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304)

님프의 노래에 자리를 잡고 보니 이곳의 비용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오 개월 정도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는 모든 금화를 다 잃을 판이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겨우 머무르는 데에 큰 비용을 지급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크게 불만은 없었다. 공용 목욕탕도 써보고 싶었는데 지금 시온에게 절실한 건 정수로 강제로 늘려 놓은 뒤엉킨 마나를 최대한 고르게 풀어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위치 자체도 다른 곳보다 마나가 풍부해 훌륭했고 마시는 물까지 마나를 담고 있으니 급작스럽게 연성한 고리를 정비할 수가 있었다.

시온은 약간의 경계심도 느끼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마나 폭주라는 개념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단계 고리에서는 마나 폭주란 개념은 멀었지만, 중위 고리부터는 마나 폭주란 개념이 적용되었다.

심하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흠, 거기요. 낯선 마법사 분. 인사나 하죠?”

아린을 염색장이에게 보내놓고 어떤 대답을 가져오길 기다리는 와중 시온에게 낯선 여자가 말을 걸었다. 시온을 그곳을 보니 여자뿐만이 여러 명의 마법사가 있었다.

각자 자유분방한 모습이었고 딱히 귀족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시온은 이들이 자유 마법사라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 속하지 않은 자유 마법사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갖가지 이유에 의해 용병업을 주로 겸하는 마법사들이었다. 이들은 시온을 흥미롭게 보며 서로에게 속닥거렸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시온이 경계심을 놓지 않고 말했다. 자고로 쉬운 관계란 없다는 것이 시온의 사고방식이었다.

“저는 미아라고 합니다. 이쪽은 볼테르, 쟤는 빈디, 저 녀석은 메이거죠.”

미아는 귀여운 여자였다. 미아의 눈은 호기심으로 넘쳤다. 생전 처음 보는 타입의 마법사였고 그녀의 장비 감지 능력에 의하면 시온의 단계는 두 번째였다.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두 번째 고리를 달성했다면 굉장히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다.

“저는 시온 니벨룽입니다.”

“귀족이신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거의 인지도가 없는 편입니다. 집에서도 막내라 밖으로 몰렸고요.”

“저 역시 비슷합니다. 저는 메이거 풀입니다.”

남자가 대뜸 자기의 성을 완전히 내뱉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역시 상속권과는 거리가 먼 자식이거나 사생아쯤 될 것이었다.

시온은 이들과 잡담을 나눴다. 낯선 도시였고 친해질 이유가 있었다. 자유 용병은 자유 용병끼리 뭉치는 경향이 강했다. 어떤 소속이 없기에 쉽사리 불리한 일에 몰리기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어 보이면 이런 식으로 안면을 트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시온 님은 강체술이라도 배운 건가요?”

미아가 혀를 날름거리다가 시온의 몸을 감탄하듯이 보며 말했다. 강체술, 극히 알고 있는 자가 별로 없지만 실재하고 있는 마법이었다. 대략 신체를 마법으로 강화하는 그런 것이었다.

시온은 이것이 강체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이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아니요. 저희 가문은 대대로 기사 가문인 데다가 오지에서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어려운 단련을 해왔습니다.”

강체술이라, 시온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지금의 육체에 강체술이라는 것을 부여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아직은 그저 망상에 불과하지만 흥미로운 주제였다.

미아라는 여자는 시온에게 관심이 많았다. 시온은 이렇게 열렬하게 여자에게 관심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어쨌든 시온은 최대한 그녀의 여러 대답에 간단히 답변하며 이들의 대화에서 주변 정세의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펜부르크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한 편이었다.

“이곳의 영주 님은 열여덟 살이에요. 얼마 전에 성년식을 치른 자죠.”

이곳의 영주인 하이거 자링은 열여덟 살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이년 전에 아버지가 급사하고 급기야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했다.

이 거대한 도시를, 상속받은 것이었다.

