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계약(6)
“과찬입니다. 그냥 자유마법사입니다.”
시온은 그녀의 이어지는 칭찬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만약 붉은 호박 수목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어레이 경을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다.
마비약이 듣지 않은 것은 그것을 약속한 마리 자링의 문제이지 시온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온이 리스크를 감당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이제 그 결실을 받아낼 차례였다.
“붉은 호박 수목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은 운이 좋았습니다. 사실 실패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겁니다. 약이 듣질 않았거든요.”
“그 부분은 정말로 미안해. 내 정보원이 예상치 못했던 일이야. 엔클리 경이 실력을 속이고 있었고, 그런 고가의 장비를 갖추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 감쪽같이 당할 뻔했어.”
“어레이 경도 당황하더군요.”
“음? 용감하게 너를 보조한 것이 아니었나?”
시온은 어레이의 실수를 공개할 것인지 아니면 그의 실수를 감쌀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어레이 경이 비록 실수도 하고 기대보다는 활약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용맹한 사람이고 나름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그리고 곧 그가 겸임하게 될 지위도 말이다. 그는 엔클리 경이 누리고 있던 호위권을 추가로 부여받아 영주를 보필하는 주력 기사로 떠오를 것이었다.
“맞습니다. 용맹했지요. 그 점은 확실합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마리의 애인에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뭔가 끌리는 게 많아.’
마리 자링은 시온을 슬금슬금 훑어보았다. 시온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이 다른 것으로 변질하는 것을 느꼈다. 자유기사의 역할과 동시에 잠자리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그래서 지금 그 대가를 바로 원한다는 거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들키지 않게끔 도도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시온에게 넌지시 물었다.
물론 약간의 걱정이 섞여 있었다. 시온이 물건을 받고 그냥 떠나버린다면 그녀로서는 이 물건의 지급을 지연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리고 꼭 언급해줘야 할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계약을 중도에 파기하고 떠난다면 지급을 거부하겠어.”
그녀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놀랄만한 답변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자면 자유마법사인 시온을 고용한 것은 미아와의 우정으로서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시온은 오래 쓸 사람이 아니었고 한두 군데 정도에만 쓴 뒤 버리려는 장기말에 불과했었다.
친구의 애인이기 때문에 악독한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었지만, 강제로 조용히 지내게 하게 하거나 두둑하게 금화를 챙겨주고 이곳을 떠나게 하는 방법 정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선 처음 가졌던 계획은 폐기한 지 오래였고 오히려 다른 마음 까지 먹어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반면에 시온은 그녀의 태도에 약간의 의혹을 품었다. 뭔가 더 있는 것일까? 하지만 추측할 수 있을 만한 단서가 부족했다.
붉은 호박 수목을 즉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시온으로서 당연한 추구였다.
소유하는 것도 중요했고 그것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했다. 어떤 것이든지 시온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아닙니다.”
“나는 이 일에 대한 보상으로 다른 것을 줄 수도 있어 자링 가문의 금고에서 나에게 배정된 것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야. 아버지는 딸을 사랑하셨지.”
중세의 가문에서 딸이 가문의 유산의 상당 부분을 받는 것은 확실히 짚고 가야 하는 문제였다. 이곳에서의 여자의 인권은 상당히 낮았다.
물론 여자만 낮은 건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인권이 죄다 낮았다. 일정 계급이 되지 않으면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었고 그마저도 철저하게 착취를 당하는 구조였다.
“저는 붉은 호박 수목이 필요합니다.”
“왜지?”
“취미입니다.”
“?”
시온이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믿지는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굳이 좋은 보상을 원했다면 자유기사나 마법사의 신분으로 떠돌지는 않았을 겁니다. 도팽 가문에서도 비슷한 걸 제의받았었으니까요.”
“........”
그녀에게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시온은 잠시 생각을 했다. 그녀 역시 환영 마법을 쓸 수 있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나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였다.
수준은 고리를 한 개도 연성하지 못한 정도지만 마나를 알고 있고 수련도 할 것이었다.
“마나를 아시니 아실 겁니다. 붉은 호박 수목은 희귀 재료이긴 하지만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이미 대부분 방식이 실전됐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시도를 한 번 해보려는 정도라고 할까요.”
여기까지 오자 그녀는 완전히 납득했다.
시온은 몇 가지 비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유지할 것이었다. 선조의 유물이나 그 유물에서 파생된 녹반지의 비밀은 황제가 물어도 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알았어. 오늘 끝나고 내일 찾아가 봐. 내가 승인서를 내릴 테니까. 그리고 서임 안 받을래?”
“?”
“자링 가문의 기사 서임 말이야.”
자링 가문의 기사 서임의 가치는 높았다. 다만 서임도 하나의 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사가 여러 개의 서임을 받는 것도 가능했다.
애초에 봉신 관계라는 것은 좀 더 맹약에 가까운 계약에 불과했다. 서임 내용을 조정하면 서임을 여러 개 받는 기사도 많았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이건 내 뜻대로는 안돼. 좀 더 명확하게 이력이 더 있어야겠지. 하지만 여기에 대해 후보 인물로 동생에게 넣어 줄 수 있어. 압박도 말이지.”
그 동생이란 단어는 펜부르크의 영주인 하이거 자링을 뜻하는 것이었다.
