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계약(5)
하지만 지금까지도 변수가 있었던 마당에 변수가 하나 더 생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시온은 계속해서 물건을 챙기면서도 마나의 흐름에 집중해 주변에 매복 같은 것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시온 경? 무장 해제에는 찬성하긴 하지만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터시는군요.”
어레이 경이 그렇게 말하자 시온이 말했다.
“원하십니까?”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이 일이 있기 전이라면 시온의 행동에 반색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번 일이 성공으로 마무리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는 시온의 기지로 결정되었다.
목숨을 건진 것은 두 번째였다. 어레이는 시온이 적나라하게 금화를 털어대는 것을 보면서 혀를 다셨지만 이내 저것이 올바른 곳에 쓰이지 않겠느냐고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전리품에 대한 권리는 포로로 만든 몸값을 가지는 자가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법이었다. 시온이 태반을 쓰러트렸으니 이들에 대한 처우도 따라가는 것이었다.
어레이가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추가 인원을 빌리러 간 사이에 시온과 킬번은 이곳을 정리했다. 대부분 한쪽에 짐짝처럼 모아두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시작할 때만 해도 삐걱거리는 바람에 잘 안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오히려 이런 것이 잘 처리하면 더욱 이익이 남는 법이었다.
‘어레이는 기사다운 자이니 나에게 반드시 목숨 빚을 갚을 거야.’
어레이에게 목숨 빚을 만들어놓은 것도 이곳에서의 위험을 줄이게 하는 또 다른 큰 요소였다.
어레이 경이 이번에 엔클리 경보다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레이 경의 지위가 낮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제 엔클리 경이 경질이 되면 그 자리의 힘마저도 어레이 경이 챙겨갈 것인데 아직은 자유용병 신분인 시온에게 있어서 안전장치처럼 작동할 것이었다.
“시온 경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
킬번이 상황을 한 번 더 정리하고 포로들을 포박하면서 시온에게 이어서 말했다.
“제가 아는 마법사 중에는 가장 파격적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적으로 만나기 싫네요. 만약에 저와 갈라지게 된다면 알려주십시오. 저는 참가를 안 할 거니까요.”
“같은 편이라면?”
킬번이 씩 웃었다.
“무조건 참가합니다.”
곧 추가 인원이 몰려왔다. 이들은 모두 같은 편이었다. 그리고 원래의 계획과 다른 난장판에 놀라면서도 이것을 만들어낸 것이 시온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시온에게 특별한 시선을 보냈다.
ㆍㆍㆍ
시온은 자백을 받아내는 일까지 전담한 것은 아니기에 엔클리 경과 나머지를 모두 어레이 경을 따라온 자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다음 날 은밀히 다가온 잘생긴 남자 시종이 시온에게 공손히 말했다.
“마리 자링님께서 찾으십니다. 대신 비밀리에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약속장소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시온은 그가 속삭이는 단어를 듣고는 곧바로 이해했다. 본격적으로 이번 일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귀족의 정치라는 것과 일은 은밀하게 진행되는 법이었다.
나중에 큰 결과로 권력의 중추가 바뀌기는 하지만 그 물밑 작업에는 이런 치열한 수 싸움이 있는 것이었다.
“알았다. 지금 하는 일을 마치고 바로 가지.”
“알겠습니다. 그럼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미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온은 그녀와 교제 중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사귀면서도 은근히 이해관계가 철저히 얽혀 있는 사이였다.
그녀는 슬슬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온은 미아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녀의 요구에 응해 마리 자링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누구야?”
그녀의 질문은 많은 걸 묻고 있었다. 시온은 잠깐 고민을 했다. 지금 미아와 교제하고 있는 사이이고 가끔 만나서 잠자리도 하고 그녀와 마리 자링의 사이를 이해하고 있지만, 과연 이 사실에 대해 말해도 되는지를 말이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는 건 분명한데 아직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만약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다른 쪽으로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아직은 엔클리 경 한 명을 제거한 것밖에는 되질 않아 상황의 기세가 명확해지지 않은 마당인지라 좀 더 안전을 기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거 자링 님의 시종인데 아무래도 독이 관여되고 있다는 의문이 없어지질 않더군. 그거와 관련된 자다.”
“그···래? 그거 위험한 얘기 아니야?”
“위험하지. 그런데 알고 있던 거 아닌가?”
“그저 감이었으니까. 나는 네가 마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그게 영주님의 직속으로 들어갈지 전혀 몰랐지.”
그건 시온도 몰랐다. 처음엔 그저 그 근처를 맴도는 정도의 계약인 줄 알았었다.
미아와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온은 밖으로 나와 약속장소로 향했다.
ㆍㆍㆍ
붉은 호박 수목은 금박의 정수를 만드는 핵심 재료였다. 어쨌든 이것을 보상으로 받아내기 위해서는 마리 자링에 최대한 협조를 해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재료에 대한 정보도 얻어야 했다.
