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부르크(8)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네요.”
마리 자링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리 자링은 시온이 도팽 가문의 일을 맡았다는 것에 주목했다. 도팽 가문의 일을 맡았다는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답을 받아놓고 넘어가려는 것이다.
“물어보십시오.”
“도팽 가문에 속해 있던 게 사실인가요? 그들과 얼마나 깊은 친분이 있죠? 단순한 관계인지 알고 싶네요.”
그녀가 시온의 출신에 대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시온을 소개받을 때 했던 시온의 배경엔 도팽 가문의 일을 맡았던 자유마법사라는 이력이 있었다.
시온은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는 것이 앞으로의 일을 결정지으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시온은 자링 가문이 제국의 봉신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투는 마치 도팽 가문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가벼워 보이는 뉘앙스였지만 거기에 묻어 있는 경계심을 시온은 읽은 것이었다.
‘분명히 도팽 가문과 문제가 있다. 내가 알기로 자링 가문은 도팽 가문과 별 관련이 없을 것인데.’
적어도 자링 가문의 차녀인 그녀는 관련이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시온은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도팽 가문과 관계를 회복하려면 영수의 핵과 고농도 희귀 약초를 돌려주든지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고 돌아가기에는 공성전에 들어간 터라 너무 위험했다.
“도팽 가문은 저번 계약자일 뿐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냥 단순히 계약을 맺었던 사이란 말이죠.”
“맞습니다. 페레시에서 수련 마법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경력을 쌓으려면 도팽 가문과 페라라 가문과 맺는 게 제일이죠.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시온은 한치의 스스럼 없음을 연기하며 그녀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이런 자세가 조금 더 의심을 사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라레테저닛이 자유 도시를 공격할 거에요. 자링 가문은 라레테저닛을 지원할 거고요. 그러니 도팽 가에서 왔다면 원래는 계약을 맺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미아랑 만나는 사람이니 해드리는 거에요.”
“?!”
제국의 봉신인데 왕가인 라레테저닛의 확장을 지원한다니 시온은 뜻밖의 대답을 그녀에게서 얻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미아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었다. 미아와는 강제 교제가 되어 있기에 고용주인 그녀가 시온을 안전한 사람으로 판단한 것이다.
‘앞으로 말을 조심해야겠군. 라레테저닛이라니.’
시온은 이곳으로 도주하면서 라레테저닛의 마법사인 단파와 준기사 하나를 죽였다. 서로 목숨을 놓고 대결한 것이니 공평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의 여파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야.’
그녀는 시온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미아의 약간에 거짓말이 섞여 시온은 기사 서임과 마법사의 자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발전 가능성이 큰 인재라고 소개가 된 것이었다.
시온에 대한 첫인상은 좋은 편이긴 했으나 시온의 외모가 가져오는 둔해 보일 것 같다는 편견을 방금 확실하게 끝을 낸 것이었다.
‘머리를 굴릴 줄 알아. 즉 전투적으로도 마법사로도 그리고 관리로서도 재능이 있다는 뜻이지.’
고작 해봐야 고리가 두 개인 소속도 없는 마법사가 도팽 가문과 깊게 연결이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시온이 대체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일단은 하이거에 대한 보호에 참여하세요.”
ㆍㆍㆍ
하이거 자링, 소문의 인물을 시온은 드디어 보게 되었다. 펜부르크의 젊은 영주이자 자링 가문의 계승자, 보통의 사람과는 궤를 달리하는 운명을 타고난 운세.
“건강하신 분이네요.”
그가 시온을 보자마자 한 단어는 이것이었다. 건강하다. 아니 지나치게 건강하다. 하이거 자링은 열여덟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병약했다.
‘이미 누가 독을 타고 있는 게 아닌가?’
시온은 하이거의 얼굴을 보자마자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중세란 곳은 갖가지 방법으로 계승자들을 암살시키는 곳이었다.
보통 사람과 궤를 달리하는 천운으로 대부분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손쉽게 가지게 된다고 해도 그런 인간이 약하게 보인다면 꼼짝없이 눈뜨고 살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비정한 행동도 모든 게 펜부르크라는 보상으로 합리화가 된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펜부르크를 받았듯이 그의 죽음으로 이 거대한 유산이 다른 자에게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중세란 곳의 귀족 시스템이었다.
‘안타깝군.’
시온은 정말로 하이거 자링에게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시온의 의술은 아직 미천한 수준이었다. 현대의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이 인물을 정밀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다만 추측을 할 뿐이었다.
‘유전병이 있을 수도 있고.’
정말로 명 짧은 운세를 타고났을 수도 있었다. 현대와는 다르게 이곳은 사촌과의 결혼도 흔한 일 중 하나였다. 귀족에게 한에서이지만 가문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가까운 사람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었다.
그러니 유전병이 많은 편이었고 심하면 이렇게 유년기에 죽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평민보다도 명이 짧은 것이다. 이곳은 유전병이란 개념 자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과찬입니다.”
“시온 경이 맞지요? 기사 서임을 받으셨다고 들으셨어요. 그리고 마법사이시고도 하고요.”
