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단계(7)
계약 용병이라고 해도 계약에 적힌 조항에 대한 의무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고용주를 될 수 있는 한에서 지키는 것이다. 시온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넣어두고 싶었다.
‘목숨이 날아가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지.’
사실 이런 덕목은 밥 먹듯이 명예란 단어를 쓰는 기사조차도 지키는 자가 거의 없었다. 하물며 용병이라면 대신 죽었다고 해서 칭송을 받기는커녕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경멸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니 뭔 놈이 저렇게 빠른 거지?”
험한 산맥을 내달리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산맥이라고 해서 나무만 빼곡히 있는 언덕 지형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아래에 있는 호수를 끼고 쭉 완만한 구릉지가 이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쉽게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그만큼 이동에 제약을 주는 바위나 잡다한 장애물이 많았으니까.
마법사가 타고 있는 건 이동형 영수였다. 진짜 값비싼 영수인데 길들이기도 만만치 않지만, 유지비가 상당했다. 그 위에는 마법사와 마법사가 대동하고 있는 종자 하나가 타고 있었다.
벨페르는 종자가 아닌 준 기사였다. 반년 뒤에 서임을 받게 되는 예비 기사이다. 벨페르와 마법사의 수준을 생각하면 시온을 쫓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시온을 쫓아야 할 명분이 있었다. 시온이 생각을 하고 그런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영수의 핵을 아공간 반지에 넣어둔 상태였다.
이대로 놓치기라도 하면 마법사는 큰 낭패였다. 오와인을 포획해야 하는 목적이 있는 건 기사들이었지 그는 아니었다.
“혹시 이동형 마법을 건 것이 아닙니까?!”
벨페르가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예비 기사인 벨페르 역시 혹독한 훈련을 몇 년이나 한 경력이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도 시온의 체력과 속도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니다! 그냥 달리고 있는 것이야! 미친놈일세! 마법을 연마하지 않는 것인가?”
물론 쫓기는 자도 쫓는 자도 서로가 숨이 막히고 있었다. 시온도 죽을 맛이었다. 훌쩍 뒤를 보고서 든 생각은 이대로 도망치기는 글렀다는 것이었다.
원래 시온의 계획대로라면 일단은 추격을 벗어나서 장기적으로 산맥을 돌아서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건 첫 번째 계획을 실천하기도 전에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다.
벅과 사냥꾼 세 명,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내달린지라 뽑기나 다름이 없었다. 추격이 가장 덜 붙어 운이 작용한 것 같았는데 웬걸 시온도 처음 보는 영수를 타고 쫓아오는 자가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마법사다.’
영수를 탈 수 있는 건 거의 마법사였다. 그렇게 되면 지금 쫓아오는 이유는 뻔해졌다. 영수의 핵을 놓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협상의 여지가 있을까? 시온은 다시 한 번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날 죽일 생각이군.’
죽지 않는다 해도 신체가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고문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시온도 자신의 육체에 놀라고 있는 도중이었다. 푸른 액의 숨겨진 효과 덕택에 체력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을 정말로 테스트해봤던 적은 없었었다.
실제로 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아무리 단련이 되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시온은 숨이 가빠오는 것이 느껴졌다. 거리가 줄어들어 따라잡히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였다.
‘이건 안 돼. 그냥 전투해야 한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지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체력을 더 낭비하고 사로잡혔다가는 지쳐서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사로잡힐 것 같았다.
그럴 바에 머리를 굴려 싸워보는 것이 낫다. 마음을 정하고 최대한 전략을 구상해봤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대략 감지해봤을 때 마법사는 대략 에드바르 급의 마법사였고 옆에 오는 기사는 장비가 빈약한 것이 에릭 정도 되어 보였다.
‘항복한 척을 할까?’
조금이라도 지형이 유리할 것 같은 곳 무조건 장소가 협소한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시온은 갈림길에서 바위지대로 뛰어들었다.
이곳에서 항복한다면 멀리서 천천히 포위되거나 포박마법을 맞기 전에 근접에서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녀석이?! 혹시 이 영수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인가?”
“왜 그렇습니까?”
“저런 길은 얼마 못 달린다. 만약 영수가 지치게 되면 그때는 자네와 내가 무조건 쫓아가야 하는 거야.”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더욱 험한 지형에서 시온을 쫓아갈 수 있다고 해도 얼마나 따로 떨어져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지! 지금까지 영수로 추격한 거리만 해도 이미 지쳤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영수가 지칠 때면 저 녀석은 더욱 지치겠지.”
간단한 논리인데도 벨페르는 순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시온의 체력에 압도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의 냉정한 말을 듣고 보니 결국엔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투도 약간 걱정이 되는군요.”
“그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네보다 장비가 빈약해.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모두 일반 장비일세. 내가 봤을 땐 그나마 가치 있는 장비를 들고 있는 건 반지 하나로 보이는군.”
그 말을 듣고 나자 벨페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제 기사가 될 자인데 명예로운 태도가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저 녀석을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멍청한 녀석들 덕에 지금 사태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어. 켄리스의 핵을 상납하지 못하면 자네의 서임에 불이익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나는 징계를 받을 거야. 반대로 오와인에 핵까지 가져가게 된다면 우리 역시 보상을 받을 걸세.”
여기까지 논담이 되고 나자 더는 질문은 없었다.
