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304)

영지전(5)

진형을 잡고 승리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이곳의 전투는 예의 같은 것이 있었다. 

체면치레 같은 것인데 영지 전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컸다. 이런 같은 가문에서 일어나는 내전 같은 경우는 이미지 같은 것이 생각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제 회전에 앞서 서로가 내세울 수 있는 기사들끼리의 결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요청하면 응해서 자웅을 겨루는 일이 많았다. 

“집요한데요. 또 시온 경에 대한 요청입니다.”

“시온은?”

“안 한답니다.”

“그럼 또 거부해.”

벌써 다섯 차례였다. 의외로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것이 중요해서 시온이 거부하면 다시 돌아간다. 

아니면 다른 기사인 헨슨이나 오드밀을 출전시키겠다고 마리가 대신 답변을 보내는데 그건 또 싫다고 저쪽이 거부한다.

그런 답변이 계속 교환이 되는 상황이었다. 

‘마법사들을 맡겠다고 하길 잘했군.’

다섯 명 다 다른 기사였는데 그들 모두 시온을 지목했다. 시온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집요하게 군단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시온은 회전이 벌어지기 전에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이런 미친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에 하나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상태로 전선에 놓이게 된다는 건데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시온 경, 영예스러운 순간일 겁니다만···.”

오드밀 같은 경우는 가문의 병력을 모두 이끌고 이곳에 참가한 상황이었다. 그는 아주 속이 타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였다면 바로 결투에 응해 검을 나눴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속에서 그렇게 불이 나면서도 그 감정을 억누르는 데 전념했다. 이미 우스운 꼴이 돼버린 상황이었다. 

다섯 명의 기사들 모두 이름이 있는 자들이었는데 이들 모두가 시온을 지목했다는 것은 그 정도로 격차가 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대체 왜입니까.”

결국에 참다못한 오드밀이 말하자 시온은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돌려 말하기로 했다.

“공을 나누고 싶은데 저들 다섯이 모두 저를 지목할 줄은 몰랐습니다.”

오드밀의 표정이 그 한마디에 단번에 풀어졌다.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 생각을 한다. 

‘하긴 부족한 내 잘못이 아닌가! 시온 경을 의심하다니 나도 아직 멀었어.’

여러 불만이 시온의 한 마디에 단숨에 해소되는 상황이었다. 오드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가자 킬번이 옆에 와서 입을 열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러면?”

“아니요, 아닙니다.”

“네가 나갈래?”

“저는 그럴 깜냥이 안됩니다. 제가 무슨 인생을 빛내겠다고 전 그냥 최대한 안전하게 노후 자금이나 잘 마련하면 됩니다. 그게 제 꿈입니다.”

이곳의 용병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아주 올바른 생각이었다. 시온은 킬번이 마음에 들었다. 계속 데려다가 쓰고 싶었다. 

저쪽에서 시온의 보조를 담당할 마법사 하나가 왔다. 그는 전형적인 귀족 출신의 마법사였다. 게다가 마법사 탑에서 일하다 온 경력까지 있는 마법사였다. 시온보다도 단계도 더 높았다. 

원래라면 시온이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리가 그 자리를 시온에게 내줬으니 그가 시온의 부 담당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시온 님. 처음 뵙겠습니다. 전 안두르 라고 합니다.”

“시온 니벨룽이요.”

“마법사라는 이야기가 있으시더니 가까이에서 보니까 확신이 드는군요. 분명히 마법사이시기도 합니다. 어찌 이런 진귀한 일이.”

“신기한 일이요?”

“당연한 말입니다. 한 가지만 달성하는데에도 십 년이 넘게 걸리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 가지다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이걸 신기하다고 할 수밖에요.”

그의 표정에서 부러움과 질시가 섞인 복잡한 표정이 흘렀다. 시온의 마법사의 재능만 따로 봐도 대단하다고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시온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수단이 이들에게 그런 착각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만큼 앤드류의 메모라이즈가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더 좋은 교본을 구할 수 있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전투력을 얻을 수도 있었다. 

다만 장기간 전투는 무리였다. 아무래도 전투 자체도 마나를 쓰다 보니 순수하게 감각으로 익혀온 기사에 비할 것은 되지 못했다.

“그런가. 뭐 어쨌든 미리 말해둘게,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안두르는 시온을 몹시 어렵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딱히 내가 지시할 것은 없고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일은 그쪽에 맡기겠습니다. 물론 그 공은 따로 마리에게 말해서 언급을 해둘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사실 마법사를 관리하라고 해도 배워야 할 처지였다. 그러니 이렇게 얘기하면서 곁눈질로 대충 배우는 정도가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온의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어 회전이 시작되어 버렸다. 뭔가 대강의 사항을 정하기도 전에 오후에 갑자기 화살 세례가 시작된 것이다.

중요도를 따지자면 마법사들이 최우선이었지만 이들의 공격은 단발적이고 휴식시간이 필요했다. 자리도 잡아야 했고 사거리도 짧았다. 그래서 궁병의 활용도는 높았다.