‘후. 엄청나군.’

누군가는 평생을 노력해도 오지의 작은 영지도 차지하기 쉽지가 않지만,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곳은 이런 것이 현대보다도 극단적으로 심했다.

여기 있는 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이런 상속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권리 투쟁 속에서 소모되어 사라지거나 평생을 그 밑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제는 하이거 자링이 지금 병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자링이 깊은 병중에 있으니 가문의 계승권은 하이거 자링의 누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중세에서 큰 문제를 만들게 된다. 시온은 이 말을 듣자마자 금화가 출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일이 부족하진 않겠어.’

중세에서 여자가 계승자가 된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탐이 나는 영지를 노리고 상속권이 약한 여자 계승자를 처형한 뒤 펜부르크를 통째로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쉽게 될 리가 없었다. 고로 벌어지는 것이 영지전이었다.

‘이곳도 저곳도 영지전이군.’

중세란 곳이 이랬다. 남작은 남작대로 근처의 남작과 백작령을 건드렸고 백작은 백작대로 근처의 백작령을 건드리고, 공작은 공작대로, 왕은 왕대로, 황제는 황제대로.

세계의 경이,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의 탑이라는 곳도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뿐 실상은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늘리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매해 오십 년마다 벌어지는 황제에게 황위를 인정하는 것도 십삼 인의 대마법사들이었다. 이들은 다음 황제에게 황관을 씌어주면서 각종 이권과 이문을 받아내고야 만다.

‘뭐 나하곤 먼 얘기지만, 너무 먼 얘기도 아니지.’

시온이 눈을 빛냈다. 이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시온은 가문을 떠났고 더 높은 단계에 올라서고 좋은 작위를 받아 이 세계에서 두 발로 자립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가만히 가난한 니벨룽 영지에 있다가는 이번 생을 그대로 종 치게 될 것은 분명했으니까.

‘그나저나 왜 자꾸 더듬지.’

시온은 옆에 있는 미아가 자신의 허벅지와 팔을 은근히 만진다는 것을 알았다. 팔은 가끔 터치하는 정도이지만 허벅지는 꽤 노골적으로 만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루시 도팽급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시온은 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각자 젊고 나름의 야망과 자유로움이 있었다.

확실히 페레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학구적인 느낌보다는 각자 실속과 정세를 통해 어떻게든 권력의 빌붙어 보려는 냄새가 강하게 났다.

“그나저나 자유도시 쪽에서의 영지전은 없습니까?”

시온이 그렇게 말하자 다들 거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금방 화제가 바뀌었다. 그곳을 건너온 시온으로서는 그곳의 이야기가 급한 편이었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시작은 않았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듣고 싶었다.

“시온도 거기에 대한 정보를 들었군. 라레테저닛 가문에서 자유도시 하나를 공격할 예정인가 봐. 소문에는 도팽 가문의 협력을 얻었다는 얘기야. 이렇게 되면 라레테저닛 쪽이 유리해지니 중립적인 자들은 그쪽으로 엉겨 붙겠지.”

‘흠, 역시 그렇게 됐는가. 오와인 도팽을 포기하지 못하고 도팽 가문이 꼼짝을 못하게 됐나 보군.’

소문도 일부러 풀었을 것 같았다. 공격하는 쪽에서는 전혀 손해 볼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위축되는 것은 수비하는 쪽이다.

“그쪽으로 가서 일할 생각인가?”

“아니. 난 여기에 있을 거다.”

시온이 그렇게 말했다. 겨우 그곳의 위험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그곳에 들어가는 짓은 바보도 하지 않을 선택일 것이었다.

그때 아까 보냈던 아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온 마법사님. 염색장이를 구했어요.”

“그런가. 거기로 가지. 다음에 얘기를 나누도록 하자고 나는 할 일이 있어서.”

