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전(2)
시온은 전의를 상실한 두 명을 처리하고 등을 보이는 나머지 하나를 바라보다가 정신이 들었다.
여러 소리가 엉키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히 지금은 난전 속에 있었다. 그러나 시온은 동시에 편안했다. 그냥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만 공급하면 몸이 효율적으로 움직여 경보병들을 박살 냈다.
그렇게 한 명의 흉통을 쳐냈을 때 시온은 문득 많은 숫자를 처리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흉통에 맞은 녀석은 숨이라도 붙어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머리가 깨져서 이미 절명했다. 시온은 지치지 않았다. 마법사라서 단순히 회피용으로밖에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육체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느새 입고 있던 갑옷도 피가 상당히 끼얹어져 있었다. 시온은 바닥을 박박 기는 보병 하나를 보다가 주위를 훑었다. 열다섯 명 정도의 인간 형상이 깔렸었다.
‘마법을 굳이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마법은 혹시 모를 수단으로 남겨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번 전투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회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의 전투는 회전이라고 하는 거대한 전면전으로 번지고 승자와 패자를 가르곤 했다. 지금 하는 이런 것들은 아무리 해봐야 졸병과 나이트의 싸움에 불과했다. 그 한두 개가 결정짓는 싸움이 아니었다.
체스판이라고 한다면 그 전체의 기물이 한 번에 총력전을 하게 되는 그런 형태가 왕들의 승패를 가르게 되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냐! 네 녀석!!”
그리고 시온이 만든 결과를 보고도 겁을 먹지 않는 자가 나타났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중무장. 분명히 기사였다.
괜히 기사들이 마상창 시합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결투란 결투에는 전부 환장해 있었는데 그것이 진짜 영지전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기사가 출세하는 길은 이렇게 결투를 통해서 이름을 알리는 게 가장 빨랐다. 시온은 진짜 상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침을 삼켰다.
앤드류의 메모라이즈가 기사와의 결투에서도 굉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머리론 알곤 있었지만, 필립스와 연습으로 겨뤘던 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았다.
“말해라. 나는 아길레 비드다.”
시온은 이름을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기사로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냥 마법사로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자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상대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문답 무용이었다. 상대의 감정이 폭발했는지 시온에게 전력을 다해 돌진했다. 시온은 그가 육중이 돌격해오는 모습에서 칼리 경이 떠올랐다.
‘집중하자 집중해.’
여차하면 준비된 임시 마법도 많이 있었다. 폭점을 터뜨리면 적어도 도망갈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쓰기에는 아까웠다.
조금 더 수를 겨뤄보다가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빠르게 앤드류의 행동 각인 마법에 의해서 몸이 제국 메이스 교본의 팔 식을 재현했다.
팔 식은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무기 파괴를 노리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시온이 생각해도 동작이 너무나 빠르고 정확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육체를 기반으로 한 기억마법에 의존하기에 최상의 자세와 완벽한 균형감의 근속도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흐어어억!”
갑작스러운 반격에 아길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냈다. 충돌하면서 동시에 그의 무기가 쩍 하고 금이 가고 있었다.
그랬다. 그의 무기는 시온의 메이스보다 격이 낮았다. 무기 파괴의 식도 적절했지만 방어구에 투자한 만큼 무기에는 그만큼 투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금이 갔을 뿐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승부가 결정 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온이 연속으로 내려치는 동작을 막아내는 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의 검이 메이스를 버티지 못하고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시온은 아길레의 두 눈동자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떠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입이 벌어지면서 소리쳤다.
“잠···. 잠깐···.”
시온의 메이스가 그의 투구에 내리쳐졌다. 시온은 다시 한 번 앤드류의 메모라이즈의 결함을 확인했다. 한번 시동이 되면 중간에 끊기가 어려웠다.
원래 완벽히 통제 가능한 육체였다면 그의 대가리를 깨는 것보다는 제압하는 것을 중점에 뒀을 것이다. 이왕이면 몸값을 받아내는 것이 언제나 좋은 판단이었다.
마구잡이로 죽이면 괜히 복수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리 정당했다고 해도 해당 가문이 원한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반면에 몸값을 받고 풀어주면 이 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시온은 그가 지푸라기처럼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네다섯 바퀴를 바닥에 구르고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즉사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시온의 주위에 있던 경보병들이 모두 기겁을 해서 해일 갈라지듯 뒤로 쭉 물러섰다.
그가 손을 올리는 마당에 그 손을 내리찍을 이유는 없었다. 살아있으면 오히려 다행이니까. 그리고 그 손의 방향이 위로 올라가서 시온을 향한 것으로 보아 시온이 예상하는 그것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죽음을 직감했는지 그의 목소리에서 나온 것은 다른 단어였다.
“이···. 이름을···. 내가 누구에게 졌는지 알고 싶소.”
“시온 니벨룽.”
그리고 손이 내려갔다. 주위에서 웅성거렸다.
“시온 니벨룽!”
상대의 전의가 완전히 꺾여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온이 쓰러트린 자는 이곳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다. 모두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간다.
