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304)

이중계약(1)

“대금에 대해서 상의하러 왔다.”

시온이 찾은 곳은 자링 가문의 재정관이었다. 남자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아예 몸에 밴 것이었다.

“시온 니벨룽 님이시군요. 마리 님께 들었습니다.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금에 대해선 저와 협의를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시온은 금화보다는 자링 가문의 금고에서 물건을 받을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금화 대신에 마법 장비나 기타 여러 가지 물건으로 대신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말이었다.

가능하냐는 시온의 질문에 그가 답했다.

“물론, 가능합니다. 하지만 보통 금화로 받고자 합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정하고자 한다. 경매장을 다녀봤지만, 물건이 워낙 들쑥날쑥하고 원하는 것이 없어서.”

원래라면 이러한 혜택은 일어나지 않지만 시온이 마리 자링을 통해 하이거 자링의 보호에 투입되는 계약을 맺었다.

즉 누가 봐도 시온은 보통 계약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소문에 마법사이자 기사라고 하더니 틀림이 없구나. 저런 자를 본 적이 없는데. 게다가 요구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얕잡아 봤다가는 뭔가 일이 생기겠군.’

웃는 얼굴로 시온을 평가한 남자는 시온이 요구한 것에 제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엇을 고를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그는 시온의 편의에 맞춰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내 대금에 맞는 수준의 약초나 재료 계열로 봤으면 하는데.”

그가 놀라서 되물었다.

“장비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재료 말입니까?”

“그렇지. 전체를 훑어본다는 것은 민감한 문제이니 내 급에 맞는 재료 정도만 보고 내가 찾는 게 있는지 보고 싶은데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완제품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고가의 재료와 결합할 수 있는 재료를 찾고 싶었다. 가능하다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나오게끔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의외로 답이 간단하게 나왔다.

‘생각보다 마리 자링의 위치가 상당한가 보군.’

시온은 그렇게 생각을 맺고 잠시 자리에 앉아서 남자가 하는 것을 기다렸다. 남자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곧 무언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이것이 재료의 목록입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저랑 논의를 거쳐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그가 준 것은 자링 가문이 보유한 물건에 대한 간략한 대목이 적혀 있는 책자였다. 역시 펜부르크를 소유한 가문답게 이런 것이 따로 있는 것이었다.

“고대어로군.”

“그렇습니다. 제국은 예로부터 모든 장부는 이런 식으로 기재가 됩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사람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찾으시는 것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아는 것이라면 답해드리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 나는 고대어에 능통하다.”

제국의 모든 공공문서는 고대어로 작성이 되곤 했다. 그래서 제국의 관리가 되려면 고대어를 잘해야 했다. 어려운 지식을 녹여 넣은 마법서 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었다.

시온은 빠르게 책자를 넘기면서 재료의 목록과 간단한 그림을 넘기기 시작했다. 시온이 대조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최우선적인 것은 당연히 금박의 정수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다.

그것이 있을지 없을지를 보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장부를 털어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장비였다면 등급이 나뉘어 볼 수 있는 재물장부가 정해져 있었지만, 재료는 아무래도 따로 기술자를 고용해야 하고 의뢰비도 많이 들고 여러 가지 이유로 쉽사리 열람할 수 있었다.

그런 시온의 모습은 마치 전광석화 같아서 앞에 있는 남자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그림만 보고 넘기는 건가?’

마법사라고 감안을 해도 넘기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미 밖에다가 일을 맡길 사람을 대동시키고 있었는데 이런 귀족은 처음 봤다.

보통은 자존심에 장부를 들춰봤다가 그 어려움에 단번에 포기하고 그에게 간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온은 얇은 책자를 삼 분의 이쯤 훑다가 그리고 찾아냈다.

‘있다. 붉은 호박 수목’

붉은 호박 수목은 금박의 정수에 중요한 재료였다. 나머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이게 필요했으니까. 문제는 딱 봐도 받아야 할 금화 이상의 가치가 있어 보였다.

“이것으로 하고 싶다만.”

시온이 남자에게 말하자 그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이건 어렵습니다. 물론 자링 가문이 이것을 보유한 시기는 꽤 됩니다만 희귀 수목인지라 제가 확답을 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는 조심히 시온에게 말했다. 그의 뜻은 따로 마리 자링이나 하이거 자링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가? 그럼 마리 자링 님을 만나봐야겠군. 약속을 잡아주게.”

ㆍㆍㆍ

“이걸 원한다고?”

마리 자링이 황당한 듯이 시온을 봤다. 그것도 그런 것이 시온이 달라고 한 것은 그냥 희귀 재료일 뿐이었다.

“예. 붉은 호박 수목을 얻고 싶습니다.”

이것을 대금 대신에 넣어주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희귀 수목인지라 값이 비싸게 나갔다. 만약에 이걸 되판다고 하면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대금 이상은 반드시 받아낼 수 있었다.

“이걸 다른 곳에서 되팔 생각인 건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제작에 좀 쓰고 싶습니다. 제작하는 법을 알아서요.”

“제작할 줄 안다고.”

