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304)

다음 단계(8)

단파가 낮은 급의 마법사가 아닌데도 빙점을 너무나 쉽게 허락을 했다. 시온을 너무 주의 깊게 본 것이 문제였다. 시온이 도주 시 사용한 마법은 불 속성이었다.

병사가 나자빠질 때 불덩이에 뒤집힌 것을 똑똑히 본 탓에 당연히 그쪽 계열이겠다 싶었다. 또 그게 아니라고 해도 시온이 정말 항복할 것만 같았기에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빙점은 일회성으로 중위 고리의 마법을 발휘하게 쓸 수 있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벨페르는 얼어붙었다. 실력이 좋고 나름 미늘 갑옷을 입었다고는 하나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전혀 없는 장비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맞았을 때는 속수무책으로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가까운 곳에서 빙결 마법이 터졌음에도 뜻밖에 멀쩡한 자는 단파였다. 단파의 장비가 마법의 충격을 거의 상쇄한 것이다.

다만 그건 마법에 한에서였다. 손이 부러질 때 얻은 고통과 이어지는 주먹 세례는 단파의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마법사와 마법사와의 전투는 캐스팅 속도가 절대적이었다.

하위 마법사가 상위 마법사를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다.

게다가 좋은 장비, 특히 마법을 방어해줄 수 있는 장비도 고리마다 효율이 달라서 서로 마법을 시전했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이 마법사의 전투였다.

“헉헉헉헉.”

시온은 바닥에 사체가 된 단파와 예비 기사를 보았다. 예비 기사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동상이 심했고 하체는 얼어붙어 있었다.

‘쓸만한 정도가 아니잖아, 이게 무슨 위력이야.’

니콜라 도팽이 쓸만하다고 한 빙점은 이 좁은 공간을 얼음 덩어리로 만들었다. 단파의 얼굴은 뭉개지다 못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가 마법을 외우지 못하게 얼굴을 주먹으로 계속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간단한 시동어라도 나왔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변수는 아주 많았다. 시온은 필사적으로 단파를 내려쳤었다.

‘이렇게 거리를 내주다니. 제대로 붙었으면 저 꼴이 된 건 나였겠지.’

아무리 운이 좋아도 제대로 단파와 붙어서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단파의 방심이 중요하게 작용을 했다. 설마 자신이 맞아 죽을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시온은 여전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친 듯이 내려친 탓에 주먹이 얼얼했다. 사람을 때려죽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후회가 있다기보다는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서로 목숨을 걸고 이 짓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극도의 불리한 패에서 패배가 확실히 되는 참에서 뒤집었는데 후회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시온은 단검을 꺼내 바닥에 한기에 떨면서 기절해가는 벨페르의 숨통을 끊었다. 이게 확실했다. 이제 추적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살려뒀다간 겨우 벌어낸 시간을 토해낼지도 몰랐다.

이렇게 두 명을 처리하고 나서 시온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빌어먹을 세상이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중세인 이곳만큼 이 속담이 어울리는 곳은 없을 것이었다. 현대에서는 이런 일이 터졌다고 해서 목숨을 내놔야 하는 일은 없는데 여기서는 뭐만 하면 비밀유지 때문에 목숨이 날아간다.

어쨌든 지금은 살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 두 명은 분명히 강자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법 저항 장비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기사가 이곳에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칼리 경이 한 건 해냈군.’

맛이 살짝 간 그 작자는 자신의 별칭값을 증명했고 덕분에 기사 세 명이 칼리에게 달려드느라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이 타고 온 영수는 이미 멀찌감치 도망가버렸다. 다행인 점은 패닉 상태인지라 산맥 정중앙으로 달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탈 수 있는 영수가 공격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단파는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더 높은 고리의 마법사여야 그런 육식형 영수를 길들일 수 있다.

“간 사람은 간 거고 확인 좀 해볼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시온은 재빨리 단파의 장비를 훑었다. 가져갈 수 있는 건 가져가야 하지 않겠는가. 마법을 방어해낸 것은 단파가 착용하고 있는 겉옷이었다.

영수의 털로 만들었는지 색깔이 윤기가 흐르는 검붉은 빛이 흘렀다. 문제가 있다면 왕의 가문 문장이 딱 하니 박혀 있다는 것이다.

‘일단 챙기자.’

염색 문제는 도시에 가서 어떻게든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지울 방법이 없으면 그곳에 염색을 부어버릴 수도 있고. 그리고 반지도 하나씩 뺐다.

총 세 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아공간 반지였다. 시온이 아공간 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단파 역시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고리가 세 개 정도만 되어도 거의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금화 주머니도 챙기고 나니 마법사에게서는 거의 빼낸 것 같았다. 아마 이 둘로 끝날 거 같진 않으니 시온은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벨페르에게서는 거의 얻을 게 없었다. 그의 안쪽 허리 대에 묶여 있던 작은 단약 말고는 말이다. 정확히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강화 단약으로 보이는 것이 허리춤에 몇 알 있었다.

나머지는 그냥 미늘 갑옷이었고 그마저도 땡땡 얼어붙어 있어 해체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애초에 가지고 갈 생각은 거의 없었다. 보관할 곳도 없었고 무게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가져간다고 해도 저것을 처분하려면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그나마 일반 장비에서는 그럴듯한 단검 하나를 챙겨 허리 대에 비집어 끼웠다.

