 튼 탓이었다.
“그렇습니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자네가 재능이 있다고는 알았는데 그 정도의 재능일 줄은 결코 몰랐네.”
당연히 시온의 순수한 힘이 아니었다. 시온이 고리를 달성하고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은 선조의 유품이 만들어낸 푸른 액이 원동력이었으니까.
“저도 몰랐습니다. 브와디님. 어쨌든 일자리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지금 흥미로운 일이 들어와서 잠시 그 일을 맡아볼까 합니다.”
“그게 뭔지 알 수 있겠나?”
“네. 도팽 가에서 조금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순수한 제 호기심으로 제작에 쓰일 재료를 구해볼까 합니다.”
예상대로의 반응이 나왔다. 시온은 재료의 값을 깎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