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1)
저주가 걸려 있는 물건도 많이 있는 편이었다. 해제할 수 있는 수단도 없이 함부로 집었다가는 난감할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시온은 석상들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챙길 것들은 챙겼고 그 이상을 하려면 저 기이한 보석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오는 길은 간단했다. 물 밖으로 나오고 시온은 헤엄을 쳐서 물 위로 올라왔다. 신전 안에 비밀공간이 있다니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ㆍㆍㆍ
다음날 안개는 말끔하게 걷혔다. 그리고 시온은 일어나자마자 해당 신전을 향해 갔다. 혹시 놓친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햇살 가득한 신전엔 어제와 같은 기괴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해당 지점도 마찬가지였다.
‘감쪽같이 없어졌군.’
시온은 요동치던 숨겨진 기류가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특정 시기나 조건이 갖춰야지만 열리는 숨겨진 공간인 것 같았다.
“먹을 것 좀 주십시오. 기사님.”
어제와 다르게 시온을 발견한 어린애들이 모여들었다. 시온은 은화 몇 개를 아이에게 줬다. 이편이 조용하게 하는 데에는 즉효였다.
“이곳에서 특이한 일은 없었느냐? 낯선 사람이 보였다거나 이상한 현상 말이야.”
“없었어요. 그런데 안개가 낄 때 이곳에서 행방불명이 된 자들이 몇 명 있다고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뜻밖의 정보였다. 시온은 잠시 생각하다가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그 공간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공간은 닫혀 있었다.
간단히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들어갈 수 있는 자그마한 틈도 없었다. 시온은 밖으로 나오고 이곳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자문회 참석이군.’
시온은 그곳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펜부르크 성은 여전히 거대했다. 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이곳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노예들 하인들 병사들 기사들 각 귀족과 여러 목적으로 승인을 받기 위해 방문을 하는 상인들이 보였다.
“시온 경. 이제 오셨습니까. 아까부터 기다렸습니다.”
저 끝에서 시온을 알아본 어레이 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레이 경뿐만이 아니라 안면이 있는 기사들이 꽤 있었다. 자크 경도 있고 다른 기사도 보였다.
자문회는 자링 가문의 공식적인 일을 결정하는 자리인지라 모든 기사가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물론 시온이 무언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견을 제시하거나 모을 수 있는 것은 몇 명 되지는 않았다.
“어레이 경. 아무래도 오늘 꽤 중요한 일이 결정될 것 같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저는 이번 일에 대해서 준비는 잘 되시고 계십니까?”
그가 넌지시 말하자 시온은 대번에 그가 이번 습격 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정도는 하고 있지요.”
어레이는 시온을 살피고서는 어느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시온이 날이 갈수록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나태해질 법한데 대단하군. 마리 님의 신뢰를 얻은 것도 물론이고 기사로서의 관리까지 완벽하다. 귀족 출신 다운 솜씨야.’
말이야 잘 모르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름 시온의 행적을 조사했다.
시온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매진 중이라는 것과 가치는 없지만, 상징적인 물건 몇 개를 구매하는 데 돈을 썼다는 것을 말이다.
의회 홀은 이미 시끌시끌했다. 마리 자링이 영주인 하이거 자링의 의사결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발언권은 앞에 있는 여섯 명의 귀족들에게 있었다. 시온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리엔과의 강철 무역을 재개하겠다는 겁니다.”
옆에서 어레이 경이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그 일 때문이겠지요?”
“그렇지요. 마리 님은 의외로 의중을 찌르시는 편이거든요.”
숙부인 벤의 딸의 결혼식 경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계략이 분명했다.
“그래서 어때 보입니까?”
어레이가 조심스럽게 시온의 의견을 물었다. 어레이는 시온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난투전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시온의 비상한 점을 발견하고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아마도 이번 일의 결과는 저희에게 달려 있을 겁니다. 일이 잘되면 영지 전까지 갈 필요가 없을 수도 있고요. 실패한다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마리 자링 님의 입지가 약해질 겁니다.”
어레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시온이 제대로 답변을 안 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더 물어보는 것은 체면상 그러했기에 입을 다물다가 한 마디를 더했다.
“아무래도 결정이 난 모양입니다.”
ㆍㆍㆍ
벤 남작의 지위가 낮았기에 여자가 그쪽을 향해 움직여야 했다. 긴 행렬은 화려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보호할 수 있는 기사와 병사 용병을 대동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시온과 어레이 경이 이끄는 혼합 부대가 이곳을 습격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ㆍㆍㆍ
시온은 몇 가지 마법과 메이스 그리고 고렘을 모두 활용했다. 주위는 바로 전에의 흔적을 알 수 있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예상대로였다. 병력은 적은 편이었다. 거의 반항다운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대부분을 사로잡았다.
“누군데 나를 이렇게 하려는 거에요?”
벤 남작의 딸인 줄리아였다. 병사가 줄리아를 확보하고선 말했다.