그녀가 믿지 못하는 얼굴로 봤다. 그도 그럴 게 제작도 할 줄 안다고 한다면 나이에 비해서 지나치게 재주가 많은 것이었다.

‘애초에 기사와 마법사를 겸임한다는 자도 처음 봤지.’

그녀는 곧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여기에 뭐 한가지 정도를 더 얹힌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닐 것이다.

“잘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기초적인 수준입니다.”

“솔직히 이걸 왜 원하는지 모르겠어. 사실 이 물건은 아버지 때에 들어온 물건인데 워낙 쓸데가 없어서 박아두고 있던 거지.”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줄 수는 없지.”

시온은 그녀의 얼굴에서 긍정적인 기색을 읽고 표정이 풀어졌다. 거래를 아예 안 해 준다고 하면 이걸 얻기 위해서 적어도 해당 금액을 모아서 자신에게 팔게 할 권리를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볼 참이었다.

‘붉은 호박 수목이라면 이렇게 거래가 나올 줄 알았지.’

금박의 정수 자체가 녹 반지의 숨겨져 있던 정보에서 읽어낸 것이었다.

즉 기술적으로는 실전된 방식들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에 붉은 호박 수목이 희귀하다고 해도 막상 이것을 이용한 제작용품은 거의 없거나 필요 없는 것밖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온에게는 달랐다.

“한 가지 일을 따로 참여해주고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이것을 줄게.”

“.........”

“사람을 한 명 잡아올 수 있어?”

대뜸 그녀가 도발적으로 던진 제안은 뭔가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시온은 즉시 이것이 그녀가 또 다른 시험을 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아와 교제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법이었고 이곳의 혼란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자기 사람인지 확실히 하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봤을 때 지금 이곳은 세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다.’

시온은 펜부르크의 권력을 나눠 가지고 있는 세 부류에 대해서 분석을 마친 상황이었다. 첫 번째는 순수하게 전 영주의 뜻을 이어받고 있는 하이거 자링 파였고, 나머지는 장녀와 차녀의 파였다.

차녀의 파가 있다는 점은 이곳에 와서 그녀와 계약을 맺고 몇 가지 조치를 보고 눈치챘다. 장녀와 차녀의 세력은 갈라져 있는 것이었다.

‘일단은 들어나 보자고.’

“제 분수에 맞는다면 못할 건 없습니다.”

원하는 재료는 그녀가 가지고 있고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그녀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 하지만 듣게 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내 사람이 되는 거야. 만약에 그게 싫다면 얌전히 금화나 받아.”

기회가 있는데 안 잡는다는 것은 안될 말이다.

“듣겠습니다.”

“사실 지금 자링 가문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거 알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떤 소식을 하나 들었는데 하이거 자링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는 기사가 있다고 말이야.”

“?”

“엔클리 경을 잡아올 수 있어? 그가 있는 곳의 정보는 내가 알려줄 수 있고. 그리고 이 일에는 네가 적임으로 보여.”

그녀는 흥미로운 얼굴로 시온을 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시온을 탐내고 있었다. 시온을 완전히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유능해 보이고 재능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엔클리 경?’

시온은 바로 해당 인물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었다. 시온이 하이거 자링의 보호에 들어가자 대뜸 면전에서 화를 낸 기사였다.

욕설까지 퍼부었다. 기사가 마법사를 한다는 것에 수치나 질투를 느낀 모양이었다. 게다가 시온이 가담한 것은 자유기사나 자유마법사로서 용병이나 다름없이 들어온 것이었기에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시온은 그 말을 정정해주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기사든 마법사든 용병이든 귀족이든 왕이든 황제든 이기는 쪽에 뭉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엔클리 경이 왜 필요하지요.”

“하겠다는 거야?”

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뭐긴 뭐야 엔클리 경이 자링 가문을 배신할 것 같으니까 잡아오라는 거지. 물론 이 일은 비밀에 부쳐야 해. 미아에게도. 너와 나만 알아야 하는 거지. 가능하겠어?”

시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의중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이곳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다. 좋은 이력을 남긴다는 것은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이기는 쪽에서 계약을 따내야 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그것을 이기게끔 만들어 주거나.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이 이상의 일도 맡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번 자링 가문과의 계약이 지속하는 동안 굉장한 이득을 계속 챙겨나갈 수 있었다.

급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

그녀가 시온을 적임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는 합리적이었다. 엔클리의 실력은 그래도 기사였다.

그러니 그 무력이 쉽지 않은 대상이었고 만약에라도 일이 터지게 된다면 자유마법사이니 그녀로서도 부담이 없었다.

“좋습니다. 엔클리 경이 그런 불온한 모습을 보인다면 하이거 님을 보호해야 하는 계약을 맺은 저로서는 당연히 거들어야 할 일이지요. 다만 이 일에 대해서 믿을 만한 구석을 더 주셔야겠는데요.”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번져갔다. 시온이 말하는 당당함에 그녀는 시온이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내가 간단한 증서를 하나 써줄게. 내 친필이야. 그 정도면 되겠지?”

“충분합니다.”

‘엔클리 경이라. 영 인성도 행실도 안 좋은 인간이지만 하이거를 모시는 직속 기사인데 말이지. 그러면 그 자식이 독을 타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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