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계약(2)
‘보통 사람은 아니다.’
시온은 마리 자링을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엔클리 경을 잡아오라는 것은 복잡한 이면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다른 대처를 취해야 했다.
도청 마법이 있거나 관련된 자가 있다면 따로 방법을 써서라도 정보를 좀 더 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감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온은 이곳에 와서 이런 육감 같은 것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저번의 도팽 가문의 원정 때에도 뭔가 이상한 것이 있었기에 미리 준비할 수 있었고 덕분에 손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안 좋은 느낌보다는 다른 느낌이 돌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안 좋은 예감이 들더니 이렇게 도박 수로 가득 찬 상황에서는 예감이 좋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증서를 받아온 시온은 그것을 탁자 위에 놓고 생각에 잠겼다. 이 증서에 대한 것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만약에 그녀가 수작을 부린다면 이것으로 분위기 전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마리와 시온만 공유하는 것이기에 이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미아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온은 아공간 반지에서 몇 가지 강화 단약을 챙겼다. 신체 강화 단약 이었는데 급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단파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이것을 먹으면 십분 정도 도핑 상태에 빠지게 된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올려놓는 편이 좋겠지.”
마리 자링의 발언에 따르면 엔클리 경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에서 만나게 될 것이나 그래도 그가 기사란 점은 변함이 없었다.
기사라는 것은 보통 녀석들이 아니다. 온종일 사람 죽이는 법만 연구하는 녀석들인데 본능적인 발악이 대단할 것이었다. 몸에 배어서 자동으로 움직일 정도의 반사신경 탑재는 기본이었다.
시온은 현재 마리가 보내기로 한 부하를 만나기 위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부하가 시온과 합을 맞출 것이었다. 약속 시각이 되자 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약과 마나의 준비상태, 마법 반지 두 개, 뭉툭한 마나 스태프, 잘 버린 단검 한 자루, 아라크네의 마법서를 점검했다.
ㆍㆍㆍ
안면이 있는 남자가 시온을 향해 왔다.
“시온 경. 저를 따라오십시오.”
말을 건 남자는 안면이 있었다. 두세 명이 함께할 수도 있다더니 참여한 것은 자링 가문의 기사였다. 분명히 저번에 인사했을 때 간단하게 인사한 기억이 났다.
그러나 자세한 얘기는 돌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따라서 간 곳은 작은 창고였다. 아무것도 없는 그 안에는 다른 한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이자는 용병이었다.
‘자유기사 하나, 기사 하나, 용병 하나라.’
용병의 수준은 상당히 높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역시 단번에 시온을 주의 깊게 봤다.
마법사라는 것도 그리고 시온이 입고 있는 겉옷이 마법을 방어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챈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단파의 겉옷은 품질이 좋아서 시온의 능력을 포장하기에 좋았다.
“이제 소개를 조금 할까요.”
“셋이서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번에 저하고는 인사를 했지요.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만.”
어레이 경이 시온에게 말했다. 어레이 경은 기사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뛰어난 자는 아닌 평균 정도 하는 자였다. 상임 기사로 활약할 수가 없는 그런 실력과 경력.
“저분은?”
시온이 말하자 그가 답했다.
“킬번이요. 은패 용병이요.”
말은 그렇게 했는데 시온은 그가 은패 이상의 실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패 치고는 장비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었다.
킬번은 시온을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여러 사람을 겪은 킬번에게도 시온은 특이했고 무엇보다도 만만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귀족 여식께서 이번 일에 신경을 좀 쓰셨군.’
킬번에게 있어서 시온은 든든한 자였다. 어레이 경은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에 반면에 시온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레이 보다 낫다고 판단이 됐다.
“자 모였으니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엔클리 경을 저희 셋이서 포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온이 기대하던 자세한 작전은 없었다. 어레이는 습격해야 할 위치와 대략의 추상적인 부분만 얘기했을 뿐 지극히 단순한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게 끝입니까?”
“끝입니다. 일행이 둘이든 다섯이든 엔클리 제외하고는 모두 베어도 됩니다.”
“아니요. 조력자나 그런 것은.”
“술에 무언가를 타긴 탔을 거요.”
결국, 그 정도밖에는 없다는 이야기가 됐다. 시온의 안색이 굳어졌다. 말을 보아하니 어레이는 엔클리에게 결투를 걸 셈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투를 할 셈이시고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더 필요하죠. 저희는 지금 정정당당하게 그곳에서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비밀이고 그렇기에 속전속결이 되어야 하죠. 결투는 무슨 세 명이 다 달려들어서 단번에 다치게 해야 합니다.”
킬번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똑같은 기사라더니 시온 경은 저 바보와 완전히 다르군요.”
“바···보? 지금 그거 날 보고 하는 소린가?”
“그러면 이것이 무투 대회인 줄 아쇼? 이건 들키면 안 될 일이오. 만약에 그곳에서 걸려서 잡히면 어떤 일을 당할 것 같소?”
어레이의 얼굴이 그제야 붉어졌다. 그가 소중히 하는 명예는 완전히 땅에 떨어질 것이었다. 뭐가 됐든 기습을 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으니까.