“네 녀석!! 지금 거기서 멈추면 목숨은 살려주마. 하지만 끝까지 도망간다면 무조건 목을 내놔야 할 것이다!!”
마법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온은 그 소리를 듣고서 슬슬 작전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체력도 보존해야 했고 마법사의 말대로라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속임수겠지.’
왕의 깃발이 보인 이상 이곳에서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음으로 입을 막아버릴 확률이 높았다.
“섰다?”
“죽이실 겁니까?”
“물어볼 것이 있으니 최대한 생포로 하지.”
“그 후에는?”
“용병은 죽음으로 입을 막는 게 좋아. 그편이 언제나 좋다네.”
시온은 항복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최대한 좁은 곳으로 유도하기 위해 큰 바위의 교차점으로 장소를 잡았다.
지친 영수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위에 타고 있는 두 명도 이제 가까운 거리였다.
“놀라운 녀석이군. 이름이 뭐지?”
마법사 쪽이 입을 열었다. 시온은 눈빛을 보고선 알았다.
‘정보를 다 빼내고 죽일 작정이군. 과정도 장난이 아니겠지.’
중세에는 고문이 흔했다. 가벼운 것부터 큰 것도 있지만, 거기에도 전문적인 마법사가 끼어드는 경우가 있었다. 대상자의 정신이 붕괴할지도 모르는데도 각종 약과 마법을 통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경우도 있던 것이다.
“시온 니벨룽.”
“나는 단파라고 하네.”
단파,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시온이 알고 있는 마법사는 아직 몇 가지 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제 용병 패를 발급받거나 이것저것 끼어들고 있는 수준인데 마법사의 인명을 달달 외울 정도가 아니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단파님. 옆에 분은?”
“육 개월 뒤 기사가 될 남자지. 벨페르 경일세.”
“그래서 저를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약속은 지킬 것입니까?”
당연히 지킬 리가 없었다. 시온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에 가까웠으니까. 그를 존대해준다는 것은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단파에게 있어선 웃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양을 잡을 때라고 해도 그 칼날이 목 위에 걸칠 때까지 앞에선 만면의 웃음을 지어야 했다. 그래야 고기의 질이 좋다는 오래된 격언이 존재했다.
“영수의 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지 않나? 그것을 우리에게 넘긴다면 그냥 보내주겠네. 여기까지 애써서 온 것은 전부 그것 때문이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면 드리지요. 저는 이것의 분리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가지고 있었던 거지 핵에 대해서 딱히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반은 거짓말이었다. 시온이라고 해서 이 핵이 탐이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핵은 어차피 도팽 가에 상납이 되어야 할 물건이어서 애초에 마음을 비워둔 상태였다.
“보여주게.”
“좋습니다. 대신 저의 목숨이 보장된다면요. 어떻게 보장해주실 겁니까?”
“호오.”
벨페르가 시온이 요구하는 바에 의외라는 듯 감탄을 했다. 생각보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본 것 같은 능숙한 대처였다. 저런 요구도 하지 않으면 간단하게 배신당해서 주검이 되는 것이 이곳이었다.
“물건부터 보여주는 것이 먼저지.”
시온은 아공간 반지에서 영수의 핵을 꺼내 손에 올려놓았다. 시온에게 먼저 꺼내보라고 한 이유는 그만큼 이것이 올바르게 분리가 되었는지 확인해 보려는 단파의 목적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내가 돌아가서 전문가에게 맡긴다고 해도 저런 수준의 깔끔함은 볼 수가 없을 것인데.’
그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자, 이제 어떻게 증명하실 겁니까.”
시온이 재촉하자 그가 말했다.
“등불의 노파에게 맹세하지. 여기 있는 벨페르 역시 기사의 명예를 걸 것이야.”
결과는 알고 있는 마당이라 벨페르는 머뭇머뭇했다. 그는 어지간해선 기사의 명예를 걸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단파가 인상을 찌푸리고 속삭였다.
“멍청한. 어차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자네의 명예는 여전한 것이야 아직도 그것을 모르겠나?”
그 말을 듣고 헛기침을 하던 벨페르가 말했다.
“나 벨페르는 왕가인 라레테저닛을 모시는 기사로 왕을 모시는 나의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시온은 어이가 없었다. 벅이라면 저 말을 듣고는 입이 벌어져 냉큼 받아들였겠지만, 도대체 말뿐인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다른 것은 없습니까?”
“너의 입장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 정도면 최대한의 예우와 너의 생존을 보장한 것인데 어찌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느냐? 용병답게 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구나.”
단파가 그렇게 말하자 시온은 마음을 굳혔다. 여기서 저 둘을 끝내야겠다고 죽이든지 치명상을 입히고 도망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파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이 올라오고 시온이 그것을 넘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오랫동안 추적해오던 것을 얻은 단파는 순간 경계를 완전히 풀어 버렸다.
게다가 상대는 그저 고리가 하나인 마법사. 마법사끼리 싸움은 고리가 절대적이었다. 애초에 캐스팅 속도부터가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었다. 장비조차도 제대로 없는 시온이 마법으로 단파를 제압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게 시온의 손의 물건을 잡은 순간 시온이 그의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것도 강하게. 엄청난 악력이 가해지자 단파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준비해 두고 있던 빙점을 벨페르에게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