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2)
‘준비를 더 해야 한다.’
시온은 다가오는 서임식과 앞서 벌인 일들이 다른 위험을 가져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것만 믿고 있다가는 크게 당할 수도 있었다.
다룰 수 없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비밀 지도나 펜부르크의 일에 깊숙이 끼어드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초이의 몸에서 독 구슬을 제거한 것과 비밀 지도를 가로챈 것은 다른 위험을 불러오고 있었다.
불크 공작과 마탑 소속의 자이펀 이라면 사실확인을 위해 따로 사람을 보낼 급이었다. 아직 들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시온의 계획대로라면 이번에 얻은 물건으로 세 번째 고리를 향한 상당한 마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엔클리 경에게서 얻은 고가의 기사 장비는 수천 골드의 가치를 지녔다. 게다가 서임식과 관련해서 받게 되는 골드도 상당했다.
어레이 경이 왜 서임식을 약식으로 받느냐고 의아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서임식을 해서 기사의 직위를 얻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이권과 직책이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시온은 이런 지위를 다른 기사들에게 팔고 있었다. 물론 다른 기사들은 시온이 그 직책을 자신들에게 팔았기 때문에 약식으로 서임을 받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시온은 아직 권력구도가 확실히 잡혀있지도 않은 펜부르크에서 이런 애매한 직책을 수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펜부르크에 머무르자면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겠지만 시온은 더 높은 고리의 마법사가 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여러 가지 명예 직위와 직책을 다른 기사들에게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장비와 필요한 마법서를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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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자링은 시종인 후안 에게서 여러 기사의 동향에 대해서 듣고 있었다. 기사들 자체는 그렇게 큰 힘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형성한 집단의 흐름은 큰 힘을 갖기 마련이었다.
이번 난투전은 그런 부분에 큰 변화가 왔다. 큰 흐름을 가지고 있던 에밀리온이 용병이자 자유기사에 불과한 시온에게 깨진 것은 펜부르크가 떠나갈 정도의 큰일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본인이 벌인 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지만 엔클리와 함께 에밀리온은 한쪽 세력을 이끌어가는 카리스마가 있던 기사였던 것이었다.
“에밀리온은 어떻게 하고 있지?”
자존심이 높았던 에밀리온은 이름도 없는 무명기사에게 난투전에서 당해 충격이 컸다. 마리 자링은 에밀리온에게 자금을 대줄 테니 펜부르크를 떠나 수련을 하라고 권한 상황이었다.
“그 제안을 아무래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에밀리온이 받은 충격이 대단했나 보더군요. 마리 님이 제시한 후원을 받고 제국 기사회에 들를 계획으로는 보입니다. 사람을 정리하고 있거든요.”
제국 기사회는 여러 기사회를 통합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낙담한 기사의 집중적인 수련을 돕기도 했다.
“이참에 새로운 주군을 만날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아니면 가다가 죽을지도 모르고. 그곳에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까.”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밀리온이 이렇게 사라져준다면 그녀가 가지는 힘은 한층 더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은 시온이라는 존재였다.
“떠나기 전에 그 낙담한 얼굴은 꼭 봐야겠군.”
그녀는 즐겁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상황을 만들어 줬으면서도 여전히 속내를 알 수가 없는 한 남자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소개를 받고 나서부터 중요한 일도 맡겼었지만 희한하게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남자들의 위에서 내려다본 기억밖에는 없는 그녀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온이 그녀와 같은 편이라는 점일 것이었다.
“시온은?”
하루의 질문은 시온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바뀔 정도로 그녀는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생각보다 마법 수련을 많이 하더군요. 거의 하루종일 그렇습니다. 보고드릴 만한 일은 저번과 같습니다.”
시온이 다른 기사들과 만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봤자 다 그녀의 사람들인지라 예상이 어느 정도는 갔다.
‘왜 내가 주려는 것들을 다 그런 식으로 넘기는 것이지.’
그녀는 시온의 행동에 알게 모르게 자존심 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정황을 보면 시온의 행동이 현명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시온이 난투전에서 우승했다고 해도 이방인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단숨에 요직에 오를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밑에서 따르는 그 사람이 거부한다면 문제만 일으키는 요인이 될 뿐이었다.
‘참 조심성이 많은 남자야.’
원칙적으로 보면 시온이 저런 식으로 그녀의 기사에게 나눠주는 것이 맞았다. 기분상 자존심이 상할 뿐이지 그녀가 손해 볼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구슬려서 해야 했을 그럴 일들이었다. 눈치를 보던 후안이 그녀에게 말했다.
“주제도 모르고 하는 짓이 하나같이 어리석군요.”
그가 대뜸 시온에 대한 험담을 꺼내고 오 분 정도를 이어갔다. 그녀가 화가 나서 소리를 쳤다.
“주제를 모르는 건 너야!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리를 꺼냈다가는 목숨이 없을 줄 알아! 입을 조심하라는 얘기야 알았어?”
후안이 쌓아왔던 그녀와의 척도가 한 번에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 정도로 마리는 시온을 특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던 거다.
