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5)
에미리온 경을 사절단으로 보내고 나서 시온은 해야 할 일들을 꾸준히 했다. 그것은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들이기도 했다.
온천탕에 가서 정치하고, 인맥을 다지고 마나 수련법을 단련하고 쌓인 마나를 마나석에서 흡수한다.
더 좋은 재료를 길러내기 위해 몇 가지를 방법을 실험한다. 한정된 푸른 액으로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일련의 수색 과정이었다.
미아와의 일도 충실히 지냈다. 미아는 아직도 시온이 일부러 강체술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고 착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떤 급보가 펜부르크에 도착하게 된다. 급보는 벤 남작에게 보냈던 사신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시온도 관련이 있었다. 시온도 여기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다른 자에게 양보했다. 에밀리온 경에게 양보한 것이다.
에밀리온 경은 시온에게 자격을 받고 대리의 자격으로 그곳으로 갔다. 그 함박웃음을 보아 시온은 그를 이제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고 확신한 것은 덤이었다.
거기서 벌어질 이란 건 별로 없었다.
체스게임에서 킹을 포획한 뒤에 이 게임을 계속할지 하지 않을지 그런 것을 물어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니 별일이 없을 거라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곳에서 세운 전공이라고 해봐야 겉치레다운 것일 뿐이다. 진짜 전공은 그 이후에 생길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그에게 양보한 것이다.
시온은 그날도 마나를 수련하며 온천 안에 있었다. 이곳의 온천은 확실히 피로를 해소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많은 양의 마나를 정갈하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됐다.
제국의 문화답게 오후인데도 온천은 활발한 편이었다. 시온도 적당한 곳에서 피로를 풀며 마나를 정리하고 있었다.
필립스가 뛰어오기 전까지 말이다.
“시온 경 처리하셔야 할 큰일이 생겼습니다.”
“그게 뭐지?”
필립스가 주변의 눈치를 봤다.
“그것이···. 여기서 말을 하기엔 곤란한 것입니다.”
이곳의 눈과 귀는 곧 정치의 연장이다. 이런 인물들에게 숨겨야 한다는 것이라면 좋은 일은 아닐 것이었다.
뿌연 증기 속에서 대충 밖으로 나간 뒤 몸을 닦고 밖에서 필립스를 보았다. 필립스의 얼굴은 아주 창백해져 있었다.
“그래, 그 급한 일이란 게 무엇이지.”
“바로 마리 자링님에게 가봐야 하실 것 같습니다. 마리 님이 부르셨습니다.”
“그제도 다녀왔는데 왜?”
“마리 자링님이 자세한 건 얘기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약간의 내용은 알고 계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누가 말하지 말라고 하든?”
“사절단이 모두 살해됐습니다.”
“?!”
“정말입니다.”
시온은 의심하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
“아마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벤 남작이 격노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절단을 모두 죽인 것 같습니다.”
“그 사절단 보통 인사들이 아니었는데. 다 죽였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전쟁 선포가 아니겠습니까? 선전포고라고 생각합니다.”
어레이 경의 조카답게 어렸을 때부터 질이 좋은 교육을 받아온 필립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벤 남작이 하는 짓이 선전포고라는 것을 바로 알아챈 것이었다. 어차피 내일 내에 도시에 퍼질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정보였다.
“음······. 사실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 가능성은 아니었지만 터지긴 터져버렸군.”
시온은 최악의 상황도 물론 인지하고 있었다.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도시 내에 이 정보가 풀리기 전에 준비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필립스.”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금화를 내어 줄 테니 식량을 쟁여놔라. 닥치는 대로 구매해놔라. 창고도 임대해 놓고.”
“예? 대체 무슨 뜻인지요?”
“나도 네 생각과 같다. 그러니 선전 포고에 대해 개인적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경, 그것이 식량과 무슨 관계가.”
“당연히 관계가 있지, 이번 일로 관련해서 식량이 폭등할 거다. 너는 공성전을 해본 적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배워본 적은?”
“있습니다.”
“뭐라고 하디?”
“공성전에서 중요한 건 긍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양측에서 가끔 벌어지는 기사의 결투가 앞서 있을 전투의 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런 멍청한.”
“예?”
“그런 것밖에 가르치지 않았단 말이냐?”
“예···.”
“잘 들어. 공성전이 벌어지면 수성 입장에서는 곧바로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난다. 그렇다는 것은 그 식량 값이 폭등한다는 얘기야.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팔지 않게 되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는 확실하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지. 식량이 없으면 굶주린 사람은 폭동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래 죽냐 저래 죽냐 비슷한 일이거든.”
그리고 그런 심리가 돌기만 해도 공성전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든 관련된 물건의 품목의 값은 모두 오르기 마련이었다.
‘대단하시군. 마치 노련한 상인 같지 않은가.’
필립스가 감탄했다. 그는 시온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시온이 말하는 대로 명령을 이행하면서 자신의 약간의 재산도 넣어서 사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금도 최대한 사놓아라. 소금이 가장 비싸게 오를 물건중 하나지.”
도시에 정보가 돌기 전까지 하루 정도의 말미가 있을 것인데 정보가 돌고 나면 아무도 물건을 거래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을 지켜볼 것이다. 그러니 값이 싼 시점은 지금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온조차도 정말로 펜부르크가 공성전에 들어갈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예비해놓고자 하는 그런 것이었다.
