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304)

영수의 핵은 몬스터의 핵과는 다른 점이 한둘이 아니다. 색도 모양도 다르고 마나 함유량도 달랐다. 몬스터의 핵보다 훨씬 농도가 짙다. 장비에 마법을 메모라이즈 시킬 때 보통은 영수의 핵이 더 중요하게 작용을 했다.

특히 손실 없이 핵을 꺼내는 것은 몬스터 핵을 분류하는 것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까다로웠다. 시온이 덜컥 작업에 들어가자 구경하던 마법사들이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짧은 신음을 냈다.

그러나 그걸 제지할 만한 사람도 입을 다물고 있는 중이라 시온이 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시온이 간단하게 일을 진행하자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영수의 핵을 고리 하나의 마법사가 분류할 수 있었습니까?”

“원칙적으론 안 되지. 그런데 그게 되니까 이곳에 참가시킨 거 아닌가.”

“니콜라 도팽님이 키우는 인재인데 안될 건 뭐가 있겠어.”

어느새 시온은 이들에게 예외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니콜라 도팽이 후원으로 키우는 특수한 마법사 정도로. 애초에 이해가 안 되는 게 한둘이 아녔다.

그런 도중에 시온은 영수의 핵을 완전히 꺼냈다. 푸른 핏덩어리가 손바닥에서 흘렀다. 시온이 조심히 물을 따라 씻기자 고농도의 마나를 함유한 색깔이 선명한 핵이 드러났다.

영수의 핵. 켄리스가 대단한 영수인 것은 아니지만 희귀하다는 점에서 핵뿐만이 아니라 가죽부터 털, 하다못해 발톱까지 돈 덩어리였다.

“이것이 영수의 핵인가.”

오와인이 감탄하듯이 말했다. 칼리 역시 시온처럼 즉석에서 작업하는 것은 처음 봐서인지 들뜬 모양이었다.

‘휴, 무사히 됐군.’

이들은 시온이 니콜라 도팽이 일부러 집어넣은 실력자인 줄 알지만 시온은 그저 우연히 이곳에 참가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니벨룽 영지에서의 사냥꾼으로서의 지식을 얻기 위해 일반 도축은 신물이 나게 해봤었지만, 영수의 핵을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걸 달라고 하는 건 무리겠지.’

그러나 영수의 부위 하나쯤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날이 선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뭐지?”

중세에서는 뿔피리 소리로 근처의 있는 일을 알리곤 했다. 소리의 세기로 대강의 일을 알 수 있는데 이 같은 종류의 것은 적이라는 뜻이었다.

‘적이라고?’

이곳의 위치를 생각해봤을 때 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다른 몬스터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등장한 것은 또 다른 무장의 무리였다. 칼리 경과 비슷한 무장의 미늘 갑옷을 두르고 있는 기사가 셋, 용병이 아닌 정식 병사가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시온은 단번에 어디 쪽 정식 병사인지 알게 되었다. 온통 사자 문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자를 문장으로 쓰는 가문은 흔하지 않았고 빨간색이라면 한 곳밖에 없었다.

라레테저닛. 왕가의 문장이었다. 금색이 적통이었으니 분가된 가문일 거였다. 시온은 번득 처음 자유도시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무슨 짓이지?! 명예가 없는 것들. 말해보시지.”

칼리 경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흥분할 만도 했다. 이들이 등장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쪽에 있는 용병을 모두 살해했다.

“주군의 명에 따라 오와인과 거기에 있는 영수의 핵을 우리에게 넘겨야겠다.”

“기사의 탈을 쓰고 더러운 도적질을 하려는 것이냐.”

“켄리스는 우리가 쫓던 영수요. 그것의 권리는 우리에게 있소만.”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은 그가 마법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낮은 단계가 아니었다. 고리가 최소 네 개는 되었고 무장 상태가 아주 좋았다.

왕실 소속의 마법사라는 것이었다. 시온이 봤던 급이 있던 마법사는 다색등불 에드바르 였는데 에드바르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였다.

시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발. 예감이 안 좋더라니.’

