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304)

영지전(10)

벤저의 가문인 네로빙거는 황제의 방계가문으로 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다. 집안 내력으로 따지자면 왕가인 라레테저닛보다 한 수 위였다.

그 중 벤저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젊었을 때부터 기행을 일삼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해 그 이름을 제국과 왕국에 새긴 남자였다. 

엠페러가드의 전 단장이기도 한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점이었다.

“엠페러가드의 단장인 벤저 공을 뵙습니다.”

“그 직함은 옛날의 것이지. 그나저나 네 스승은 누구지?”

벤저 네로빙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시온의 활약을 자세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투의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삼십 일 번의 회전을 겪었었던 그의 안목엔 이 대승의 근원에는 시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니벨룽 가문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내가 참여한 전쟁에 니벨룽 가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잊을 리가 없었겠지.’

그렇다는 것은 시온의 가문이 정말로 별 볼 일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조상도 별다른 인물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어렸을 때 잠깐 할아버지께 약간 배운 것 말고는 없습니다. 가문의 막내인지라 제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도 흔한 일이었기에 여기에 대해 가타부타할 것이 없었다. 벨저가 힐긋 마리를 보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저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그 정도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나 되는 전술을 아무런 스승 없이 배웠다는 건가.’

정확한 것은 지금부터 그가 현장을 돌면서 짚어갈 예정이었지만 그는 시온의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벨저 자신이 이곳에서 활약한다고 해도 시온이 해냈던 판도를 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잠깐 팔을 봐도 되겠는가?”

“?, 물론입니다.”

시온의 팔을 잡은 순간 그의 입이 벌어졌다. 

‘최상의 신체에 더불어 발을 맞춘 극도의 단련, 내 젊었을 적을 능가한다. 이 정도의 상대가 있었던가? 부에이 그 녀석이 떠오르는군.’

제국의 확장 전쟁에서 활약했었던 벨저는 과거 자신과 결투를 벌였던 부에이란 유목민 장수를 떠올렸다. 키도 골격도 부에이가 한 수 위였지만 단련 수준의 정도라면 엇비슷할 정도였다.

“흠.”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시온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의 눈에 들 정도의 자질이었다. 

사람 욕심이 있는 벨저가 탐을 낼만한 인재인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벨저가 앞으로도 모를 진실은 시온의 육체는 시온이 가지고 있는 고대의 유물에서 생성되는 액의 부가적인 효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였다.

그러니 어떻게 보자면 현시대의 기준을 한참 넘어서는 비밀스러운 효과로 자연적인 것이 아닌 마법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숱한 사람을 만나왔던 벨저가 시온의 자질이 특별남을 알아채고 놀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내가 젊었었다면 자네를 질시했을지도 모르겠군.”

그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작았기 때문에 들은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근처에 사람이 많았다면 파장은 컸을 내용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 중 한 명이 시온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시온은 그 단어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아니네. 아니야. 세상 다 산 늙은이의 주책이야. 그러니까 자네는 혼자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단 말이지.”

“예, 별거 아닌 재주입니다. 아마도 운이 좋아서 이렇게 좋은 결과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군. 그래.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예.”

“그래서 이번이 몇 번째 회전인가?”

“처음입니다. 첫 회전이라 부족한 것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벨저는 이제 확신했다. 자신이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분명히 이 사내를 질시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키우려고 애를 쓰던 제자들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도 동시였다.

‘신께선 가끔 장난을 크게 치시지.’

이 둘의 대화를 가까이에서 보고 있던 마리는 시온에게 작위를 주려는 음모를 앞당기기로 했다. 괜히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벨저가 시온을 빼앗아 버릴 수도 있었다.

벨저 네로빙거는 현재 많은 것을 내려놓기는 했지만, 엄연히 전 엠페러가드의 단장의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 자신도 큰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주이기도 했다.

다만 벨저 자신은 독신으로 살고 있기에 곧 상속이 여러 명으로 나뉘어 공중으로 흩어질 작위이기는 했다. 그렇기에 전 황제가 그에게 그만한 작위를 안겨준 것이었다.

ㆍㆍㆍ

휴식을 취한 시온은 자신의 막사 안에서 고갈된 마나를 채웠다. 그동안의 전투 때문에 미뤄두었던 푸른 액도 모두 먹었다. 시온은 요즘 이 푸른 액의 효과가 끝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푸른 액의 효용 덕에 전투에서 쌓은 피로가 말끔하게 없어졌다. 원래라면 앤드류의 메모라이즈의 부작용으로 보름 내내 근육통에 시달려야 할지도 몰랐다.

“점점 체질이 바뀌는 것 같은데.”

시온은 단순한 효과를 넘어서 이 푸른 액이 점점 자신을 신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좀 더 높은 자질로 개선되고 있던 것이다.

“휴, 정말 엄청난 일을 해냈군.”

이제야 완전히 회복한 시온은 천막 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주마등처럼 이번 일이 스쳤다. 약탈자들과의 전투 이후에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시온 주인님! 밖에 준비되었습니다.”

