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04)

정수 제작(3)

할프 가문은 생각보다 부유한 가문인 모양이었다. 에릭이 돈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바로 잡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금화 백 개면 큰돈일 것인데 서열이 밀리는 아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배우겠다고 요청했을 때 그것을 흔쾌히 들어줄 만한 가문이 어디 있을까.

시온의 니벨룽 가문이었다면 턱도 없었을 일이었다. 시온이 마법사 면허 시험을 보겠다고 나갔을 때 받았던 돈은 숙박비 일주일 분밖에 되지 않았다.

금화가 빠듯해서 중간에 야생동물을 잡아먹지 않았더라면 오다가 식량 문제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딘가 달라진 것 같은데, 시온.”

달라졌다. 분명히 달라졌다. 시온이 어제 경험한 마나 폭풍은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수 중에서도 품질이 좋은 정수를 써야만 가능한 것이다.

조금만 고리가 높아져도 하급 정수는 눈에 차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시온은 이제 수련 마법사 면허를 따고 고리를 한 개 달성한 마법사였다.

수련 마법사의 면허를 받아낸 것만 해도 평민의 입장에선 큰 영광이고 인지도와 비교적 좋은 일자리를 구할 길이긴 하나 마법사만 뭉쳐놨을 때는 이제 유년기를 벗어나 이제 걷기를 시작한 청년에 불과했다.

“뭐가 달라졌지?”

시온이 반문하자 에릭이 머리를 긁었다.

“빛이 난다?”

에릭의 눈썰미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과도한 마나를 한 번에 흡수했을 때 벌어지는 현상 중 하나가 이런 이 현상이었다. 정말로 대단한 정수를 흡수했을 땐 며칠간 후광이 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실 변화가 있었다.”

“그게 뭐지?”

“깨달음이 있었어. 마법사의 길에 큰 진전을 봤다.”

마법사가 마나를 수련하는 방법에는 또 하나의 변칙루트가 있었다. 바로 깨달음이었다.

마나의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만한 자질과 재능이 갖춰진다면 드물게 한 걸음 한 걸음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진전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상 존재하는 것일 뿐 현실적으로는 거의 복권당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마법사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일지를 남겨 마법사의 탑에 기증하는 일도 많았다.

물론 시온은 자신에게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허울 좋은 얘기일 뿐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나 없다고 이미 결론을 내렸다.

“그렇군. 이렇게 나를 가르치면서도 이미 부단한 노력을. 넌 역시 대단한 녀석이다. 내 여동생을 꼭.”

“마지막만 빠지면 참 좋을 것 같다. 일단은 뼈대는 다 가르쳤다. 나도 이 이상은 몰라. 선조가 나한테 남긴 것은 이것밖에는 없었다. 너한테 필요한 건 이제 실전이라고 본다.”

시온은 에릭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것이었다.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현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중세에는 악수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선조의 습관이다.”

“아아, 용기사 발뭉 님의······.”

“용기사가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을 하자 손을 내밀어 잡았다. 꽉 잡아주고 손을 뗐다. 시온은 금화 보따리를 가슴팍에 넣었다. 묵직한 것이 흐뭇했다. 뜻밖의 교환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덤으로 중세의 이곳에서 처음으로 괜찮은 녀석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ㆍㆍㆍ

금화가 들어왔으니 앞으로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시온은 곧바로 재료를 사서 푸른 액에 담가놔야 했다.

실제 마나를 머금은 특수 약초는 굉장한 가격을 자랑한다. 그러니 자라다 말아 본래의 목적을 잃은 가치가 떨어지는 상품을 찾아야 한다.

시온이 미성숙한 콩나무줄기를 사가자 약재상인 브와디는 강장제를 만들려는 줄 알았다. 마나를 잃은 희귀 약초들은 이렇게 각 효과를 지닌 약재나 약으로 둔갑해 사람들에게 팔렸다.

시온은 이제 그 줄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판매하기에는 위험하지.’

녹색 반지에 적혀 있던 하급 정수의 레시피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좋은 것이지만 문제는 희귀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녹색 반지가 유적에서 나온 물건이다 보니 아주 오래돼서 시간 간격이 벌어져 있는 정수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당장 먹을 분량 까지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똑같은 걸 먹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내성에 대한 문제가 가장 컸다. 그래서 시온이 다음 만들 정수로 고른 것은 구름 줄기였다. 생긴 것이 구름 같다고 해서 붙여진 구름 나무의 특정 부분의 줄기였다.

재료를 구하기도 한결 편하고 그만큼 물량으로 자주 나오는 것이었다. 시온은 똑같은 방법으로 마나를 잃은 미성숙한 구름 줄기를 구해다가 푸른 액에 담가 재생장을 시킬 생각이었다.

흰색의 구름 모양인 줄기는 말라붙어 있었다. 약재로 쓰이기 위해 말려놓은 것이다. 시온은 그것을 푸른 액이 담겨 있는 곳에 넣었다.

일단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나머지는 부족한 양이 생기면 부어주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시온은 첫 번째 마나 정수를 제작하는 데 성공해 나름의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니 하급 약초를 사다가 가장 아래 것들을 만들어 실력을 붙일 생각이었다.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제조법에 대해서 확실히 익혀두는 것이 좋겠다는 확신이 든 상황이었다.