숫자는 여전히 많았는데 시온을 둘러쌀 생각을 하지를 못한다. 그나마 여유가 있던 쪽에서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후퇴하는 것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이 어두운 시야에서 가끔 불타는 마을 덕택에 조금씩 보였다. 시온은 전투 자체는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기도 했다.
사냥꾼으로서의 활동했던 경험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장 사냥하기 쉬운 때는 바로 이때였다. 어떻게 보자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그간의 준비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었다.
시온은 빠르게 달라붙어서 메이스를 휘둘렀다. 이 와중에도 앤드류의 메모라이즈는 잘 작동이 되어서 여전히 일 타에 한 명씩 박살이 났다.
거의 등을 보이는 상황이기에 할 수 있는 만큼 계속해서 쫓아가서 후려치면 됐다. 시온이 있는 장소가 그런 방향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무래도 한쪽이 무너져 버리자 많은 경보병과 용병이 참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망아지처럼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저 공포에 사로잡힌 승냥이들을 사냥하기만 하면 됐다. 시온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어떻게 보자면 중요 인물을 사로잡고 다른 자들이 목숨을 빼앗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하게 숨통을 끊어놓는 식으로 가야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과는 중요함이 차원이 달랐다. 영지전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되면 단순히 한쪽이 나가리가 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냥 전멸당한다고 봐야 했다. 그 정도로 인권의 상태가 영 좋지가 않았다.
그 정도로 이제 잡힐 회전이 생사를 가른다고 봐도 좋으므로 시온은 여기서 최대한 숫자를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이 같은 내용은 암묵적으로 아까 전의 야영지에서 논의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많기도 많군.’
꽤 처리한 것 같은데 한 번 경보병들이 도망가자 원체 밤인지라 잘 보이지가 않았다. 달도 제대로 뜨지를 않아서 시야가 제한되었다.
그나마 아까 전의 전투가 제대로 벌어질 때는 불타는 마을 근처여서 시야가 잘 보였는데 약탈자들이 아예 도망가기로 마음을 먹자 상당히 잘 도망갔다.
“실수했다.”
시온은 실수를 인정했다. 아무래도 말을 다시 타서 공격해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들 전부 통일된 지휘 체계를 통해 기마해서 공격해야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기사들이 지휘계통이 깔끔한 것은 아니었다. 명목상 어레이가 지휘하고는 있지만 각자 다들 자기 고집대로 움직이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의 기사란 족속들은 거의 그런 식이었다. 비단 시온 쪽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양측의 기사들이 다 이랬다.
시온은 깊숙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다시 원래의 지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전투 자체는 파죽지세로 이겼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급히 왔다고 해도 기사는 기사들이었다. 정예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의 완승은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기는 했다. 그 정도로 시온의 활약이 너무나도 뛰어났다. 시온이 어둠 속에서 등장하자 모두가 그 점에 대해서 확고히 했다.
시온은 거의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몇 명을 작살 냈는지도 까먹었다. 그 정도로 가쁘게 상황이 진행되었다.
‘어우. 피 냄새 봐. 좀 씻고 싶은데.’
시온은 이게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인지 아니면 주위에서 나는 것인지 헷갈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곳에서 다 나는 것일 거였다.
바람이 워낙 세차게 부는 탓에 화마가 절로 꺼졌다. 피해는 생각보다 컸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타버렸다. 그러나 상대의 피해는 더욱 컸다.
“후우. 시온 경. 맞습니까?”
투구 하나가 올라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특유의 얼굴을 보니 어레이 경이었다.
“부상 없습니까?”
“예. 저야 뭐. 그런데 시온 경. 정말 또 한 건 하셨더군요.”
“?”
“저는 보지는 못했는데 아길레 경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셨다고. 이번 승리는 그것 때문에 대승했습니다.”
“아길레. 유명합니까?”
“당연합니다! 설마 여기에 끼어 있을 줄이야. 벤 남작의 중요 카드 하나를 제거했습니다.”
시온은 들떠있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아길레 경이 살았습니까?”
“아직 확인은 안 했는데 아마 숨이 끊어진 것 같더군요.”
‘일단 몸값 하나 날아갔고.’
ㆍㆍㆍ
임시 야영지는 다시 구축되었고 시온이 잠시 한숨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는 오후를 앞둔 시간이었다. 이제야 피해 상황과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에 확연히 보였다.
게다가 많은 기사와 종자가 시온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다들 시온의 능력에 경악해버린 것이다. 시온이 처리한 약탈자도 많았지만, 아길레 경을 결투한 것이 모두의 귀에 돌아갔다.
목격한 자들도 많았다. 시온은 불타 버린 마을과 방앗간을 보았다. 방앗간은 멀쩡했는데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엄청나게 죽었군.’
마을 남자도 거의 전멸 상태였고, 약탈자들도 거의 반은 죽여서 들판이 엉망진창이었다. 이러니 회전에서 보일 광경은 어떠할지 시온은 벌써 상상이 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