시온은 초이의 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깼다. 준비되었다고? 시온은 초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밖에 나가보면 알 수 있을 터였다.

밖에 나가자 많은 보병이 쭉 늘어서 있었다. 기사도 몇 보였다. 오드밀 옆에서 종자인 필립스가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오드밀이 시온을 보더니 재빨리 다가와서 말했다. 

“시온 경. 피로가 상당하셨나 보군요. 경의 종자가 철저히 막아서 지금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레이 경의 조카라던데 충성심이 대단해 보입니다.”

필립스가 시온을 보며 긴장한 얼굴로 쳐다봤다. 시온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던 것이었다. 시온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필립스가 상당히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회복할 때까지 막으라고 했으니 철저히 명령을 이행한 것이다. 어쨌든 시온은 전투 전의 분위기와 확연히 달라진 보병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이름을 날리던 차에 이번 전투로 이들에게 가문과 이름을 여러 사람에게 각인시켰다.

‘대충은 왜 나오라고 했는지 알겠군.’

시온은 보병들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들을 확인했다. 그 앞에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동등한 지위였던 볼브 경이 있었다.

시온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뒷모습이었다. 전의를 상실하고 공포에 빠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어쨌든 그 뒤로 신분이 높은 자부터 직급이 낮은 순서대로 주르륵 무릎이 꿇려 있었다.

“이들은?”

“경의 포로입니다.”

“저자는 볼브가 아니요?”

“겁쟁이 볼브는 어레이 경이 잡아왔습니다만 어레이 경이 경에게 넘겼습니다. 자신은 그냥 주운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겁쟁이? 볼브 경의 별칭은 황소 아니요?”

볼브는 줄여서 황소 기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돌진 공격에 능했고 공격 방식이 황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게 경과의 대결에서 도망친 후에 사람들이 그의 별칭을 바꿔버렸습니다. 사로잡은 포로들도 볼브를 욕하더군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오드밀의 목소리가 마지막쯤 가서는 작아졌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피에르뿐만이 아니라 오리엔 측의 귀족이나 보병들이 모두 볼브가 경에게 배신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볼브를 매수했습니까? 마리 님도 모르시는 것 같아서 찾아뵈려고 했는데 워낙 경의 종자와 노예가 출입을 거부해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수? 그런 자가 저를 공격했겠습니까.”

“???? 정말입니까?”

“그때 그 전투에서 나를 쫓아오는 것을 본 게 볼브와 처음 본 것입니다.”

“허.”

시온은 그 포로들 쪽으로 걸어갔다. 볼브는 시온이 올 때마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온 경! 몸값을 내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저를 볼브처럼 경의 검으로 쓰게 해주십시오.”

두 명이 시온을 향해 간절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포로들까지 가세해서 뭐라고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조용히 해라.”

시온이 그렇게 말하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생사여탈권이 시온에게 있는 상황이니 행동도 그 다급한 만큼이나 빨랐다.

그리고 생각해둔 것을 말했다. 

“나는 다 풀어줄 생각이 없다.”

“?!!!”

“몇은 죽을 수밖에 없겠지.”

물론 시온은 이들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금화를 최대한 챙길 생각이었다. 가장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몸값이라는 것을 받을 때는 아무래도 자기 입으로 나온 발언이 중요한 법이었다.

“기사만 할 거니까 한 명씩 나와라.”

다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면서 머리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얼마를 제시해야 시온을 만족하게 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시온에게 온갖 것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값이 부족하다 싶어 벤 남작의 군사 기밀을 파려는 기사도 있었고, 가문 돈을 다 끌어다가 시온에게 제시하는 기사. 부족한 값은 검으로 갚겠다며 벤 남작에게 검을 들것을 맹세하는 자. 

볼브는 그 과정을 보며 식은땀을 미친 듯이 흘렸다. 시온에게 무엇을 제시해야 살아날 수 있을지 감이 오질 않았던 것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제시해야 할지도 모르지.’

시온의 눈을 본 순간 그는 공포심이 더 커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머릿속이 제시해야 할 것들로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첩까지 전부 내줘야겠다는 계획을 짰다.

“볼브.”

“그...”

“잠깐. 너는 나랑 따로 얘기 좀 하자.”

시온이 빈 천막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천막 안에 둘이 남게 되자 볼브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의 이마에서 불쌍할 정도로 땀이 흘렀다. 

“다.... 다 드리겠습니다.”

“?”

“제 첩..첩..첩까지. 딸만 봐주십시오.”

“첩이랑 딸이 왜 나와?”

“그것이...더는 드릴 것이. 살려만 주시면 경을 모시겠습니다. 저를 노예처럼 쓰십시오.”

“기사는 노예가 될 수가 없다.”

마법사와 달리 기사는 신분적인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나을 수도 있었다. 풀어주기 곤란한 경우에는 무조건 사형이었다.

“맹세하겠습니다. 빚이 해결될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시온의 입을 볼브가 뚫어질 듯이 쳐다봤다. 시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가 없고.”

정적이 이어졌고 볼브가 침을 삼켰다. 

“그냥 너 나한테 매수당한 거로 하자. 보아하니 다들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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