불호령에 후안의 표정이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게 아니꼽다면 난투전에 우승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했다. 단순히 부여받은 것이 아닌 진짜 전투능력을 말이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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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밀폐된 공터에서 시온은 고렘을 꺼내기 위해 각을 잡았다. 이것 역시 연습을 해둬야 했다. 급한 상황에서는 일분일초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마나가 출렁이고 정신을 집중하자 단파의 고렘 마법서가 반응을 했다. 그리고 작은 소환식과 함께 허리 반만 한 돌덩이가 나왔다.
술식으로 보관소에 묶여 있다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화염계의 고렘은 약간이나마 불을 다룰 수 있고 그 특징이 안구에 배여 있었다.
‘흠. 설명에 의하면 집념체는 살아있다고 하던데.’
고렘의 의식을 구성하는 집념체는 거의 무생물에 가까운 덩어리다. 그러나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먹을 것을 줘야 했다.
정령류 답게 마나와 관련된 것을 줘야 했다. 고렘의 안구에서 어떤 동글동글한 것이 나오더니 흐릿하게 둥둥 떠다니며 시온의 근처로 왔다.
계약자인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시온은 싸한 느낌을 받았다.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남은 약초가 있지.’
마나석에 담긴 것을 줘도 된다. 하지만 마나석에 담긴 것은 시온이 흡수해야 했다. 보통보다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는 시온은 마나석에 담긴 마나를 집념체에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마나 약초를 줘야 하는데 보통은 마나 약초를 주지 않고 마나석에서 자기가 쌓을 마나를 양보해서 고렘에 주게 된다. 마나 약초를 주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어느 정도 하급 정수의 재료는 푸른 액을 통해 키워내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쓸 수 있었다.
아공간 반지에 산재해 있는 약초들이 꽤 있었다. 이것들은 푸른 액으로 키워내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다가 실패를 맛봤던 그런 실패작들이었다.
재료로 쓰기엔 완성 되지가 않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그런 것들이었다. 과연 이런 것들을 먹을까? 시온은 먹을 거로 생각했다. 어쨌든 마나를 함유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것들을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았다. 붉은 기운이 도는 집념체는 시온의 예상대로 탁자 앞에 있는 실패작들을 흥미롭게 보다가 약초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형체 안에 가두고 녹이는 것이다.
‘질 좋은 마나를 먹이면 집념체가 성장한다고도 했지.’
단파의 고렘 제작 서적에는 그런 어구가 있었다. 무조건은 아니지만 긴 시간을 투자한다면 집념체 자체가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이다.
‘뭘 먹여야 하지?’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더 질 좋은 고렘 관련 서적을 구하는 방법이나 어디 고렘 길드나 마탑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집념체 덩어리가 조금 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변한 것 같은데?”
말을 해보라고 시키고 싶지만 간단한 답변을 하는 수준은 고렘 제작의 최고 단계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결국은 바로 전에 기억을 되새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면밀하게 형태를 살펴보던 시온은 한 개 더 꺼내서 놓았지만 이미 충분한 양을 흡수했는지 집념체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흠. 왠지 성장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시온은 잠정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선조가 남긴 푸른 액은 지금까지 많은 부분을 불가사의하게 해결했었다.
그러니 이것도 아니란 법은 없었다. 이제 감을 잡았다고 생각한 사용 방법조차도 아직 베일에 싸인 것이 많았다.
집념체는 다시 고렘의 몸 안으로 돌아갔다. 시온은 간단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부터 무언가를 때리는 것까지 이것저것 시켜보는 것이다.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고 시킬 때마다 특유의 패턴이 존재했다. 마법서를 보조로 해서 발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시온은 엔클리 경의 메이스를 꺼냈다. 난투전을 우승 시켜준 장비였다. 이 장비는 아마 엔클리 경도 몰랐을 특이한 속성이 있었는데 마법이 잘 걸린다는 점이었다.
시온도 처음엔 이것저것 다 걸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유독 메이스가 보조 마법이 쉽게 걸렸다. 그리고 어레이 경에게서 받은 제국 메이스 교본을 꺼냈다.
기본적인 동작은 난투전을 위해 어레이 경에게 집중적으로 배웠다. 응용 동작도 배웠다. 다만 욕심이 조금 났다. 그래서 어레이 경에게 쓸만한 교본이 없냐고 하니까 내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단, 어디 가서 제가 줬다는 소리를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진 빚이 많으니 그냥 내드리는 겁니다.”
그가 내준 교본은 제국 기사단 수도회에서 따로 나오는 것으로 반드시 기사이어야 했고 수도회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자만이 열람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물건을 그냥 내준 것만으로도 어레이 경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을 그런 교본이었다. 시온은 기사 서임을 받은 김에 어느 정도는 무구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그 시작이었다. 일단은 자세라도 확실히 익혀두면 허장성세가 먹힐 터였다.
‘좋은 교본의 상위 자세만 잘 취해도 알아보는 자는 함부로 덤비지 못하겠지.’
그나마 시온이 다른 기사와 유독 유리한 점은 바로 신체 상태에 있었다. 푸른액 덕에 기사가 지녀야 할 자질은 이미 놀라운 수준이었다.
“가문에게도 소식이 가겠는데.”
마법사 시험 때도 그랬지만 기사 서임 정도면 니벨룽 가문에게도 소식이 갔다. 무슨 답변이 올지는 대략 예상은 하고 있었다. 돌아와서 가문을 돕고 적합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