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전(4)
‘분명히 지휘계통 문제 생긴 것도 기사도 때문인 것 같은데.’
비슷한 일을 이미 겪은 적이 있었던 시온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사소한 일이었지만 헨슨과 오드밀 같은 정통 귀족 기사인 둘이 지휘권을 시온에게 넘겨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신분도 하급 귀족 태생인 데다가 장남도 아닌 막내였고 기사이기 전에 마법사인 시온에 대한 정보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는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아래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시온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시온은 노련한 그의 얼굴을 보고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당시 엔클리 경의 습격에 같이 가담했던 용병인 킬번이었다.
그 역시 나름의 지위를 부여받고 이번 영지전에 참가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용병을 주로 쓰는 일이 많았다. 어쩔 수 없었다. 젊은 남자를 모두 데려갔다가 잃게 되면 도시가 향후 몇십 년간은 마비돼 버린다.
그러니 그러한 방법은 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전이나 어떤 전쟁이나 용병을 쓰는 비율이 높았다. 차라리 세금을 더 걷고 그 금액으로 용병의 임금을 채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렇군. 자네가 참가한다니 든든하군.”
“하하 빈말이라도 정말 감사한데요. 그 이후에 기사도 되시고 단번에 공을 세우시고 이렇게 중요한 자리까지 차지하시다니 비범한 사람인 줄은 알았습니다만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비법 좀 배우고 싶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시온은 그가 부럽다는 듯이 말하자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 역시 한 자리 받아서 한몫 단단히 챙긴 것이다.
그 일이 끝나고 임시직으로 도시 치안 관리장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들리는 얘기에는 온갖 강력 범죄자들을 모두 소탕했다고 했다. 그래 봐야 잠시 부여받은 권력이고 아무리 작은 위치라도 하급 귀족인 것도 아닌지라 바로 내려갔지만 그런 얘기를 어레이에게 들었다.
“비법? 간단해.”
장난기 어린 그의 얼굴이 정말로 진지하게 변해서 경청했다. 정말로 시온의 입에서 어떤 단어가 나올지 미칠 듯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운이 좋으면 돼.”
그가 김빠졌다는 얼굴이었다.
“저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물론 마음을 열고 듣겠습니다만, 제가 제법 사람 보는 재능이 있거든요. 보자마자 직감했던 게 있습니다.”
“뭔데?”
“이 사람은 분명 대단해진다.”
시온이 피식 웃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몰랐지만 들어보니 나쁘진 않았다. 엔클리 경을 급습해야 할 때는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근데 말이야. 하나 나도 궁금한 게 있거든.”
“무엇이든 성심껏 답변해 드리죠. 시온 경은 이제 제 꼭대기에 있으니까요.”
“어레이가 자네에 대한 칭찬을 자자하게 하던데 그 뭐야 범죄자들을 죄다 잡아넣었다고,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영업 비밀이긴 합니다만 저희 사이에 비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놀랄 일도 없죠. 저기 귀를.”
“뭔데?”
“딱 봐서 나 같은 놈이다 싶으면 그냥 집어넣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이유야 만들면 되죠. 그리고 금화도 챙기고 말이죠.”
그가 손을 동그랗게 만들며 말했다. 시온은 아주 기가 찼지만 역시 처음 봤던 인상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자들보다도 진짜 용병다운 녀석이었다. 지독한 구석이 있다.
“너도 어지간히 금화 좀 챙겼겠는데.”
“경만 할까요. 경에 비하면 전 거집니다.”
“흠.”
“이번 전투 어떻게 보십니까?”
“이거 군사기밀이야.”
“저도 지금 직위 하나 맡고 있습니다. 경 명령이라면 들어갑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전세는 숫자가 중요하지. 그리고 오리엔 영주의 경보병, 중보병은 예상보다 많이 도착하고 있고.”
“불리하다는 뜻입니까?”
“대신에 우리는 지형을 가지고 있지. 근데 하나 묻자 만약에 너 말이야. 네가 데려온 애들하고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갈 거냐? 그니까 금화를 더 챙겨주면 말이지.”
“뭐 다른 놈은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전 아닙니다.”
“그러면 벤 남작 쪽의 용병을 꼬셔올 수도 있어?”
“시도는 해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왜 넌 아니지?”
킬번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시온을 보며 말했다.
“금화 보고 편 바꾸면 오래 못삽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쪽에 붙어야 한다는 거죠. 불리하고 자시고 저는 그런 거 안 믿습니다.”
“그러면?”
“이길 사람을 믿죠. 뭔가 보여줄 거 아닙니까?”
“아니. 운이 좋았다니까.”
“그러면 그걸로 된 겁니다. 운이 반복되면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증거니까요.”
“그런 거 믿는 부류였나?”
“몇 명한테는 말이지요!”
ㆍㆍㆍ
이곳의 명목상의 참관자인 마리 자링은 시온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시온은 기사 간의 분열 문제도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평소에 자기에게도 으르렁대는 것이 일상이었던 헨슨과 오드밀이 시온과 붙어 다니는 것만 봐도 관련된 문제를 시온이 해결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네. 뭔가를 맡기면 항상 그 이상을 해낸단 말이지.’
