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전(9)
시온은 간단히 피에르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사실 피에르가 한참 깊숙이 들어와 있을 땐 누가 그곳을 맞받는지 전혀 상관이 없을 정도로 유리했다.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서 그의 객기 정도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래서 귀족들이 이 임무를 낚아채기 위해 하이에나같이 눈치를 봤던 것이었다.
시온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 피에르에게 걸어갔다. 피에르는 싸우려는 의지는커녕 시온이 다가가자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시온 니벨룽...!”
“네가 피에르인가?”
피에르는 시온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겁이 먼저 났다. 지금 해낸 일이 얼마나 많은데 흥분하기는커녕 여전히 침착한 상태의 시온이 놀라웠던 것이었다.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는 건가?’
피에르는 시온에게 달려들어선 안 된다는 바티무스의 조언이 떠올랐다.
‘이런 괴물과 결투를 하려고 했다고 내가 미쳤지.’
다 잃고 나서야 피에르는 시온을 만만하게 본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의 군세는 이미 붕괴하였다.
사지로 몰아넣은 탓에 잃은 보병이 많았고 기사도 많이 잃었다. 최소한 자신은 포로로 잡히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결국 시온에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졌다. 완전히 졌다. 그럼 나는 죽는 건가?’
피에르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이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시온은 그런 그를 보면서 말했다.
“피에르 너는 나의 포로다. 동의하나? 아니면 내려치겠다.”
아주 의무적인 질문 같은 거였지만 이 응답을 잘해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동의를 해야 했고 몸값을 지급할 수 있다고 답을 해야 했다.
설마 지급하지 않는다고 그를 내려칠 일은 없었다. 얼마나 중요한 인질인데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까. 그런데 피에르는 너무 겁을 먹어서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시온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똑바로 말해라. 아니면 네 머리에 이 메이스가 떨어질 것이다.”
시온은 전장의 한복판답게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편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예 이참에 효과적으로 적의 사기를 붕괴할 방법이 생각이 났다.
그러려면 그의 기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방금 까지 방방 뛰던 자라고 해도 자기 목숨이 위험하면 고분고분해지기 마련이었다.
‘생각보다 연약한 타입이었군.’
시온은 피에르에게 가졌었던 이미지를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 사지로 돌진해오는 것을 보아 대단히 명예롭고 무모한 용기를 갖춘 자로 보였었다.
꼭 기사만 그러는 것은 아니었고 신분이 높다고 해도 그러한 군사훈련을 받은 고위 귀족은 가끔 그러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런 타입의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간 일이 골치 아파진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그냥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극단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히익!!”
시온이 메이스를 살짝 잡자 넋이 나가있던 피에르의 얼굴이 공포에 젖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보고 다른 자들이 말렸다.
“시온 경 안 됩니다!”
“참으십시오!”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시온은 그들의 의견을 들은 척을 했다. 아무래도 모두 시온의 행동을 쉽게 측정할 수 없는 터라 당사자를 포함한 시온을 말린 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에르를 묶어라.”
“알겠습니다.”
“그냥 말고 저기에 묶어라.”
“!!”
시온이 가리킨 것은 긴 통나무였다. 거기에 묶으라는 것은 피에르를 잡았다는 것을 이 전장에서 효율적으로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다들 슬쩍 눈치를 봤다. 적의 핵심을 잡았다고 해도 나름의 예우를 위해서 이 정도까지는 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온이 봤을 때 이렇게 해야 남은 전장이 더 빨리 더 조속히 종결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시온의 생각이 맞았다. 그게 너무 상대를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 방법은 상당히 효율적이었다.
“깃발도 꽂아 넣어.”
찢어진 가문 깃발을 빼놓으면 극적인 효과가 낮아지는 법. 그래서 곧 나무기둥에 피에르가 묶이고 그의 기수가 들고 다니던 깃발이 그의 옆에 비스듬히 꽂히게 되었다.
“아니 저 사람은!!”
“벤 남작님!! 피에르가 대패하고 사로잡혔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나도 눈이 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신속하게 진행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온의 작품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졌....다.”
아직 잔여 전투는 남아 있었지만 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삶의 희망의 불꽃이 실시간으로 꺼져 가고 있었다. 저렇게 공공연하고 무자비하게 피에르를 전시하듯이 내건다면 피에르의 남은 군세는 꼼짝없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체스에서 왕이 잡혔는데 그의 군세가 그대로 정지가 되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학살당하거나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무기를 버리거나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하고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어차피 피에르를 위협하고 있는데 공격했다가 보복으로 피에르를 잃는다면 장자를 잃은 오리엔 영주가 보병들을 모두 교수형에 처할지도 몰랐다.
백작의 장자라는 것은 그만큼 지위가 무조건 보장되어 있었다. 여자 상속인에겐 없는 승계의 전통성이 관습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ㆍㆍㆍ
‘병력이 빠지는군.’
시온은 자신의 방법이 먹혀들어갔음을 알았다. 벤 남작의 병력이 물밀 빠지듯 바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엉켜있던 전선이 곧 소강상태가 된 것은 곳이었다.