강가 근처의 오솔길 뒤에 아까 봤던 잘생긴 시종이 서 있었다. 시온은 이 시종의 얼굴을 기억해 뒀다. 아무래도 마리 자링과 얽혀 있다는 냄새가 났다. 마리 자링의 비밀 애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애인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좀 더 안전해질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시종이 잘생겼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신분이 낮았다. 시온보다도 낮은 것으로 보였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마리 자링 역시 결혼을 아직 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사회규칙대로 장기적 약혼을 맺은 상대가 있는 상황이었다.
“오셨습니까. 시온 경.”
“이름이 뭐지?”
“후안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시온은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특수 속성인 붉은 호박 수목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재료라고 해서 모두 같은 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온은 이 재료가 존재한다는 것을 들은 것이지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기에 만약 수목 일부분에 불과하다면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를 해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보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마법 장비를 선택하거나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자를 소개받아 의뢰비를 해결해 준다거나 이런 식으로 처리해야겠다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도팽 가문에서도 급이 좋은 제작자는 바쁘고 성격도 좋지 않아 의뢰자가 급이 되지 않으면 무시하기 일쑤였다. 시온 같이 증명되지 않은 자유용병이라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링 가문의 권력을 빌리면 얘기가 달라졌다. 게다가 시온은 지금 엔클리 경과 다른 자들의 무구를 모두 챙긴 상태였다.
이것들을 모조리 정리하는데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조건이 필요했다. 특히 엔클리 경이 가지고 있던 메이스는 너무나도 상징적인 것이라 경매장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일에 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와중에 시온은 고즈넉한 강가를 내다보는 작은 건물에 도착했다.
시온의 생각에 정자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컸고 석상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아 풍요의 신을 위한 종교 건물이었다.
삼지창에 인어의 모습을 한 그것을 잠깐 보다가 어레이 경이 반갑게 시온을 맞이했다. 호위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자가 어레이 경이었다.
“아, 시온 경. 오셨군요. 안쪽으로 들어가시지요. 마리 자링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같이 들어가십니까?”
“아니요. 저는 이곳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여기를 지나가려는 자가 있다면 저와 생사를 나눠야 할 것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의 비장한 말투가 약간 웃겼지만 영 농담으로 끝날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맙다는 대가로 금화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금화를 받아버리면 그에게 지울 수 있는 목숨 빚이 약해지게 된다.
그러니 이 일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시온은 후안이라는 이름의 시종을 따라 완전히 안으로 들어갔다. 삼 층의 전망 좋은 곳에 마리 자링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복장은 한껏 매혹적으로 차려입은 상태였다. 마치 시온을 유혹하듯이.
‘착각이겠지.’
“오셨군요. 활약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었습니다. 시온 경. 저는 마리 자링님의 대리로 온 사람입니다. 여기에 앉으시지요.”
그녀의 가슴골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서 시선을 처리하는 것이 난감했다. 어쨌든 시온은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뒤에는 펜부르크를 가로지르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시온은 가까이서 그녀를 보고 나서야 특유의 기감 덕분에 그녀가 변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영 마법. 환영 마법이 깃들어 있는 고급 장비를 쓰고 있구나.’
시온은 그녀의 손과 목걸이 귀걸이 옷을 차례차례 봤지만, 해당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골에 정답이 있었다.
그녀의 짧은 문신에 힘이 느껴졌다.
‘문신으로 새겨놨군.’
“말이 없으시네요. 마리 자링님은 한참 뒤에 오실 거랍니다. 안 오실 수도 있고요. 저와 한 얘기를 제가 정리해서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절 놀리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마리 자링님. 하지만 모습을 숨기시려는 게 중요한 일이라면 입을 단속하겠습니다.”
“?!”
그녀의 눈이 급격히 떠졌다. 그리고 그녀는 놀란 얼굴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마법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나? 목소리도 얼굴도 옷차림도 다르게 입었고 마나 감지가 되지 않는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랬군.’
시온은 그녀의 반지가 상당히 고가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이 굴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것이 마나 감지를 방해하는 역 마법 장비인 줄은 몰랐다. 호신용 마법으로 추측한 상황이었다.
“감입니다. 예전부터 감이 좋아서 말이지요. 한 가지 덧붙여 말해드리자면 그렇게 곧바로 반응하지 마십시오.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은 좀 더 연기하시길 바랍니다. 누군가가 저처럼 넌지시 아는 척하고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시온은 그녀에게서 포커의 기술인 블러핑에 대해서 짧게 설명을 했다. 물론 포커나 블러핑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비슷한 개념을 말이었다. 그녀가 감탄했다.
‘나를 계속해서 놀라게 하고 있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비범한 자다.’
물론 시온이 그녀에게 말한 것은 그냥 둘러댄 거에 불과했다. 시온은 그녀가 변장 상태인 것을 단번에 마나의 흐름을 통해서 알아챘다.
그러나 자신이 기감이 좋다는 것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한 가지라도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것이 앞으로의 일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테니까.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꺼내는 편이 더 좋은 것이다.
“고리가 두 개인데도 내가 본 고리가 네 개인 마법사보다 기민하다니. 그리고 육체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하고. 이러한 사람은 어떻게 불러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