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부르크(3)
각라는 긴장해서 시온을 바라봤다. 잔재주를 부릴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군. 거래하지.”
시온은 각라가 믿을 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믿을 수 있다고 말한 점은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도망 노예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는데 사형은 기본이었다. 해당 노예를 뙤약볕이 가득한 기둥에 묶어다가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천천히 죽이게 해서 모두에게 각인시키게 한다.
현대로서는 생각하기도 힘든 처벌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이런 형벌이 정말로 많았다. 그러니까 도망 노예라는 것은 한쪽이 신뢰를 저버리게 된다면 한쪽도 파멸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연 이게 비법이었군.’
“어떤 물건이십니까?”
시온은 아공간 반지에서 단파에게서 빼앗은 마법사의 겉옷을 꺼냈다. 윤기 있는 검붉은 빛과 흰색이 섞인 고급 소재였다. 영수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윤기가 났다.
이 생기가 도는 것의 비결이 마나가 흐른다는 것이었다. 마법 장비인 셈이다.
“이것은!”
각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심장이 뛰었다. 설마 했더니 방금 판단이 옳았다. 조금이라도 신뢰를 증명하는 방법이 어설펐다면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
“의뢰하고 싶은 것은 이 물건이야. 여기에 있는 문장을 지웠으면 한다. 가능하겠나.”
“가능···. 합니다. 아니, 가능해야죠. 그런데 이것은 라레테저닛 가문의 문장이 아닙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시온을 보며 말했다. 시온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이미 준비해 두고 온 상황이었다. 마치 뒤에 세력을 끼고 있는 것처럼 이 염색장이에게 말할 셈이었다.
물론 그런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맞다. 하지만 네가 더 알게 되는 건 쓸데없는 짓이야. 네가 해야 할 것은 이것을 지워서 나에게 금화를 받고 서로서로 비밀을 지켜나가는 편이 좋다는 거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신중하게 물건을 봤다.
‘라레테저넷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 이 남자는 분명히······. 물건의 상태를 보아 살해한 지 얼마 되지 않았군. 집중해라. 집중해.’
“물론입니다. 아마 이 물건이 필요하신 높은 분이 따로 있으신가 보군요.”
그가 넌지시 짚어서 물었다. 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알겠습니다.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물건이 완료되면 직접 찾아가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지우고 어떤 문장을 박으시겠습니까?”
“반지 세 개.”
ㆍㆍㆍ
단파의 겉옷은 질이 좋은 물건이었고 저것을 입게 되면 이제 누군가에게 마법사가 아니라고 오해받을 리는 없을 것이었다.
시온은 배정받은 거처에 들어가자마자 간단한 전격 마법을 설치했다. 입구에 설치한 것은 아니고 안쪽에 놓은 물건 쪽에 설치를 해놓았다.
예전엔 이런 간단한 설치 마법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산맥을 넘으면서 수도 없이 반복하는 터에 이제 잠깐이면 충분했다.
오히려 지금 이 수준이 너무 아쉬웠다. 설치 마법은 복합적인 것도 있었고 진짜로 쓸만한 것은 몬스터를 사냥할 때처럼 쓰이는 대형 덫처럼 마법적인 함정 같은 특별한 필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마법사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 왔지만, 고급 설치 마법은 철저히 비밀이나 값비싼 매물로 겨우겨우 나오는 수준이었다.
이 수준도 넘어가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사람에게 일인 전승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정도로 마법사에게나 갖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권력자에게 중요한 마법사들이었다.
‘그나저나 진짜로 좋은 방이군.’
방은 넓다기보다는 정말로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뜻밖에 좋은 자리가 나와서 넓은 창문에 보이는 전경이 좋아서 아무리 봐도 이곳의 목적은 역시 휴양지 같은 것이 맞는다고 보는 게 좋았다.
술 냄새가 나지 않고 축축한 냄새도 없고 무엇보다도 옆방에서 창녀랑 노는 용병 놈들의 후끈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서 좋았다.
시온은 아공간 반지에서 고렘 제작법에 관한 서적을 꺼냈다. 이건 가치가 높은 서적이었다. 고렘이라는 것은 나 말고 다른 분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고 마법사같이 체력이 약한 자들에게는 위험한 일을 대신시킬 수도 있었다.
“역시 재료가 많이 드는군. 그리고 다른 속성도 있어야 하고.”
형태를 빚어야 했고 구동할 수 있는 핵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에 대한 여부도 별개였다. 하지만 시온은 시간을 두고 이것을 배울 생각이었다.
영수를 길들이는 서적도 꺼냈다. 이것도 꽤 가격이 나갈 것 같았다. 대충 머리에 집어넣고 본서는 경매장에 내놓을 물건으로 잡았다.
중급으로 추측되는 미완성 영약도 꺼냈다. 이것은 정수가 불안전한 상태였다. 시온은 이것이 영수의 핵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얼추 들고 있었다.
영수의 핵은 쓸데가 많았다. 그대로 누군가와 다른 마법서나 장비로 교환할 수 있었고 그냥 금화로 바꿔버릴 수도 있었고 제작에도 쓰이고 심지어 고렘의 핵의 재료로도 쓰였다.
‘이것은 보류해두자.’
어느 정도 잡다한 물건을 훑어보고는 시온은 가장 급선무의 문제를 떠올렸다. 현재 두 번째 고리를 연성했지만, 이것이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새로 얻은 마나 수련법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브림의 마나 수련법을 버리고 드디어 제대로 된 수련법인 시브의 수련법을 얻어냈다.
