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전(6)
사실 돌격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전술이었다. 특히 기사가 주축이 되어서 하는 돌진은 그 자체로 상황을 격변시킬 수 있을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한 행동을 강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시온은 돌진을 시작하는 한 무리의 자들을 보면서 순간 어이가 없었다.
현대인으로서 상식적으로 벌어지기 힘든 돌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뭐지, 저 자식들. 단체로 약이라도 먹었나?”
숫자가 많다고 해도 거리도 상당했고 궁수의 견제부터 길 자체도 땅이 고르지를 못해서 질퍽했다. 거기에 장애물까지 놓아둔 상황이라 도달하기 전에 고꾸라질 인간이 많았다.
아무리 살인 병기라 해도 도착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마법사가 목표인 건가?”
“딱 봐도 경 아닙니까?”
킬번이 그렇게 말하자 그런 것도 같았다. 깃발을 들고 돌진하다니 그건 결투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저거를 왜 응해.”
킬번은 그런 시온을 보면서 역시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기사이자 마법사는 동시에 노련한 용병이기도 한 것이다. 철저한 생존논리까지 겸비해 움직이고 있으니 말투 자체는 간단한 답변들이지만 킬번은 놀라고 있었다.
‘이 사람을 배워야 한다.’
어쨌든 시온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속이 타는 것은 이미 중턱을 돌파하고 있는 무리의 주인이었다.
“시온은?!”
“아직 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은···.”
“깃발을 더 올리라고 해라! 분명히 응하지 않겠느냐.”
“그럴 것이긴 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그를 막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마리란 자가 보통 여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년이었지. 아주 이번에 질질 짜서 내 발밑을 기는 것을 꼭 보고 싶구나.”
“그나저나 시온이란 자는 이 정도 돌격이라면 약간 겁이라도 먹어야 할 것인데 여전히 미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굉장히 용감한 것 같습니다.”
피에르는 그 말이 거슬렸는지 욕설을 했다.
“제기랄. 내가 더 용감하지 않아?”
“지당한 소리입니다.”
확실히 피오르가 보낸 기사와 보병은 정예는 정예였다. 쓰러지긴 하는데 피해가 사실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어떠한 명령이라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반복훈련이 된 자들이었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도 목표로 한 지점까지는 무조건 도착할 힘이 있었다. 다만 그 무리를 이끄는 기사들은 아수라장이었다.
“후퇴해야 합니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겁쟁이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시온이 이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문이 드는군요. 이 모든 게 시온의 계략이었다는 생각이···.”
하지만 역시 정예다운 돌파력을 보였다. 중보병 한 무리를 도륙하면서 그대로 능선을 타고 오고 있었다.
그 정도로 정면 승부를 겨뤘다면 큰 피해가 났을 수준이었다. 피에르가 자신감 있게 시온을 전리품으로 잡아오라고 명령해 보낼 만한 수준이었다.
다만 이 어리석은 명령에는 지형과 피로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응당 용기 있게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개념이 기저에 깔렸다.
그걸 보고 있는 시온은 그냥 시위만 당기면 되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시온의 입장에서는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적들이 사지로 걸어들어오고 있는 꼴이었다.
마법사의 문제점이 지금 이 순간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마법사들의 공격은 강력하지만, 사거리가 짧은 경우가 많았고 지속력이 없었다. 사거리를 길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쪽은 더 지속력이 없었다. 그래서 신중하게 공격해야 했다.
그래서 타이밍은 물론이고 그것을 반드시 중요한 자들에게 퍼붓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도 정예가 노출되었으니 최고의 공격 타이밍이 된 것이다.
원래 마법사들을 통솔해야 할 수석 마법사인 안두르가 머쓱하게 찾아와서 시온의 옆에 섰다.
‘분명히 전선 자체를 읽고 있는 것이겠지. 어디서 이런 사람이···. 분명히 마리 님이 얘기 해주시 않은 부분이 있겠지. 니벨룽 가문이라는 것도 연막일 확률이 높고···.’
“크흠. 시온 님. 죄송합니다.”
“응? 언제부터 옆에?”
“아, 방금 왔습니다. 인기척을 냈어야 했는데요. 어쨌든 상의드릴 일이······.”
“공격을 지금 해야겠다는 말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럼 하십시오.”
“해도 괜찮습니까?”
“왜?”
“지금 깃발을 날리는 것을 보아 시온 님과 결투를 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만.”
“지옥에서 결투나 하라지. 난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시온이 그렇게 말하자 안두르의 얼굴이 변했다. 기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명예 때문에 가끔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강화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시온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한 것은 이것을 의미한 것이기도 했다.
“그 정도나 각오를 하고 있으실 줄이야. 알겠습니다!”
“각오······?”
안두인이 그렇게 말하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원래라면 시온은 그에게 선배라는 말을 붙여야 할 정도로 단계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기사라는 신분을 얻어낸 것이 마법사라는 신분과 시너지가 있다는 것이 이제 슬슬 증명되는 상황이었다.
곧이어 대형 마법이 펼쳐지기 위한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형 마법은 여러 명의 마법사를 동원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따로 고급 병과로 분류될 만큼 금화가 많이 드는 마법사들이지만 전투에서는 이자들이 핵심이었다. 당장에 시온도 마법사이지만 이들이 펼치는 마법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따로 몇 개월 정도는 손을 맞춰봐야 한다.