보아하니 마법사는 영수를 노리는 것 같고 기사는 오와인을 포획하려는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영지 전을 하려는 것 같았다.

자유도시를 두고 영지 전을 벌일 판이다. 영지 전이 벌어진다고 하면 아무리 앙숙이라고 해도 도팽 가와 페라라 가문이 서로 힘을 합쳐 대항할 것은 분명했다.

그에 앞서 도팽 가문의 혈육을 챙기게 된다면 왕의 입장에서는 되게 유리해지는 것이다. 당장에 벌이고 있던 망명자를 내놓으라는 시비에 온갖 협상을 이롭게 할 수 있었다.

몸값만 해도 상당한 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에 이곳에서 당장에 목숨을 붙일 수 있어 보이는 것은 오와인 밖에는 없었다.

시작부터 용병을 죽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뜻밖에도 중세를 움직이는 중요한 구조가 바로 몸값이었다. 용병을 사로잡는다고 해서 누가 몸값을 대주겠는가. 이름 있는 용병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것들은 그 정도 급은 아니었다.

검을 뽑고 천천히 조여오는데 모두가 사태의 심각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오와인은 아예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직 그의 깜냥으로는 이러한 사태에 견딜 재간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칼리 경이 대번 검을 뽑아서 사지기를 향해 겨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제가 모두 도륙을 내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당장에 지휘관이면 전선을 가다듬어야 할 것인데 대뜸 검을 뽑더니 또다시 돌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별칭이 용맹한 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더니 정신이 살짝 나간 작자였다!

상식적으로 봐도 저기 있는 기사 한 명만 해도 칼리 경이 장담할 수 없는 상대임이 분명했다. 상대도 좋은 장비로 떡칠한 것 같았으니까.

그런 기사가 셋이다. 그 옆에 있는 마법사도 보통이 아니었고 생각이 있다면 여기서 협상을 해야 했다.

‘타이밍을 봐서 튄다.’

시온은 이미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저쪽 기사도 방심 상태였다. 기사라는 것들은 아무래도 저런 것 같았다. 도망갈 구석은 있었다.

도망칠 방향은 대략 세 곳이었고 시온은 어느 쪽으로 갈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잡혀 목숨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산다고 해도 아공간 반지를 빼앗길 것이었다.

그걸 잃게 된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아직 제대로 활용도 못 했는데 이런 것을 저 마법사에게 넘기는 것은 피가 솟구칠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희망마저도 칼리 경은 부숴버렸다. 대뜸 한복판으로 가더니 칼로 상대를 겨누고는 소리쳤다.

“결투다. 더러운 놈들. 나 칼리 시몬스를 상대할 자는 누구인가.”

아니, 저렇게 가까이 갔다가 마법에 맞아 전투불능이 되려면 어쩌려는지 게다가 그런 일이 아니라고 해도 어떤 정신 나간 자가 이렇게 유리한데 결투를 받아들이겠는가.

그냥 밀어붙이기만 해도 상대를 포로로 만들 수 있는데 결투라도 받아들였다가는 쓸데없이 목숨만 위험하지 않은가.

“받아들인다. 더럽다니 그 모욕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왕을 모시는 기사로서 치욕은 반드시 갚는다.”

놀랍게도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 벌게져 있는 콧수염의 기사가 응답하고는 똑같은 투핸드소드를 꺼냈다.

장비는 칼리 경이 더 좋아 보이긴 했다. 칼리 경은 풀아머 상태였고 상대하겠다는 자는 미늘 갑옷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늘 갑옷에도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래가 없다고 봐야 했다. 설사 이긴다고 해도 다른 두 명과 병력은 어떡할지에 대해선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최악의 상황은 칼리 경이 저 상태에서 원거리 공격에 노출되어 허무하게 사망하는 것이었는데 일단은 시간을 번 것은 확실했다.

“거기 마법사, 이름이 무엇이지? 네가 영수의 핵을 챙겼겠다.”