“으어어어. 흐어엉.”
시온은 신음인지 울음소리인지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잠시 올렸다. 피에르 오리엔이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야 이성이 좀들은 모양이었다.
원체 유리했던 그가 할 수 있는 전술은 그야말로 다채로웠지만, 그가 한 것은 어리석음에 극치였다. 시온은 그 점이 사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명령을 내린 것이지.’
시온은 아직도 이 사태가 모두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벤 남작의 군세가 거의 빠져나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리엔 영주의 군세가 어쩔 수 없이 벤 남작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저대로 보내주는 것은 좋지 않은 판단이었다. 추격대를 보내서 수를 줄여야 하는 것이 맞았다. 최소한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시온 경. 완벽하군 완벽해.”
어레이가 나타났다. 어레이는 지금 벌어진 승리에 벌써 도취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온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어레이가 매달린 체 수치심에 울고 있는 피에르를 흘깃 봤다. 살짝 걱정되었지만, 곧 이걸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시온이라는 사실에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수 싸움을 시작한 거겠지.’
“어레이 경 뭐하십니까?”
어레이가 말뜻을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얼른 추격조를 꾸려 패잔병을 치십시오. 이때가 기회입니다.”
그건 맞았지만, 어레이는 살짝 겁이 났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기 마련이었다. 굳이 안전하게 이겼는데 여기서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시온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잠시 끙 생각하더니 답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사냥꾼들을 짜겠습니다. 경은?”
“저는 이번 전공은 양보할까 합니다. 이미 많은 전공이 있어서 다른 자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맞겠지요. 공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기사와 귀족들을 데리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명하군.’
어레이는 시온의 말귀를 알아듣고 턱을 만졌다. 사람이라는 것이 전공을 한번 가지게 되면 계속해서 독점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나누어주겠다는 것이었다.
패잔병을 사냥하는 것은 얻는 가치보다 한참은 쉬웠다. 게다가 그가 걱정했던 부분도 언급되어 있었다. 다른 자들을 참여시켜 데려가라고 했으니 자신도 처지도 고려해준 것이다.
‘마나가 완전히 나가버렸단 말이지.’
시온은 지금 서 있는 것도 간신히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쥐어짠 나머지 이제 마나가 텅 비어버렸다. 이제 평범한 기사 하나만 만나도 난감한 수준이었다.
어레이가 정신없이 추격조를 짜기 위해 분주하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시온은 지금까지 펼쳐졌던 전장을 쓱 훑어보았다.
“이게 전투였군.”
시온은 말로만 듣던 군세와 군세가 맞붙는 회전을 겪은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목표치 이상의 전공으로 가득 채운 것 같았다.
‘좀 지나쳤나?’
사실 그 정도가 아니고 판세 자체를 끝장낼 정도의 영향력을 줬지만 시온은 거기까지는 추측해내지는 못했다.
주변은 시온이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의 장관이 이어져 있었다. 다친 자가 아군 적군 구별 없이 사방팔방에 있는 데다가 마법의 잔재도 여전히 완전히 꺼져가고 있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대부분 아군의 것이 아닌 적군, 오리엔 영주 측의 군대라는 점이었다.
‘전리품 가지러 가야겠다.’
ㆍㆍㆍ
시온이 마리 자링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곤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너무나 흥분하면 눈이 저렇게 되는데 시온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녀는 사실 이 전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벤 남작과 펜부르크의 섭정을 두고 벌인 치열한 전투는 적통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극도로 불리했다.
펜부르크는 제국에 속해있기 때문에 황제가 그녀를 손들어 줄 수도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요청에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사실 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에는 여자 영주의 존재도 은근히 존재했다. 자링 가문처럼 자식이 많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만 장녀 혼자 생존해 있다면 그 여자에게 영지가 탈 없이 상속되는 것이다.
그런 여자는 당연히 귀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곤 했다. 하위귀족이나 높은 귀족이나 그런 여자는 황제의 사생아들도 얼씬거리기 마련이었다.
‘나도 그런 여자가 필요한데. 하지만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일이지.’
시온 같은 하위 귀족은 꿈에서만 볼 수 있는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였다. 대부분은 이런 상속녀를 쟁취하기 위해 굉장한 암투를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수···. 수고했다. 너의 명예로운 전투는 잘 봤다. 그에 맞는 보상을 준비해 주마.”
시온은 그녀의 말투가 약간 딱딱하다는 것을 알았다. 감동은 하고 있지만, 누군가를 극도로 신경 쓰고 있었다.
“흠. 나이가 이렇게나 어린데 가능성이 대단해 보이는군.”
구석에서 새로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그녀의 말을 더듬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다. 방금까지 전장에 서다 왔었기에 함정에 빠트려도 장담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가 최근 보아온 인물 중에는 가장 흥미로운 자로구먼, 그래. 가문이 어디인고?”
“니벨룽 가문입니다.”
“니벨룽? 흠.”
“모르실 겁니다. 워낙 작고 오지에 있는 가문인지라.”
“나는 벤저라고 하네. 알는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