어쨌든 대량의 덩어리 형태의 속성 마법이 그 무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비겁한 녀석들이!!!”
“역시 마리 자링은 명예가 없는 더러운 년이야. 그녀를 따르는 자들도 모두 그런 놈들이고.”
“이게 시온의 뜻이라고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정도의 실력자가 정면승부를 피한다?”
“시온 경이 했겠습니까? 다 마리 자링이 교활한 짓을 한 것입니다. 전장에 여자가 있으니 할 짓은 뻔한 거 아닙니까!”
“후퇴합니까?”
“이런 멍청한 새끼. 똑같은 자가 될 셈이냐? 시온 앞에서 도망을 쳤다간 평생 무슨 꼬리표가 붙을 것 같으냐.”
일단은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방어돌파 해내던 정예 무리도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화살과 마법의 위력은 파괴력의 차이가 달랐다.
마법을 방어해내는 무구가 없으면 그야말로 살이 타거나 얼어버리거나 찢어져 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강력한 충격에 노출되거나 몸이 속박될 수도 있었다.
어느 쪽도 이 상황에선 최악이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불에 타는 경우였다. 순식간에 불바다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땅이 축축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동 자체가 불편한 상황에서 더욱더 빠르게 앞으로 내달려야 하니 안 그래도 심한 피로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꼬락서니를 피에르 역시 보고 있었다.
“도련님. 지금이라도 후퇴를 명령해야···! 지금 적들이 비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이대로 병력을 빼게 되면 내가 뭐가 되냐고! 적어도 시온의 검이라도 뽑게 해보란 말이야!”
“시온 경은 검이 아니라 메이스를 씁니다···. 아,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도 시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시단 말이다. 나는 녀석을 잡아다가 동생들과 나와의 차이점을 아버지에게 증명해야겠다.”
아길레를 쓰러뜨렸다는, 단숨에 결투해서 승리했다는 소식은 이미 오리엔 영지도 빠르게 돌은 후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자링 가문의 내전이기 때문에 어차피 둘 중에 어느 쪽이 승리한다고 해도 펜부르크의 영주는 자링 가문이었다.
그러니 그 보상 중 하나로 시온을 넘겨받는 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곳에서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원인이 되어서 지금 처박는 상황이 되고 있었지만, 대강의 상황은 이랬다. 이것을 자신하게 한 숫자와 질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ㆍㆍㆍ
“슬슬 움직인다.”
전황 자체는 아수라장이었다. 사실 이제 시온도 뭐가 뭔지 알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다. 원래 처음이야 각을 잡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버리면 그저 생존의 장이 되어버리는 것이 전장이었다.
사실 시온도 이러한 전장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래서 온몸이 긴장이 바짝 돌고 있었다. 아무리 냉정해지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한 번에 다 쏟아낸다.’
시온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저것들을 막아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계획에 의하면 손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적을 정리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마법사들이 통일된 속성을 갖춘 것은 아니기에 여러 마법이 진을 갖춰서 발사된 탓에 자욱한 수증기가 안개처럼 듬성듬성 올라온 상황이었다.
시온은 그 사이에서 보이는 모습을 향해 뛰어들었다. 앤드류의 메모라이즈를 가동한 것은 물론이고 고렘도 소환해놨다. 고렘은 아직 단순한 타격 기술 정도밖에는 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시온······!!?”
기사 하나가 시온을 확인하고는 대뜸 놀라서 이름을 외쳤다.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돌파한 것이 바로 이 남자를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그 기사는 사실 시온과 능히 손 속을 겨룰 수 있는 기사였다.
하지만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체력이 바닥이어서 그냥 숨이 가빠서 숨을 골라야 할 지경에 시야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결투다!! 내 이름은!! 이게 뭐야!!”
그의 결투 신청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허리 반 크기인 시온의 고렘이 그의 다리를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하급 고렘이어서 그 정도 능력으로는 이 기사를 저지하기에는 턱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그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온은 간단하게 앤드류의 메모라이즈를 발동시킨 메이스 공격으로 그의 머리를 박살 냈다. 한 번에 피곤죽이 된 기사가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
“라울 경이!!! 일격에!!”
“상대가 누구야!!”
“시온 경입니다!!”
양쪽의 무리가 본격적으로 교전이 시작됐기에 주위는 다시 생존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라울 경이 당했다는 얘기는 속속히 퍼졌다.
“라울 경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단 말이냐?”
“빌어먹을! 시온은 어디인가!”
“저쪽입니다!”
“아니다, 내가 간다.”
시온은 벌써 두셋을 쓰러트리고는 교묘하게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미리 설치한 라이트닝 댄스를 발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설치 마법인 라이트닝 댄스를 대략 이들이 도달할 것 같은 위치에 설치를 해두었다.
정확히 방향은 같지 않았기에 이렇게 도망가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들에게는 다른 느낌으로 왔다.
“시온 경이 결투를 하고자 하는 자는 저쪽으로 따로 빠지라고 하는 게 분명하군!!!”
“복수다!!”
“과연 이런 속에서도 결투를 배려한단 말인가, 역시 마리 년의 속셈이었단 거지.”
기사 세 명이 바로 전선을 이탈해서 시온 쪽으로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