에드바르와 비슷한 경지의 마법사가 대뜸 시온을 불렀다. 그 마법사는 시온의 손에 있는 아공간 반지를 재빠르게 확인하고는 옆에 있는 기사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칼리 경과 콧수염 기사의 결투가 비겁하고 비열한 놈이라는 욕설이 교환되는 와중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누가 우세하는지에 대한 것은 단번에 판가름이 날 것 같지는 않았다. 팽팽한 느낌이었다.

놀랍게도 콧수염 기사는 지휘권이 있는 자로 보였고 지휘관의 명예가 걸려 있다고 생각했는지 왕의 정식 병사는 함부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온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점검하고 빙점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돌려보았다. 정말로 큰 효력을 발휘할지는 아직은 미지수. 산맥 안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면 시온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무장 상태도 가벼웠고 운만 따라 준다면 전투 한 번 없이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초짜 녀석이군. 순간 기사인 줄 알았다. 특이한 녀석일세.”

마법사가 시온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는 이번 일에 변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저쪽의 마법사 둘은 이미 포획한 상태였으니 마법사 전력이라고는 저기 보이는 체격이 좋은 녀석과 같은 고리의 마법사 하나뿐이었다.

장비 역시 형편이 없어 평범한 용병이 더 나을 정도였고, 다만 체력 단련이 무시무시한 점이 특이사항이었다.

게다가 시온이 켄리스의 핵을 손쉽게 분리해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빨리 단검 하나로 핵을 분리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구심이 들자 반드시 사로잡아 거기에 대해서 답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상황이었다.

“오와인 도팽을 왕께 바치면 저희의 입지도 견고해지겠지요. 거기에 영수와 칼리 경이라니 이번 일은 저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군요. 도팽 가는 칼리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죽여야지. 용병처럼 못 믿을 만한 놈도 없다. 명예가 없는 놈들이지. 다만 저 마법사 녀석에게는 물어볼 게 있어, 최대한 생포를 해야겠다. 모두 그렇게 전해두도록 해.”

“마법사라고요?! 칼리 경의 종자 아니었습니까?”

“마법사가 맞아. 확실한 건 잡아봐야 하겠지만, 기사가 아공간 반지를 사용할 리가 없지.”

“마법사 주제에 대체 무슨 훈련을 한 건지 감이 오지 않는 데요.”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칼리의 검이 콧수염의 팔을 날려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검과 바닥에 쓰러진 콧수염을 칼리 경이 하프 오우거에게 그러했듯 대가리를 쪼개기 위해 걸어갔다.

“이 개 같은 새끼 뒤져! 비열한 도적 새끼 너 같은 새끼는 대가리가 쪼개져야 해.”

“잠깐 칼리 경. 나는 몸값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목숨과 오와인의 목숨을 보장한다. 나의 명예를 걸겠다.”

“네 명예는 엠병. 내가 쪼개 버릴 거야.”

칼리는 듣지도 않고 검을 내리찍었는데 콧수염이 믿을 수 없는 반사신경으로 빗겨서 살이 움푹 베였고 즉사하는 것을 피했다.

거기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모든 정식 병력이 내달렸고 다른 기사도 빠르게 칼리의 검을 막기 위해 달렸다.

시온은 때가 왔음을 알았다.

“벅, 튄다.”

“예?”

“알아서 튀란 말이야. 오와인과 칼리 경은 몸값을 내서 살아남겠지만, 너하고 나는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

명예라. 알게 뭔가. 시온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개념이었다. 시온이 뒤도 안 보고 안쪽으로 뛰자 앞에 있던 적의 정식 병사가 당황해 칼을 휘두르려고 했다.

준비해 두고 있던 마법이 손에서 날아갔다. 얼굴에 불덩이 하나를 그대로 맞은 남자에게서 고함이 터졌다. 설마 마법사인지 정말 몰랐던 것.

시온이 감쪽같이 돌파해버리자 마법사의 눈이 뒤집혔다.

“뭐하는 거야!! 영수의 핵을 가지고 도망치고 있잖으냐!! 벨페르 나를 따라와. 저 녀석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주군께 진상해야 할 물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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