“너 혼자선 무리일 것이니 초이와 함께 작업에 나서라.”
그렇게 두 명에게 일을 맡기고 시온은 펜부르크 거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성은 여전히 많은 인파로 득실거렸지만 몇 명은 아주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부 정보를 알아챈 자들일 것이었다.
시온도 그중에 하나였다. 시온은 그곳을 지나면서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행동하려고 노력을 했다. 다급한 모습을 보여봐야 이미지만 깎는 일이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차라리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그 행동은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시온 경 아닌가?”
“소식을 들었군.”
“결연한 자세야. 과연 난투전의 우승자답다.”
“나이도 젊고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극비 회의에 참석하다니.”
“실력이 되지 않는가. 단순히 배경만 믿고 깝죽거리는 자들하고는 다르지.”
기사들이 시온의 참석에 들떠서 수군거렸다. 배경이 없는 시온의 성공은 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집무실 안은 약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마리 자링의 난감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시온 경, 오셨습니까.”
“시온 왔나.”
안면을 튼 기사나 귀족들이 시온을 보고 인사를 했다. 사람이 친해지는 것은 딱히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난투전에서 우승하고 마리 자링의 핵심 인력이 되자마자 냉담했던 많은 자가 갑작스레 친절해진 것이다.
“시온 빨리. 너도 여기에 의견을 내.”
마리 자링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몇 가지를 짚으며 말했다.
“얘기는 들었어?”
“완전히는 못 들었습니다. 대략 사절단에게 문제가 생겼다고만 들었습니다.”
“사절단이 거의 살해됐단 말이야. 숙부가 완전히 광분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기 딸을 생각하지 않는 건가? 비정한 자 같으니라고.”
시온은 솔직히 기가 찼다. 시온도 출신 낮은 귀족이라 완전히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희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나같이 없는 자는 이런 상황을 줄타기해야 하지.’
벤 남작의 딸 줄리아는 펜부르크의 첨탑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다. 보호라는 명분으로 줄리아를 가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포로였다.
협상을 거저 가져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니 저번의 결혼식 행렬의 습격 사건의 성공에 그렇게 좋아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선택지는 몇 가지 극단적인 선택지가 섞일 수밖에 없다.
사절단을 죽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복수로 줄리아 역시 처형을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을 말이다. 물론 이제 영지전 자체는 피할 수가 없는 상태로 보였다.
보아하니 저 문서의 결재는 소집령을 뜻하고 있었다. 소집령이 내려지면 많은 군사가 소집되게 된다. 펜부르크에 징집령이 내려지는 것이다.
중세의 군대는 상비군의 비율이 낮았고 대부분은 이렇게 일하던 남자를 차출해 갑자기 훈련을 시켜 전쟁에 나가게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은 용병을 쓰는 일이 많았다.
아마도 제국 관리소에서 용병들을 모두 고용해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이것은 그녀에게서도 그렇게 좋지 않은 선택이긴 했다. 그녀가 이렇게 마구잡이로 용병을 고용한다면 그 비용을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용병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대금은 확실하게 받아먹는 녀석들이었다. 대금 문제가 모호하면 편을 바꾸는 일도 은근히 많았다. 그러니 이 문제는 길어질수록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시온은 그런 회의에 낀 꼴이 되었다.
“시온.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지?”
수십 명의 집중된 시선이 시온에게 기울었다. 여러 가지 선택지에 대해선 기사와 귀족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 상황이었다.
이들은 시온의 의견을 본능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갑자기 혜성같이 등장한 자유 기사이자 난투전의 우승자, 마법사이기까지 한 시온의 의견을 말이다.
그런데 시온은 사실 딱히 이런 깊은 생각을 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서임을 받기는 했지만, 약식이었다. 이런 문제보다야 개인적으로 급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시선이 쏠리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고 해서 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줄리아를 처형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앞으로도 좋지 않은 여론을 형성할 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무사히 승리한다고 해도 이곳을 안정적으로 인정받는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친족살해자라는 딱지가 붙으면 어떤 꼬락서니가 날지 벌써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사실 개인적인 이유가 컸다.
직접 줄리아를 데려온 입장에서 상당히 찝찝한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줄리아 목숨을 구해준 게 확정이 되면 줄리아에게서도 뭔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왕이면 그쪽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처형 쪽에 의견을 준다고 하면 개인적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과연 시온 경 다운 의견입니다. 굉장히 명예스러운 답변이군요. 저도 시온 경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레이 경이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는 듯이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자 다른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이들의 의견이 상당히 갈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게 표면 위로 떠오른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 버리자 어레이가 시온 쪽에 의견을 실었고 기사들은 모두 시온의 의견을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어레이가 귓속말했다.
“시온 경. 그리고 에밀리온 경의 재산의 일부가 일부 경에게 상속되었습니다. 제가 살짝 봐 드렸습니다.”
‘뭐?’
에밀리온 경이 죽었다고 한다면 딱히 상속자가 없는 에밀리온 경의 재산이 시온에게로 들어올 수도 있긴 했다.
원칙상 영주에게로 돌아가긴 하는데 지금 벌어진 일 자체가 시온의 대리로 간 것이라 시온이 일정 부분은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희귀 재료를 낙찰해 가지 않았나?’
그와는 워낙 안면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