사실 이번의 출정. 시온에게 기사를 위임해 반격에 나서라고 했던 사실도 많은 반대를 가지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골든 평원에 도착한 시온이 만들어 낸 기사 아길레와의 결투에 대한 소식은 모두를 흥분케 했다. 아길레 라면 벤 남작의 신임하는 뛰어난 기사 중 하나였다.
시온의 이름은 아직 모르는 자들이 많았지만, 아길레 같은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 즐거운 일이 회전 전에 들려오다니 그 반대의 여론이 한 번에 꺼진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시온을 중임한 마리 자링의 판단까지 여러 사람의 호감을 산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그녀가 시온을 유심히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 주력 기사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냐고 시온에게 오자마자 물은 전력이 있었다.
그때의 시온의 대답은, 어떻게 하다 보니 였다. 마리는 그 대답을 단순히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온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설득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저 사람을 더 중하게 써야 해.”
그녀 자신의 존재도 여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하급 귀족인 시온을 더 중요한 위치로 끌어오고 싶었다.
‘남작 작위를 줘버린 다던가?’
이번 회전에서 승리한다면 벤 남작과 벤과 협력한 남작의 강력한 작위 몇 개가 그녀의 손으로 들어오게 된다. 물론 몇 가지 치열한 반대 논쟁은 거쳐야 하나 이러한 문제를 그녀는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남작 작위를 주어서 완전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꾸 들었다.
“새로 내릴 지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순간 넋이 나간 듯이 골똘할 정도로 시온에게 남작 작위를 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 정도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ㆍㆍㆍ
시온의 예상대로 벤 남작의 진형은 아주 지휘계통이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리엔 지역과 펜부르크의 지역은 앙숙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오리엔 영주의 결단에 강제적으로 동맹이 맺어진 상황이었다. 아무리 겉으로는 동맹군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앙금이 깊어 서로서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다.
“도대체 지휘부는 뭐 하는 것이지?”
“가만히 있다가는 공을 다 빼앗긴다. 이건 당장에라도 돌진해야 한다. 기사라면 자고로 저 정도의 난관에서 더욱 빛을 발하기 마련이지.”
이러한 두 논리가 오리엔 영주 쪽에서도 벤 남작의 쪽에서도 팽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누가 봐도 숫자가 더 많은 것이다. 숫자가 많은 데다가 준비도 더 오래 했으니 질도 좋은 게 당연지사였다.
그러니 이러한 문제는 곧 기사나 마법사나 직책을 부여받은 귀족들의 전공에 대한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시온에 대한 이름은 심지어 시온도 예상치 못할 만큼 커져 있었다. 아길레 경을 결투로 처리한 시온의 이름은 이미 아길레 경의 유명세를 그대로 다 계승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시온과의 결투에서 승리해 포로로 만든다면 이 전투에서 가장 큰 전공 중 하나를 차지한 것이 된다. 그 정도로 시온의 존재가 가치가 높아진 것이었다.
오리엔 영주 쪽의 기사들은 아예 따로 시온쪽으로만 돌파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다.
“필시 응한다. 그 정도 기사라면 반드시 선봉에 서있을 거다.”
“선봉엔 제가 나서도 됩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나도 양보 못 합니다.”
“네가 제일 나이가 적잖아! 선배인 내가 먼저 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전공에 선후배가 어디 있습니까? 만약에 시온 경의 메이스에 머리라도 깨진다면 그것만큼 영주님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메이스에 약하지 않습니까?”
“어린놈의 새끼가 전공에 눈이 멀어 나를 모욕했나?!”
“메이스 결투에 강한 제가 나서는 것이 맞습니다!”
“두 분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럼 투표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왜 타지사람이 결정하려는 것이오? 시온 경은 자링 가문의 기사이니 자링 가문의 기사가 상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길레 경의 복수는 제가 합니다.”
안 그래도 서로 독립적인 명령체계에서 시온의 존재 때문에 서로 멱살을 잡고 당장에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은 다툼이 있을 정도로 난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모르는 사실은 시온이 선봉에 나설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마법사들을 지휘하겠다고.”
“음,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어?”
“전 원래 마법사입니다만···.”
마리 자링이 잠시 착각할 정도로 시온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선이 있을 정도였다. 마리는 그 점을 깨닫고서는 아차 싶었다.
시온이 마법사에게 명령 내리겠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시온도 마법사 패가 있는 마법사였고 동시에 기사이니 그곳에 달려드는 특수 병과에 맞서 싸울 수도 있다.
마법사라는 것은 이곳에서 어떠한 형태의 전투든 핵심적인 요소였다.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물리적인 공격에 약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이곳에 뛰어드는 정예 기사들이 있었다.
살인 병기 중에서도 가장 살인 병기만 추려서 난전 속에 집어넣어 무너뜨리는 것이다.
‘뭐 나름대로 깊은 생각이 있겠지. 그리고 딱히 선봉에 세울 생각도 없었고. 하겠다는 놈도 많은데 어차피 반대할 생각이었어.’
그녀는 시온이 이 회전에서 부상 없이 치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시온의 의견을 간단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깊은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시온의 생각에 마법사 부대 쪽이 가장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무슨 큰 전공을 세우기보다는 안전하게 상황을 치러서 여러 가지 이득을 취하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시온의 판단이었다. 여차하면 도망가버리면 되니. 뒤쪽에 배치되면 아무래도 여러 가지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