이 시브의 수련법을 습득하면서 이것으로 불안정한 마나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ㆍㆍㆍ
이 거대한 대륙은 하나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 지배하는 곳마다 특징과 문화가 은근히 달랐다. 왕이 다스리는 도시들은 왕의 특색이 묻어있고 마법사들이 다스리는 도시들은 마법사의 특색이 묻어있다.
제국 즉 황제가 다스리는 도시들은 그에 따른 특색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공용 목욕탕이었다. 이 공용 목욕탕은 일단 거대했다. 사치스럽고 이곳에서 정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온갖 시설이 다 들러붙어 있어서 단순한 목욕탕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놀랍군.”
시온은 이곳에서 운영하는 목욕탕에 발을 디뎠다. 제국이 운영하는 곳은 좀 더 중심부에 있지만, 이곳은 특수 목적으로 제작된 곳으로 그 규모 면에서는 좀 작았지만 시온이 봤을 때 신기할 정도였다.
어떤 구조인지는 몰랐지만 뜨끈한 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시온은 이곳의 값이 나갔던 이유를 실제로 체감하고 있었다.
보통 물이 아니라 마나를 담고 있는 마나수였던 것이다. 푸른 액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지하수 같은 것이 나오는데 거기에 마나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거대한 탕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곳의 목욕이라는 것은 그저 몸을 담그고 있다가 나오는 수준이었다.
공용이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다. 각자 최소한의 간소한 가리개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이곳을 이용했다. 시온 역시 이곳에서 준 복장을 간단하게 입었다.
‘내 몸이지만 말도 안 되게 단련이 돼 있군.’
시온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부쩍부쩍 놀라는 이유에 대해서 깨닫고 있었다. 원래 니벨룽 영지에서 나왔을 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기사 수준으로 단련했다 싶을 정도였는데 꾸준히 푸른 액을 소량씩 복용하다 보니 어느새 한술 더 뜨는 피지컬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시온의 생각에 산맥을 넘어오면서 과다한 움직임으로 오와인의 원정에 낄 때보다도 몸이 좋아진 것 같았다.
사람은 곳곳에서 토론하거나 잡담을 하거나 각종 놀이를 하고 있었다. 마사지를 받는 자도 있었고 체스를 하는 자도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열정적으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한쪽 끝에서 토론하는 무리였다. 아무래도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권력에 얽혀 있었다.
영지 전이 벌어진다는 것은 위험이자 큰 기회였다. 자유마법사에게는 당연히 큰 기회였고 누군가에게 속해있는 마법사들도 더 나은 영주를 찾아낼 기회이기도 했다.
마법사들도 기사들처럼 업적 같은 것이 남았다. 조금이라도 좋은 역할을 해서 이력을 남기는 것이다. 물론 기사들처럼 극단적으로 결투를 벌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기사에 대한 얘기는 흥미진진한 것이 많았다. 심지어 이들은 전쟁터에서도 일대일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마 했지만, 칼리 경을 상대하겠다고 나온 상대 기사를 보고 나서야 거짓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
“누구지?”
“기사인가?”
수증기가 걷어지는 곳에 도착하자 시온을 본 사람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어지간하면 겸손하고 부족하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는 시온도 방금 감탄할 정도였는데 말라비틀어진 사람들만 보던 자들이 시온을 보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는 뻔했다.
엄청나게 신기하고 경악하는 것이다.
‘그나마 못생겨서 다행이군. 주목받는 건 불편하고 위험하니까.’
시온은 자기의 외모가 여기에서 평균 이하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애초에 니벨룽 가문에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장남은 시온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는데 거기에 극히 불균형한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온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이런 것은 현대보다는 낫군.’
아무래도 이곳이 금화가 꽤 드는 장소인 덕에 젊은 자들이 많았는데 여자들도 거의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는 탓에 눈요기를 실컷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기도 여자들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지 그 작은 부위를 가리는 간소한 옷차림에도 온갖 돈을 쓴 것 같은 디자인들이 많았다.
어쨌든 시온은 안에 들어가서 시브의 수련법을 슬슬 적용했다. 여기 있는 마나는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시온은 엉켜있던 마나들이 조금씩 제자리로 가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새로운 시브 수련법에 대해서 미숙한 점을 반복을 해 나갔다.
‘한 일주일이나 보름이면 완벽해지겠군.’
단파가 들으면 경악할 소리였다. 시브의 수련법은 그렇게 빨리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익힐 수 있는 원동력은 역시나 시브의 수련법이 적인 마법서를 구성하고 있는 고대어가 현대어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해석에 실수가 있을 수가 없었다. 실제 수련 마법사의 입장에서는 고대어가 미숙할 수밖에 없고 숙련된 자들도 고대어가 미숙한 판이어서 엄청난 오류가 많아 먼저 배운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했다.
시온 급의 평범한 마법사를 데려다 놨으면 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을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로 각을 보고 있다는 것은 시온이 비록 자질이 쓰레기였지만 엄청난 혜택을 받고 있다는 점을 뜻했다.
“시온?”
시온이 감았던 눈을 떴다. 반대쪽에서 무리가 보였다. 이미 말을 놓고 친해졌었던 자유마법사 무리였다. 그 무리에는 사람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