그것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시온은 기사 서임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미아가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런 식으로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하루살이 같은 데다가 시온은 가지고 있는 명성도 명예도 없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막상 하이거를 보고 나니 이 불쌍한 소년에게는 이쪽이 더 마음을 편히 가질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저한테 그 지나친 건강을 조금이라도 주셨으면 하네요. 저는 시온 경이 정말 좋습니다. 저한테 딱 필요한 인물인 것 같아요. 생기가 넘쳐 보이고, 정말 부러워요. 그런데 어느 쪽이 주력이시죠?”
“마법사입니다. 저는 니벨룽 가문의 막내인지라 기사의 길보다는 마법사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군요. 그 나이에 그런 경지를 이루기 위해선 정말 혹독한 노력이 필요하겠죠. 존경스럽네요!”
“존경까지야. 그런 말씀은 삼가셔야 합니다. 영주의 권위에 해가 됩니다.”
하이거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얘기는 듣기에만 좋지 괜히 하이거에게 맹세한 기사들이 들으면 질투심만 유발하게 된다.
시온은 하이거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해나갔다. 임무를 맡은 이상 하이거의 빠른 죽음은 문제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좋은 사람이다. 살아날 수만 있다면 좋은 영주가 되겠지.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만만치 않아.’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은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하이거 자링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흘렀다. 좋은 영주가 되면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로 큰 행복이다.
질이 좋지 않은 영주에게는 강제 노동과 높은 세금 그리고 아들을 전쟁에 바쳐야 했다.
당장에 시온이 계약한 마리 자링만 해도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부쩍 흘렀다. 얼굴도 유약한 하이거와는 달리 강한 인상이었고 계약 내내 시험을 받는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곳의 인원에 용병을 섞으려는 이유가 기사를 잃게 하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하이거가 죽었을 때의 책임을 용병에게 분산시키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기사에게 있어선 영주의 죽음은 용병과 비교도 안 되는 치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자링 가문에서 지키고자 하는 기사라면 응당 이런 식으로 그들의 이미지를 보호해줘야 했다.
이렇게 되면 미아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졌다. 미아와 마리 자링이 그녀에게서 들은 것처럼 오랜 친구 사이라면 분명 미아를 위해서라도 시온에게 책임을 지운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아의 가슴과 알몸이 생각이 나자 갑자기 혈기가 올라왔다. 평소에는 억제하는 편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 이유에 대해선 시온은 아직도 몰랐다.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서도 같이 보낸 시간에 비교하자면 너무 빨랐다.
‘밤에 좀 더 힘을 내자.’
결론을 내자면 그렇게 된다. 적어도 어제 일을 생각해보면 미아는 굉장히 만족한 것 같았으니까.
ㆍㆍㆍ
시온은 이제 작은 물체 대신에 두꺼운 나무토막들을 세워놓고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연습하고 있었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의 기본은 봉쇄였다.
거미줄 같은 가상의 염동막을 은밀히 치는 것이다. 마나 감지 장비가 없다면 꼼짝없이 걸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은밀함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이미터가 넘는 나무토막들에 염동력을 치다가 두 번째 세 번째로 넘어간다. 이것들은 좌우 방향과 아래 방향을 향해 무게를 달아주는 것이었다.
그런 무게를 달아주게 되면 대상자들은 그쪽의 무게를 이겨내면서 움직여야 했다.
시온은 여기까지 오게 된다면 왼쪽에다가 만 무게를 걸어놔도 대부분 용병은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파훼하고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다른 마법은 살상력이 있지만 염동력은 그런 부분이 적다. 대신에 제압하는 데에는 다른 마법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하고 마나 소모가 탄환 마법에 비해서 적었다.
나무토막이 오른쪽으로 넘어가려다가 왼쪽으로 기울다가 다시 곧추섰다. 시온이 양쪽 방향에 균일한 무게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아래 방향에 좀 기울어지게 염력을 넣자 나무토막이 그대로 나뒹굴어 버렸다.
“흠 무게를 더 올리든지 아니면 이제 사람 상대로 연습을 해봐야 할 것 같군.”
사람 상대가 가장 좋을 것이었다. 시온은 그런 사람을 자유마법사 무리에서 구할 생각이었다.
상대의 마법을 견식 하는 건 마법사들끼리 선호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해주는 편이 아니었지만, 현재 시온은 이 자유마법사들의 선망 대상이었다.
시온이 제안한다면 아마 이 이상도 해줄 것이었다. 미아와 메이거 풀을 이은 세 번째 리더, 그게 시온이 지금 가지고 있는 위치였다.
하이거 자링을 만나고 온 이후로는 빼도 박도 못하고 시온에게 의견을 물어올 정도였다. 미아와 교제하는 것도 이제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미아의 얼굴, 특히 몸매가 괜찮았기 때문에 많은 남자가 안타까워했지만 시온이 하이거 자링을 만나고 오고 나서는 그런 불만도 쏙 들어갔다.
오로지 불만을 품고 있는 건 메이거 풀이었다. 메이거 풀과의 관계는 좀 안 좋아졌다. 그런데 시온의 예상과는 다르게 메이거는 평소와 다름없이 시온을 대하려고 노력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선한 사람을 두 명을 보게 되었다. 한 명은 메이거였고 다른 하나는 하이거 자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