모두가 아쉬운 듯한 모양이었다. 특히 미아가 그랬다. 시온은 소녀를 따라서 염색장이의 공방으로 갔다.

ㆍㆍㆍ

펜부르크의 염색장이 공방은 꽤 솜씨가 있는 편이었다. 시온은 거미줄 같은 거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국의 도시답게 안은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듯이 무질서한 미로였다. 계획도시 같은 자유도시들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곳곳에 각종 길드와 그 길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거주지가 복잡하게 섞여 있었고 골목마다 잡다한 생필품을 파는 곳이 있는다든지 이런 형태였는데 곧 아린이 소개해준다는 넓적한 건물에 도착했다.

안에는 고래고래 대머리 남자 하나가 조수로 보이는 소년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제국의 도시답게 노예로 보이는 자도 꽤 많았다.

이들은 발목에 족쇄를 달고 있었고 노예의 문신을 하고 있었다. 노예들의 역할마다 문신은 달라진다. 가령 젊고 아름다운 여자 노예들은 눈물방울이 새겨지고는 했다.

“저자인가?”

“예. 조건에 맞는 사람입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아린이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제가 계속해서 시온님께 은화를 받을 것이니까요.”

시온은 점점 더 이 꼬마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 자 여기 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자가 내가 말한 조건에 흡족하다면 금화를 한 개 주마.”

시온이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이 자가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자인지 금화를 내고 그런 거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인지 말이다.

실력은 그렇게 필요하진 않았다. 무슨 고도의 가문 문장을 새겨넣는다거나 마법적인 메모라이즈 효과가 담긴 상형문자를 넣는 것이 아니었다.

“각라 아저씨. 여기 마법사님을 데려왔어요.”

각라라고 불린 대머리 남자는 꽤 살벌한 얼굴의 남자였다. 염색장이 정도가 아니라 무슨 한 범죄 했을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온의 모습을 슥 흘겨보더니 백팔십도 얼굴의 표정을 바꿔 빙긋 웃었다.

‘차라리 안 웃는 게 덜 무섭겠군.’

“어서 오시지요. 마법사 님. 저에게 맡길 특별한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나는 금화를 낼 수 있네. 자네가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금화지.”

“아,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한 치의 실수 없이 모시겠습니다.”

‘미친 마법사로군. 저런 근육은 기사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건가?’

시온은 그가 덤덤하게 자신을 안으로 들이고 있다고 느꼈으나 실제로는 그는 시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염색장이가 안내한 곳은 단출한 방이었다. 어딜 가도 염색에서 오는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 어차피 물건을 의뢰하러 온 것이니 잠깐만 있으면 됐다.

둘만 있게 되자 각라는 긴장했다. 그는 오랫동안 거친 생활을 했지만 시온에게서는 심상치 않은 위압이 있었다.

“한 가지 말해두지. 나는 자네 실력엔 관심이 없다. 나는 자네가 비밀을 지킬 수 있는지 궁금해.”

“물론입니다. 제 입은 대장장이의 신이 보증한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등불의 노인에게 맹세하겠습니다.”

“그런 맹세는 나한테 안 통해. 어떻게 비밀을 지킬 수 있지? 그게 마음에 들면 거래를 할 것이고 들지 않으면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야.”

‘여간내기가 아니군. 나이는 어린데 수라장을 겪었어. 분명하다.’

각라의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가 흘렀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이 맞았다고 생각을 했다. 자기가 여기서 잘못 말하게 된다면 여기서 자기를 간단히 살해하고 나갈 수도 있는 작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해였다.

“자 보십시오.”

“?”

그가 자신의 웃통을 벗더니 가슴을 보여줬다. 거기에 칼집이 여러 개 나 있었는데 그건 노예의 문신이었다.

“저는 도망 노예 출신입니다. 그리고 해당 가문은 저를 아직도 쫓고 있고요. 나머지는 뒤에 하겠습니다. 저는 제 비밀을 경께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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