ㆍㆍㆍ
시온은 뜻밖의 제안에 대해서 생각하며 보상을 받기 위해 성내의 창고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온이 엔클리 경을 잡아내기 위해 큰 힘을 보여준 건 사실이었으나 기사 서임을 줄 정도의 무엇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기사 서임이라는 것은 니벨룽 가문에서도 가지지 못한 권리였다. 급이 되는 가문만이 일정량 가지고 있는 것인지라 니벨룽 가문에서 장남만 우대해 투자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마상창대회나 난투대회에 나가던지 종자 이력을 쌓다가 급이 높은 가문에서 한 자리 받아오는 게 니벨룽 가문의 계승권의 조건이었다.
작디작은 오지의 가문이지만 나름의 불문율이 존재했는데 그게 바로 이것이었다.
‘서약의 내용에 대해서 철저히 살펴봐야겠지만 받을 수만 있다면···.’
용병활동을 하는데 몸값을 올리고 어떤 일이든 끼어들 수 있는 큰 제약 조건이 풀리게 되는 것이었다. 시온은 마법사이니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게 된다면 몸값은 더더욱 오를 것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이미지로 참가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미아가 꾸민 이미지가 섞여 있었다. 워낙에 단련이 되어 있는 탓에 아무도 의심을 하지야 않지만, 기사는 아니기에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
어레이 경이 꼬박꼬박 경을 붙이는 바람에 이제는 진짜로 자유기사가 되어 있어 아니라고 하면 논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여튼 시온은 예의 그 남자를 통해 가문의 금고 근처의 집무실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집무실은 작은 첨탑 형태인지라 창문을 통해 펜부르크의 풍경이 보였다.
그렇게 이것저것을 보고 있는 와중에 안으로 남자가 들어오며 무언가를 가져왔다. 고급 벨벳에 감싸서 가져온 것은 한눈에 봐도 붉은 호박 수목으로 보였다.
마나가 고여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이 벨벳조차도 보통의 벨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나의 재료를 보관하기 위한 일종의 보존 역할을 하는 마법 천이었다.
“마나를 보호하는 천인가.”
그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알아보셨군요. 맞습니다. 이것은 마나의 손실을 막기 위해 제조된 천이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천 자체도 가격이 상당한지라 이것까지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천이 완전히 펼쳐지고 안에 있던 물건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원하던 형태와는 한참이 멀다면 다른 방안을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완벽한 형태였다.
시온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평소라면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겠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진품이 맞는군.”
약간 말라붙어 있었지만 별로 손실이 되어 있지 않은 뿌리까지 멀쩡해 보였다. 이것이 이 천의 효과임은 분명했다.
남자가 뭔가 물건을 하나 꺼냈다. 마나를 측정할 수 있게 하는 석이었다. 이것으로 확인시켜 주려고 하는 것일 거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이것이 확실했기에 이런 부류의 물건을 거래할 때는 측정이 필수였다.
“아니 필요 없다.”
“?”
“진품이 맞다.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시온이 물건을 꺼낸 뒤 아공간 반지에 집어넣었다. 천을 개방했기 때문에 괜히 측정한다고 긴 시간을 노출하면 조금이라도 손실이 왔다. 아공간 반지에 들어가면 상당히 손실이 적었다.
“혹시 다른 물건을 보시겠습니까? 아직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시온은 고개를 젓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시온이 완전히 나가고 집무실 안에 다른 사람이 하나 더 들어왔다.
시온과 안면이 있는 남자였다. 시온을 마리 자링에게 비밀리에 안내해 준 적이 있던 그녀의 시종인 후안이었다.
“그냥 나갔나?”
“나갔습니다.”
“그래서?”
“특이한 자입니다. 뭐랄까 아무래도 기사라기보다는 정말로 마법사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마법사는 이상한 것에 집착하기는 하니까요. 아마도 저자는 저런 재료에 미쳐있는 거겠죠. 저런 마법사를 한두 번 보기는 했습니다.”
“미인을 좋아할 것 같아?”
“전혀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쓸 일이 없는 재료를 모은 다라,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 생각인가?”
“그저 모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호의 천을 알아보더군요. 이것을 알아보는 자는 보통 수집 쪽 취미와 관련이 있죠. 뛰어난 자인 것은 확실합니다. 보통 눈썰미가 아닙니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 기사와 마법사의 지위를 다 가지고 있는 거겠지. 한 가지를 가지는 데에도 십 년이 넘는 자도 수두룩한데 말이야.”
잘생긴 후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그중 한 가지도 도달할 수 없었던 그는 시온을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ㆍㆍㆍ
시온은 일단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아공간 반지에 넣어둔 붉은 호박 수목을 꺼내 조금씩 여분을 모아뒀던 푸른 액에 담갔다.
적어도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보호의 천과 유사한 보존 효과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번의 엔클리 경과의 충돌에서 얻었던 고리 한 개 마법사의 아공간 반지를 열어 보는 데 집중했다. 어제부터 시도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난이도가 있었다.
고리는 하나짜리인데 보안에는 상당히 투철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온은 단파의 아공간 반지를 강제로 열면서 나름의 잡기술이 생긴 상황이라 버틸 수 있는 것도 오늘까지였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던 끝에 반지가 열렸다.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뜻밖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