“따라오셔야겠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공격하지? 감당할 자신이 있나?”
기사 하나가 소리치자 시온이 말했다.
“입을 나불대면 죽이겠다.”
시온의 모습을 확인한 자들이 얼어붙었다. 메이스를 들고 그런 말을 하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이름 높은 자다.’
“시온 경. 모두 확보했습니다.”
필립스가 사로잡은 자들을 속박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복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여기저기서 여러 가지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 벤 남작에게 충성을 다했을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단번에 시온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당장에 죽게 생겼는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자에게 항복하겠다고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그 대상은 시온이었다.
정작 시온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렘의 공격이 너무 단순한데.’
시온은 이번 전투에서 고렘을 사용해봤다. 고렘은 시온이 연습한 데로 잘 움직였지만 그것뿐이었다. 어설픈 녀석을 하나 죽였지만, 그 정도뿐이었다.
‘재질도 부족하고 마법도 가르쳐야 하고’
어쨌든 이번 일은 생각보다 쉬운 편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나를 놓아주세요. 경이 맞으시죠? 단순한 도적단으로 보이지 않네요. 명예로운 지휘관답게 저를 명예롭게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온에게 기어코 말을 다시 거는 데 성공한 벤 남작의 딸인 줄리아가 말했다.
“지휘관을 찾소? 지휘관을 불러주지요.”
시온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누가 봐도 시온이 지휘관인데 누구를 부른단 말인가.
이곳에 있는 병사나 다양한 자들이 시온을 대하는 것을 보면 시온이 이곳의 책임자가 분명했는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그녀로서는 일부러 아닌 척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레이 경! 포로께서 경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군요!”
“잠시, 아. 알겠습니다.”
시온은 어레이를 불렀다. 어레이는 나름 바쁜 일 처리 중이었는데 시온이 부르자 당장 와서 그녀와 대화를 시작했다.
시온은 그 틈에 그곳을 빠져나갔다.
“몸값을 내겠습니다. 경! 제발!”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지 시온이 지나갈 때마다 포로들이 아우성을 쳤다. 몸값을 낸다는 자들이 모두 귀족이나 기사는 아니었고 그냥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계승권이 멀어진 상인의 아들이 부유한 용병 생활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곳의 습격을 거의 예견하지 못한 탓에 그런 이들이 많이 있었다.
자크 경의 인질을 수송할 병력이 도착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시온을 찾았다.
“시온 경. 경의 활약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습니다. 하지만 경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자크 경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시온에게 말했다. 그는 시온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시온이라는 기사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이번 전투 말입니까?”
“장 경이나 몽폴 경은 없었습니까?”
“장 경이 저랑 부딪히기는 했습니다만···.”
시온은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나름대로 이름 있는 기사인 장은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고 도망쳤다. 술에 취해 있었는데 도망갈 정신은 있는 모양이었다.
“어땠습니까?”
“만취해있다가 습격당하자마자 도망쳤더군요. 덕분에 안 그래도 약한 방어 라인이 더 쉽게 뚫렸습니다.”
“정말입니까? 하하하하. 그 녀석 예전에 저한테 도박 빚을 떼먹은 놈입니다. 역시 그 버릇 어디 못 줬군요!”
시온은 그가 시원하게 웃는 것을 보다가 한 마디를 더했다. 자크 경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시온이 생각했을 때 정말로 중요했다.
“인질로 잡은 자들이 한 명도 새어나가면 안 됩니다. 만약에 결혼식 행렬을 습격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게 되면···.”
이번 일을 계획한 마리 자링의 입지가 아주 좋지 않게 된다. 그의 사람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야밤에 이곳에 도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시온을 쳐다보았다. 그만큼 시온에게서 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온의 말은 옳았기에 그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중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ㆍㆍㆍ
돌아오자마자 시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몇 가지 선전포고였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말은 드렸는데 막무가내였습니다.”
초이와 필립스가 말했다. 특히 필립스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흠. 나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고.”
에밀리온 경이 시온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이었다. 에밀리온은 그동안 밤잠 한 번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기사 수도회로 떠나기 전에 시온에게 공개 결투장을 보낸 것이다. 시기는 공교로웠지만 다뤄야 할 일이긴 했다. 에밀리온 경은 여전히 펜부르크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시온은 일단은 알겠다고 말한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거품이 생겨있던 회백색 덩어리가 거의 다 녹아 있었다.
안에 있는 것은 주홍색의 점이었다. 이것은 폭발 구슬을 만드는 데 이용되는 고급 재료였다.
빙점보다 더 좋은 물건이 나올 예정이었다. 예전에 빙점이라는 마법 도구로 한 번 목숨을 구명 받았었는데 이번에도 이것이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번째로 각질화에서 얻은 순수한 재료를 강화 단약으로 만들 차례였다. 점 도구는 의뢰에 맡기고 강화 단약은 직접 만들고 일단은 이게 지금 해야 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