녹색 반지의 최종 목표인 금박의 정수를 얻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재료도 필요하지만, 이 정도의 물건을 제작하려면 이것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신뢰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시온은 그런 사람을 찾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래를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나 사람이 오면 해야겠지만 아니면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물론 제조법을 고위 마법사에게 넘기고 급이 낮은 정수를 대가로 받는 방법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방법 자체도 위험했다. 순수하게 물물거래를 해주면 고맙지만, 강매를 당한다거나 뺏겨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싫은 가장 큰 이유는 어지간하면 이것을 복용하고 싶었다. 첫 정수만으로도 육 개월 치를 얻었는데 금박의 정수는 어느 정도일까.

모든 하위 마법사가 굳건히 믿고 있는 교과서적인 노력과 수련, 힘든 전투,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마법 서적에 매진하는 것만으로는 시온의 생각엔 도저히 다음 고리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하위 마법사가 그래서 자신의 방향을 선회해 적통의 길을 벗어난다. 남은 것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ㆍㆍㆍ

도팽가에게는 큰 도움을 받은 것이 되었다. 나름 머리를 굴려서 루시 도팽의 눈에 들으려고 했던 것이 크게 돌아온 것이었다.

도팽가의 작업대와 보조 도구의 수준은 훌륭했다. 그런 작업대를 가지고도 거의 다 실패해 마지막 순간에 얻어낸 마나의 정수였다.

도팽가의 작업대가 아닌 용병이나 상회나 마법사 개인이 운영하는 작업대를 썼다면 분명히 실패했을 것이었다.

익숙한 건물이 보였고 시온은 돌고래로 치장된 문을 통과했다. 작업대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보조 도구조차 돌고래 문장이 박혀 있다.

“시온 니벨룽.”

안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 목소리는 젊은 여자였고 시온은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시온에게 이곳의 작업대를 쓸 수 있게 승인을 해준 도팽 가의 여식인 루시 도팽이었다.

루시 도팽은 그곳을 관리하는 마법사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온이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오늘 이곳에 미리 있었던 이유는 시온을 우연히 보는 것처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시온이 들어오는 것을 바로 알아챈 것이었다. 애초에 시온의 체격과 몸이 워낙 눈에 뜨여서 못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동공이 갑자기 확 커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마나가 단숨에 증가했어.’

시온의 마나 수준이야 사교장에서도 봤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시험관에게도 시온이 어느 정도의 마나를 가졌는지도 직접 물어봐서 알고 있었다. 시온은 그저 막 첫 번째 고리를 형성한 마법사였다.

첫 번째 고리라고 해서 다 같이 분류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고리를 가기 위한 단계가 있었는데 시온은 이미 초입 수준을 한참 넣었다. 중간쯤이라고 봐야 했다.

보통의 마법사가 좋은 마나 수련법에 좋은 마석과 낮은 보조제를 먹는다고 해도 시온과 같은 수치는 나오지 않았다.

자질이 너무 뛰어나거나 자질이 쓸만한 상태에서 좋은 정수를 흡수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조건은 까다로웠다.

‘옷을 안 바꿀 정도로 재정난이 있으니 마석으로는 불가능하고 수련법에 대해선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것도 뻔할 테고.’

게다가 시온이 이곳에서 간단한 재료들로 기초적인 제작을 하는 것을 보고받았었다. 그마저도 마나 수련에 쏟은 시간은 한정적이라고 봐야 했다.

놀라움은 점차 스며들고 그녀가 눈을 빛냈다.

“무슨 수련법을 쓰시고 계신 거죠?”

시온이 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브림의 마나 수련법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누군가에게 수련 법을 받을 일이 없어서요.”

“이브림의 마나 수련법?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대장서에서 읽고 배웠습니다.”

“하, 정말. 야속한 사람이네요.”

“??”

시온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당연히 그녀가 자신을 잠재적인 맞수로 두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녀 역시 이번에 마나 정수를 하나 복용해 급성장한 상황이었다.

좋은 도구에 선생님을 두고 좋은 정수까지 먹었지만 시온만큼의 성장은 보이지 못했다. 게다가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온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성큼성큼 성장하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하신 거죠? 그 마나. 어떻게 얻었죠?”

그녀는 초조해 하며 물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사람이 안달이 났다. 마법사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고 명예가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대가문의 영애인 그녀가 그런 말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파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온은 그 질문을 듣자마자 간단하게 답했다. 에릭에게 했던 거와 같은 논리였다.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깨달음?!”

“네.”

“그게 왔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맙소사.”

단순히 고대어에만 재능이 넘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재능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아직도 거지인 시온이 정수를 먹었을 거라는 생각을 추후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도팽 가의 작업대는 훌륭하더군요. 요즘 몇 가지 약재를 만들어내는데 푹 빠졌습니다.”

“듣긴 했어요. 재료를 몽땅 다 날렸다고요.”

“쉽지 않더군요.”

“사람을 붙여드릴게요.”

그녀가 뜻밖에 그런 말을 꺼냈다. 그건 곤란했다. 혼자서 작업해서 정수를 몰래 가져 나가야 했다.

“괜찮습니다. 하하.”

“기초는 배우세요. 그리고 제작일이라는 게 단순히 흥미만으로는 되지 않아요. 견습만 일 년이 걸린다고요. 그리고······.”

그녀의 눈초리가 시온의 몸을 구석구석 훑고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가 말했다.

“제발 기사들이 하는 단련은 그 정도만 하세요. 마나는 금이란 말 못 들어봤어요?”

당연히 시간은 금이다. 하지만 시온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런가요?”

이 정도의 이미지가 지금은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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