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304)

폭풍전야(4)

수련할 필요가 있었기에 일단은 고렘을 다시 한적한 곳에 꺼냈다. 허리 반 만한 고렘이 나타났다. 이런 고렘의 안에서 어떤 덩어리들이 시온에게 관심을 보이며 나온다. 

시온이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생긴 건가?’

집념체는 그 정도까지는 없다고 들었다. 어쨌든 앞에서 얼쩡거리기에 시온은 약초를 주었다. 그것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집념체의 색이 점점 짙어져 가는 것 같았다.

‘마법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조금 막막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 어떻게 마법을 가르친단 말인가. 어쨌든 간에 마법은 가르쳐야 했다. 

앞으로 난제가 생길 때 고렘이 단순 공격보다는 마법 하나 정도는 익혀야 난관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 화염 코어 마법서이다. 

그러고 보니 정체불명의 마법서도 떠올랐다. 그 마법서 역시 조사를 더 해봐야 했다. 

“그냥 앞에서 한번 시험해봐야겠군.”

시온은 집념체의 앞에서 화염 마법을 열었다. 화염 마법은 여섯 단계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형태를 바꾸는 것인데 땅바닥의 지열을 바꿔 순식간에 불이 올라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놀이를 펼쳐보고 집념체를 보았다. 집념체에서 어떤 반응이 있는지 보려는 것이었다. 집념체는 반응이 없었다.

‘이런 식이 아닌가.’ 

시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마나를 공급해주면서 색을 진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에밀리온 경과의 결투는 그렇게 해서 완전히 취소되었다. 애초에 시온이 거부한 것도 있지만 다른 자들이 에밀리온 경을 구박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설명할 예정이었다.

“이런 잡다한 얘기는 그만둡시다. 왜 나랑 결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빨리 결투합시다.”

“에밀리온 경. 그 전에 제안해 드릴 게 있습니다.”

“제안?”

제안이라는 말에 에밀리온이 흥미가 생겼는지 콧수염을 만졌다.

“어쨌든 지금 저와 결투를 하시려는 것은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가문 내에서 입지가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맞습니까?”

“............”

“맞은 거로 알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제안은 저에게 온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에밀리온 경에게 양보할까 합니다.”

“기회? 어떤 기회 말이오? 결투보다 좋은 기회는 나에게 없소!”

“이번에 자링 가문이 최대한 집중하고 있는 협상 일정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 협상 일정에 파견되는 인원에 제 자리에 경을 추천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수행하고 오시게 된다면 지금까지 실추됐던 일을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시는 겁니까.”

“그걸 대체 왜 나에게 준다는 것입니까. 그런 기회를 가지려고 난투전에서 우승한 것이 아닙니까. 시온 경이 별다른 배경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기회이니 이제 제가 한 제안이 납득이 되십니까? 대신에 이번 일에 나가시면 저와 척을 지시면 안 됩니다. 저는 그냥 무난하게 이곳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허. 조금만 더 자세하게 연유를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경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물론 이곳은 비공식적인 자리이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런 발언에 대해서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사정은 알고 있소. 마법사.”

“예. 맞습니다. 전 마법사입니다. 거의 마법사이죠. 기사는 이번에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에 대해서 별로 열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허 거참, 이건 이것대로 명예스러운 행동이군.”

에밀리온이 묘하다는 얼굴을 했다. 

“참고로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까? 저는 경을 이미 추천했기 때문에 정보를 전해드려야 합니다.”

“대충은 알고 있긴 합니다. 아마도 벤 남작과의 어떤 중요한 협상이···.”

“예. 바로 거기에 대한 겁니다. 그 협상 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강철 무역으로 알고 있소만 조금 더 늘어난다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

“아니요. 강철 무역이 아닙니다. 벤 남작의 딸 줄리아를 저희가 확보했습니다.”

“!!!”

“이제 이 협상 자리에 끼기 위해서 많은 자가 돈을 쓰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협상은 저희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경이 제 대신에 가서 할 일은 그냥 가만히 잘 있다가 오는 겁니다. 다른 자가 일을 할 테니까요.”

“그렇다는 것은 설마 지금 비밀리에 수행 중이었다는 일정이······.”

“예. 벤 남작의 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확보했습니다.”

“그 소동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그렇다면 저는 정말로 무례를 끼친 것이고요. 사과드립니다. 경.”

“어쨌든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저는 마법 수련 계획이 있는지라 그 일정에 참가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조심히 받겠습니다.”

불구 대천지 원수에서 단번에 은인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시온은 그의 태도를 보고 만족했다. 앞으로 시비를 터는 일이 줄어들 것 같은 것은 물론이고 아군으로 만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ㆍㆍㆍ

‘에밀리온 경이 수도회로 정말로 떠날 것인지는 물어보지는 못했군.’

그건 아마도 다녀와서 물어봐야 할 것이었다. 사절단은 그렇게 길을 떠났다. 벤 남자의 영지는 이곳에서 꽤 가야 하는 거리였다.

시온은 맡겨놓았던 수련공을 찾았다. 강철을 두드리고 있던 남자는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리고 있었다. 시온이 등장하자 그가 바짝 긴장해서 말했다.

“시온 경. 안녕하십니까.”

“안녕한가. 그래서 내가 맡겼던 물건이 다 됐는지 보고 싶다.”