벤 남작의 진형 쪽에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진형에 화살을 퍼부으니 갑작스럽게 사람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곧 대응 사격으로 인해 아주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서로서로 향해 미친 듯이 화살을 날리는 것이다. 다만 언덕 지형에 있는 탓에 벤 남작 쪽이 너무 불리했다.

‘하여튼 급하게 굴 거 같더니, 예상대로네.’

시온은 여전히 상대의 진형을 보는데 눈을 떼고 있지 않았다. 전혀 통일되어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사격 명령도 분리되어있는 지휘체계에서 답답한 누군가가 발사를 명령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자면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다. 게다가 그것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 이미 저쪽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수적인 우위에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장렬히 뛰어들 것도 아니고.’

시온은 수백 명이 날리는 화살 세례가 만들어 내는 장관을 구경했다. 장비가 빈약한 편인 궁수들이 쓰러져 나가고 부상 입은 자들이 뒤로 실려 나간다. 치료 마법사들이 치료할 것이었다. 

이러한 치료 마법사들의 꼭대기에도 시온이 있었다. 따로 명령을 내린다면 이들의 움직임에 변화를 줄 수 있었지만 할 필요도 없었고 할 마음도 없었다.

‘운이 좋긴 좋아. 원래라면 이런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그냥 저기서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마법사였겠지.’

괜히 선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던 시온은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 혀를 내둘렀다. 이곳의 인명이 낮긴 낮은 편인데 누가 봐도 벤 남작의 궁수대의 피해가 심각했다.

어쨌든 이런 궁수의 교환에서 다른 자들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따로 특수 부대가 있다면 그런 기사들이야 부리나케 진형을 잡고 있겠지만 애초에 좋은 지형에서 완전히 자리를 굳힌 상황에서 딱히 이상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저나 관망하기 좋은 자리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관찰하는 시온을 주시하는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알게 모르게 주요 기사인 어레이 헨슨 오드밀 뿐만이 아니라 적 진형은 그런 현상이 더 심했다.

ㆍㆍㆍ

“저자가 시온 니벨룽인가?”

벤은 미간을 좁히며 시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옆에 있는 남자가 바로 답했다.

“맞습니다. 아길레 경과 결투한 사내입니다.”

“나이도 젊고 강건해 보이는군. 게다가 마법사라고?”

“그런 정보가 돌긴 했습니다. 기사이면서 동시에 마법사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번에 마리의 주도적으로 서임이 되었다고 첩자가 주장하더군요.”

“저런 인재를? 그 요망한 것이 인복이 있단 말이지.” 

그는 시온을 보며 예상했던 것보다 탐이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저기서 뭐 하는 것이지?”

“작전을 구상하는 것이 아닐까요.”

“참모 역할까지 한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마법사들은 모두 머리가 기본 이상은 합니다. 애초에 아길레 경의 분대가 따라잡힌 것이 시온 경이 만들었다는 얘기가 팽배합니다.”

“그리고 이 진형도 말이지.”

이것은 벤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병사들이 시온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추격전과 도주전이 반복이 되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이 구도였다.

아무래도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범인을 꼽아 보자면 시온 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기서 따로 명령을 내리고 있다?”

“결투를 거부한 것은 그런 연유가 있다고 봅니다.”

“이 전투를 떠나서 흥미로운 자로군. 그리고 동시에 화가 나는군. 왜 하필 지금 나타나서 내 적수가 되는지.”

그리고 비슷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 사내도 한 명 있었다. 오리엔 영주의 아들인 피에르였다. 피에르 역시 시온을 보면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저 녀석이 시온이란 말이지. 한 번 붙어 보고 싶군.”

“헛말이라도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

“장차 오리엔 영지를 이끌어갈 분이십니다. 아길레 경을 순식간에 격파한 저런 괴물과 결투를 하셔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저 정도도 안 된다고?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당연히 안되지요! 아길레 경이 어디 아무나 입니까? 도련님!”

그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놀랍게도 다른 기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영주의 아들인지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보고드립니다. 궁수대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인권이 낮은 이곳답게 피에르의 입에서 한 소리가 바로 나왔다.

“쓸모없는 것들. 연습을 아무리 하면 뭐한단 말이야. 중요한 데에서 제값도 못하다니.”

언덕 아래에서 사격하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 행위인지 기본적인 전술에 대한 지식만 있어도 혀가 찰 발언이었지만 피에르 역시 철저한 기사 교육을 받은 후계자였다. 

그저 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궁수대들의 정신이 나약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기사들이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모두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거 마음에 드는 소리군. 벤 남작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오히려 초기에 사격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겁쟁이 같으니. 지금 누구의 명분을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데 그런 발언을 한단 말이야?”

“궁수대가 물러서겠다고 계속 전언을···.”

“물러서? 어디서 그런 추태를 부려. 물러서는 녀석은 죽여라. 그러면 전장에 끝까지 서겠지.”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파격적인 명령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궁수대 대부분이 용병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기사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들을 명예를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방향을 정해서 돌격하는 것이. 제 견해에 방향은······.”

“시온 쪽으로 한다.”

“?!!”

딱 봐도 가장 험난한 길이었지만 피에르는 이미 흥분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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