“하지만 놈은 배신자요. 모시는 자의 정보를 팔고 있다니.”
시온이 껴들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죠. 그래서 어떻게 이곳에 끼어든 겁니까?”
시온이 알기로 어레이 경과 엔클리 경은 안면이 있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이거 님을 어떻게 하려고 한다는데 그런 놈인 줄 알았다면 당장 결투를 걸었을 겁니다. 마리 자링 님이 설득해서 이렇게 된 거지만!”
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시온이 마리가 그에게 했다는 설득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다만 지금은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끼지 않았더라면 다음 날 아침에 펜부르크가 떠들썩했겠군.’
“제가 마법사인 건 아십니까?”
“그렇게 들었습니다.”
“오.”
둘의 모습을 한 번씩 보던 시온이 말했다.
“계획이 있습니다. 제가 일정 장소에 마법 덫을 깔아놓겠습니다.”
“마법 덫이라면?”
“조용한 것으로, 최대한 몸을 봉쇄하는 방향으로요. 하지만 아마도 엔클리 경의 마법보호구가 있어서 효력이 완전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사라면 거의 마법에 대한 방어 장비를 지니고 있었다. 엔클리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시온이 나머지 계획을 얘기했다. 둘이 최대한 어그로를 끌어서 공격하다가 시온이 말한 곳으로 도망치라고. 어레이가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시온 경.”
“왜지요?”
“그건 비겁한 짓입니다. 어떻게 기사 서임을 받으셨다는 분이 그런 말을 당당히 하실 수 있으신 겁니까.”
기사 서임이라, 그렇게 알려졌지만 시온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받았다고 해서 이런 식의 전략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면 돌파, 정정당당, 이건 이곳의 아주 중대한 바보 프레임 중의 하나였다.
“이미 비겁한 짓에 가담하고 있습니다만.”
“?”
“하지만 동시에 어레이 경은 주군의 배신자를 솎아내는 역할을 하고 계시기도 하지요. 이건 명예로운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사로잡는다면 명예를 지킨 것이 되겠지만 실패한다면 그냥 망한 겁니다.”
망해서는 안 된다. 영 수틀리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만이었지만 시온은 자링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붉은 호박 수목이 필요했다.
적어도 그것을 받던지 사던지 어떤 수단을 취해서라도 얻어서 나가고 싶었다.
ㆍㆍㆍ
시온은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시동시키기 위해 이곳저곳에 설치 석을 배치했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은 곧바로 형성시킬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각을 잡고 함정을 만들 수도 있었다.
사실 시온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설치마법을 만들 수 있었다. 라이트닝 댄스를 얼마 전 구매했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 이미 연습을 끝낸 상황이었다.
다만 이런 야밤에 라이트닝 댄스를 발동시켰다가는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클 것이었다. 염동력 마법의 장점은 이런 은밀함이었다. 화려하다고만 해서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계략을 짜는 것이 시온은 아래 단계에서는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이런 것보다는 전쟁터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화염 속성이나 얼음 속성이 더 좋을 것이었다.
“됐나.”
시온은 마지막 설치 석을 배치하고선 거기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배치할 때에는 일정한 마나를 계산해서 넣어야 했는데 여기에 간단한 중학교 수준의 계산이 들어간다.
이 정도면 구구단만 정확해도 됐다. 아마 중급 단계에 들어서면 고등학교 수준으로 난이도가 올라가겠지만, 현대인과 이곳의 수준 차이를 생각해보면 앞으로 그렇게 걱정해도 될 수준은 아닐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고위 단계 마법사라 불리는 자들이 설치 마법을 설치할 때 넣는 수식을 아무리 감안해도 고등학교 수준이니.
물론 이곳에서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를 능숙하게 한다는 것은 거의 이름있는 물리학자 수준이라고 봐야 했다. 그 정도로 이곳의 수리체계는 엉망이었다.
이윽고 두 명의 사내가 빠르게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낯이 익은 것을 보아하니 분명히 은패 용병 킬번과 어레이 경이었다.
어레이 경의 특유의 분위기가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 그런데 쫓아오는 자들의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열 명?”
게다가 수준도 나쁘지 않은 데다가 마법사도 있어 보였다. 킬번이 말했다.
“우리 멍청한 기사께서 전세의 불리함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달려들었소이다. 그리고 사전에 약속한 독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 같고.”
‘이런 제길. 저 바보가.’
시온도 욕이 절로 나오고 말았다. 이곳의 기사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융통성이 부족한지 모르겠다.
현대인인 시온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투철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많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독이 들지 않았더라면 다음번으로 기회를 잡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결국 저질러 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책임지고 엔클리 경을 포함한 여섯 명을 맡겠습니다. 나머지를 부탁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궁지에 몰려서 명예자살이라도 할 생각인가.’
시온은 저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행히 자리 잡은 이곳은 사람의 인적이 전혀 없는 폐 공터라는 점이었다. 이곳에서 칼부림이 난다고 해도 호기심에서라도 엿볼 인간은 거의 없었다.
“됐다. 식을 발동하면 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움직여. 이곳은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심도 있게 펼쳐놨으니까. 일단은 마법이 어느 정도 통하는지 보고 결정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