‘어디다가 처리할까.’

이대로 시체를 내버려두기에는 금방 발각이 되고 영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시온은 이 둘의 시체를 몬스터와 짐승이 많은 곳에다가 유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들의 사체에 몬스터를 유혹할 수 있을 만한 푸른 액과 마나 약초를 짜내 이리저리 바르고 바위 더미에서 숲 쪽으로 최대한 끌고 갔다.

거기서 익숙한 표식 하나를 발견했다. 엑스자로 나무에 무언가가 표시를 해놓은 것이다. 일종의 영역표시였다. 정체불명의 뼈다귀 하나를 걸쳐 놓은 것이 분명히 트롤 이었다.

거인족과는 다르게 트롤은 적게나마 군소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사체를 놓는다면 몬스터의 습성상 마나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거처로 사체를 가져갈 것이었다.

‘흔적을 발견한다고 해도 트롤을 소탕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리겠지. 그동안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테고.’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온 것 같았다.

어쩌면 벌써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트롤은 코가 민감한 편이었으니까. 그곳을 재빠르게 벗어난 시온이 산맥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상적인 길로 갔다간 다른 병력을 만날지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이동한 시온은 이제 방향을 잡아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곳으로 돌아갈까?’

선택지야 몇 개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페레시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곳은 이제 전쟁터가 될 것 같았다. 만만하다면 끼어들 만하지만 딱 봐도 왕 쪽이 유리해 보였다.

어쩌면 벌써 공성전이 시작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중세의 공성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인내의 싸움이었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도시를 포위해서 들어가고 나가는 길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식량 보급을 막고 상대가 안에서 아사하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세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공성전이었다. 그것을 풀기 위해선 외부에서 지원 병력이 와야 했다. 위험한 길을 일부러 갈 필요는 없었다.

누구는 산맥을 돌아다니는 게 위험하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산맥은 위험했다. 하지만 시온은 혼자서 이곳을 통과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랫동안 오지에서 살았던 경험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페레 시와 연결된 에스테 시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었다. 에스테 시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인구는 보통의 자유도시에 비해 네 배에 육박했고 항구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인지라 물자 이동이 풍부했다.

그곳엔 향신료가 들어왔다. 후추를 다루고 있을 만큼 다양한 용병업체가 얽혀 있었고 일거리가 많았다. 다만 시온은 그곳보다 더 먼 곳에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페레시가 영지 전의 목표물이 되었다면 이곳 역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시온은 아직 이런 영지 전에 뛰어들기 전에 좀 더 장비와 기술을 완전하게 갖추고 싶었다.

그리고 단계도, 고리도 한 개의 연성 가지고는 불안했다. 비록 조금 전의 급한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언제까지 이런 요행이 있을 거라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쨌든 자유도시와는 이제 안녕이었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고 떠나겠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시온은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ㆍㆍㆍ

한참을 이동한 시온이 안전한 거처를 만들고 나서야 이제 아공간 반지를 볼 여유가 생겼다. 시온 자신의 것이 아닌 단파의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곳에서 잘만 벗어나게 된다면 생각보다 잘 풀렸다고 봐야 했다.

왕을 모시는 마법사답게 입고 있는 겉옷부터 영수의 가죽으로 만들어 마법의 내성이 깃들어 있었다. 빙점을 방어해냈으니 그 정도의 마법은 방어할 수 있다고 봐야 했다.

정확한 것은 감정을 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시온에 빠듯하게 금화를 벌어도 경매장에서 겨우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인 것은 확실했다.

반지도 세 개를 얻었는데 하나는 아공간 반지였고 나머지는 붉은 반지, 나머지 하나는 회백색 반지였다. 붉은 반지는 감정을 해봐야겠지만 회백색 반지의 용도는 상대의 정신을 혼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시온이 생각했던 그것이 맞았다. 관련된 것을 대장서의 서적에서 본 것이 기억이 났다. 이것 역시 정확한 사용방법은 가서 조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지만, 그냥 해도 작동은 할 것 같았다.

‘아마도 거기서 영핵을 그냥 내줬다면 나를 간단하게 포박해서 이것으로 정보를 캐려고 했겠군.’

사실 억울한 일이었다. 시온이 여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가치 있는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오와인이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이 강백의 반지로 고통을 받았을 것이었다.

저항력이 없고 재수가 없으면 아주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악독한 방법이었고 마법사 역시 나름의 명예와 도덕률이 있기에 흔히 선택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 이런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막혀 있었네.”

아공간 반지는 역시 시온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한참은 급이 좋아서 열리지 않았다. 즉 닫힌 금고였다. 하지만 여러 차례 반복하면 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시온은 하프 오우거와 영수가 다투었던 원인인 마나를 함유한 약초도 뿌리채 뽑아왔고 하프 오우거의 핵과 영수의 핵까지 다 가지고 있었다.

의도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와인이 선임 사냥꾼 직책을 맡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보관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을 전부 가지게 되는 게 된다.

금고에도 비슷한 것이 있을 터이니 니콜라 도팽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그것을 웃돌 정도의 보상을 얻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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