“다 됐습니다. 귀신같이 알고 오시는군요. 어젯밤에 완성했습니다. 이런 재료를 다뤄볼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시온 경을 충실히 모시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재료가 나오면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그런 무언의 어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이런 재료는 제작할 기회마저도 값으로 따져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특이한 물건을 다루는데 흥미까지 가지고 있으니 더욱이 그럴 것이었다. 

제작비를 거의 받지 않고 지금 일을 수행하는 것도 시온에게서 미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숙련공들도 더 높은 제작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희귀한 재료를 좀 더 다뤄보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장에도 관련이 있으니까. 

그는 이리저리 소리를 치며 내부의 기강을 잡았다.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온에게만 친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온에게는 한없이 약한 이 남자는 가장 깨끗한 방으로 시온을 안내했다. 

어린 소년은 시온을 흥미롭고 존경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이 소년은 커서 할 수 있는 직업은 정말로 한정적이다. 

이곳에서 대부분 직업은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비슷한 것을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들에게서 시온이 희망의 등불 같은 것이 된 것이 현 펜부르크내의 시온의 이미지였다. 

“영광입니다. 경.”

그의 과한 행동을 시온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여기 왔을 땐 길도 잘 몰라서 현지인들도 무시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기억을 남기게 됐다.

“그래.”

하지만 시온은 미소를 지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온은 약한 사람에게는 상당히 친절한 편이었다. 

곧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시온이 맡겼던 것을 제작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가져왔다. 

“흠. 이건가?”

“예. 정확한 이름은 없습니다. 점 계열이니 저는 강폭점이라고 붙이겠습니다. 화끈한 열기를 선사해 줄 것입니다.”

그가 넘긴 물건은 주황색의 덩어리가 가공된 구슬이었다. 마법 처리가 된 것이 상당히 신경을 썼다. 

“작동 방식은?”

“다른 점과 비슷합니다. 아마도 그 이상의 화력을 낼 것입니다. 사실 재료가 없어 제대로 된 실험을 못 해봤습니다. 이해는 해주실 거로 생각합니다. 재료가 귀하니까요.”

불발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이런 것을 갖춰 놓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작동하고 않고는 그다음 일인 것이다.

‘희귀 재료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그와의 거래를 끝내고 시온은 강화 단약의 제조에 들어갔다. 각질화로 만들 강화단약이었다. 

펜부르크의 중서부 쪽에 있는 제작소는 많은 마법사로 들끓고 있었다. 이곳에서 강화 단약을 제조도 하고 바로 팔기도 하기에 많은 상점도 늘어서 있었다.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용병들도 여럿 보였다. 단순히 강화 단약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실상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약품도 팔고 있다. 이곳이 활발한 이유였다.

상처에 났을 때 쓰는 것이나 포션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방중술에 쓰이는 것까지 아주 다양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중에는 피임을 시켜주는 목적으로 파는 단약도 있었다. 

시온이 등장하자 알아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메이거 풀이었다. 이곳은 자유마법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별일이 없다면 자유마법사들의 일터 같은 곳이었다.

“시온. 오랜만인데.”

“그렇군.”

“요새 통 보기가 힘들더군. 기사가 돼서 그런가?”

“그렇게 돼버렸다.”

메이거 풀이 시온과 친하다는 것을 과시하며 시온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 행동 자체가 주변 마법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시온과 말을 섞는 것도 부러운데 말을 놓을 수 있는 친분이 있다니, 간단한 대화가 끝나자마자 그가 시온에게 물었다.

“이곳엔 웬일이지?”

“강화 단약을 만들까 한다.”

“만든다고? 내가 숙련된 자를 소개해 주겠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자야. 한 달 치는 일이 밀려있지만 내가 말한다면 바로 해줄 거야.”

“말은 고마운데 내가 직접 할 거라 그냥 도구만 빌리면 된다.”

“강화 단약도 제조할 수 있었나?”

그가 정말로 놀라면서 말했다. 보통 시온처럼 여러 가지를 다루는 자는 보기 힘들었다. 

시온이 무사히 기사가 되었고 난투전에서 우승한 것만 해도 이미 기사로서의 수련도 상당하다는 뜻인데 이런 것까지 할 줄 안다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어쨌든 제작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제작소는 이미 여러 가지 제작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이 붙었다고 소리를 지르는 난동도 있고 나름 질이 떨어지고 허름해도 묘한 맛은 있었다. 

시온이 들어간 곳은 가장 좋은 방이었는데도 도팽 가문에서 썼던 제작 방에 비하자면 형편이 없었다. 어쨌든 시온은 능숙하게 재료를 풀고 각질화를 추출해 얻은 것으로 단약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해가 노을로 변하고 있을 무렵 시온은 결국 강화 단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각력단을 만든 것이다.

“후. 이것도 내 목숨을 한 번은 구해줄 수 있겠군.”

검붉은 단약을 보면서 시온은 성취감에 물들었다. 사실 정수제조보다는 훨씬 쉬운 작업들인지라 레시피만 있어도 지금보다 숙련도가 낮아도 성공할 수 있는 그런 난이도였다.

어쨌든 각력단을 챙기고 나서 밖으로 나오자 펜부르크가 노을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시장은 여전히 활발했다. 밤이 되어서야 팔 수 있는 방중술 제품들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본격적인 장사는 이제 시작이다. 

그런 흥겨움 속에서 목적을 마친 시온은 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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