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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304)

짧은 공성전(2)

시온이 휀트의 결투를 받은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심심했다. 앤드류의 메모라이즈를 배우고 그 활용에 능숙해진 데다 치열한 전장을 겪고 나니 어지간한 두려움은 사라져버린 것도 있었다.

벨저 급의 한때 전설이었던 인물이 키우는 수제자는 과연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말이야 공성전이지 상대의 항복이 언제 나올지 기다리고만 있는 터라 다들 지루해하던 차였다. 휀트의 기습 결투는 그래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시온과 휀트가?”

벨저는 안두르를 협박해 강제로 마법의 기초를 배우던 중이었다. 생각보다 마법의 기초를 배우는 일은 그라 할지라고 해도 어려웠다.

시온의 특별한 재주에 그가 혀를 차던 중이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소식은 그를 흥분하게 했다.

원래라면 제자가 결투에 휘말렸을 때 그것을 말려야 하거나 제지해야 하는 것이 스승의 입장이었지만 그는 잇몸이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이 녀석들이 나 몰래 한판 하려고 했단 말이지? 허허.’

그가 바로 마석을 내던져 버렸다. 그의 제자인 휀트는 인성과 노력엔 문제가 있었지만 고귀한 출신이었고 특별난 재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제자 녀석이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사실을 알 때가 되긴 했지. 좋은 성장이 되려면 시련이 있어야 하는 법.”

그는 이미 시온의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다. 시온의 재능은 여러 기사로서의 재능 있는 인재를 두루 살피고 겪었던 벨저조차도 처음 접한 새로운 형태의 인재였다.

벨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천막과 천막이 이어져 있는 공터 가운데에 두 명의 사내가 끝에서 장비를 하나씩 착용하던 중이었다.

시온에게 하나씩 장비를 건네는 자는 얼마 전까지 시온의 적이었던 볼브 경이었다. 

볼브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며 시온에게 하나씩 무기와 투구를 건넸다. 볼브는 여유롭게 웃고 있는 휀트를 보고는 혀를 찼다.

‘저런 멍청한 녀석. 가문이 좋다 보니 현실 감각이 아예 없는 머저리로군.’

그러나 꼭 볼브처럼 생각하고 있는 자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시온이 이번 전장에서 대단한 실력을 보여줬다 해도 휀트의 명성도 그에 못지않았다.

젊은 혜성이라는 별칭처럼 휀트는 화려한 타이틀을 몇 가지가지고 있었다. 최연소 기사였고 예비 엠페러가드의 기사였으며 고귀한 가문인 루지엥의 차남이었다.

벨저의 제자 중 하나이기도 한 그는 빠른 반사속도를 기반으로 한 뛰어난 재능으로 펼치는 검술로도 유명했다. 실전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그렇지 몇 년 안에 대성하게 될 것이 확정 시 되는 매우 촉망받는 자였다.

그런 휀트가 이곳에서 찬밥신세였던 것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주인공이 아닌 적이 거의 없었는데 나이가 비슷한 시온 얘기만 해대니 안 그래도 화가 나는 참에 자신의 스승인 벨저가 시온에게 친근하게 굴자 뚜껑이 열려 버린 것이었다.

‘결투를 받아들이다니 쯧쯧 네가 쌓은 명성은 간단히 가져가 주마.’

시온이 전장에서 쌓은 명예를 단숨에 이 결투로 챙겨갈 생각을 하자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번졌다. 그러나 그와 그의 일행이 시온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었다.

벨저야 애초에 기행이 많은 자라 하던 짓을 다 내팽개치고 참관하러 온 것이었다. 나머지가 속도를 맞추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안타깝게도 전투 자체가 진행이 너무나 빨리 되어서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결과가 결정이 났던 것이 문제였다. 정작 시온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시온이 자세를 취하자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제대로 배웠군.’

그 정도로 자세가 자연스럽고 완벽했던 것이었다. 휀트는 재능이 있었기에 시온의 자세가 보통의 연습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앤드류의 메모라이즈라는 행동기억마법 때문이었기에 그랬지만 말이다.

“칫, 기본자세 하나만큼은 무식하고 반복한 모양이구나!”

휀트는 시온이 그게 전부일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달려 들은 것이었다. 저런 기본기만 가득한 사람일수록 변칙에 약한 법이었다. 

휀트의 노림수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검이 간단히 막혔다. 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잠깐만, 아니지?’

괜히 젊은 혜성이라고 불리겠는가 벨저가 그를 제자로 맞아들인 것은 단순히 그가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휀트는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재능이 방금 일격만으로 시온과의 어떤 차이를 느껴버린 것이었다.

정확히 그가 느낀 벽은 앤드류라는 고대의 마법사다. 어쨌든 그가 앞으로도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그 대상은 시온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며 시온에게 연속으로 내려쳤다. 경험이 없다 할 뿐이지 속도도 빠르고 정확하고 정교했다. 게다가 검술도 격이 높았다. 시온은 그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벨저공의 제자인가.’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시온은 그에게서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완벽한 제국 메이스 술은 부족한 고위 검술을 이길 수 있는 법이었다.

완벽한 자세를 연속으로 강제하는 마법은 근육의 부하를 무리하게 주지만 시온에게는 별다른 제약을 주지 못했다. 

일반 마법사라면 이 정도 공격을 받았다면 벌써 근육이 문제가 생겨 행동불능이 됐을 것이었다. 

이 마법의 창시자인 앤드류조차도 만들어놓고는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는 괴짜 마법이었다. 

마법사들이 신체단련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시온은 선조의 유물이라는 특별한 운이 있기에 이런 제약이 먹히지 않았다.

유일한 제약은 시온이 여기에 넣어야 할 마나의 양이었다. 시온은 본격적으로 여러 기술을 휀트에게 써보기 시작했다. 휀트는 그때마다 숨이 막혀오는 압박을 느꼈다. 

‘날 가지고 놀고 있다고?!’

본의 아니게 진의를 들킨 것이었다. 놀고 있는 건 절대로 아니었고 그냥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것저것 연습해 보는 것이었다.

휀트의 뛰어난 재능이 오히려 좋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상황 자체는 그림 같이 합이 이어지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연달아 감탄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휀트는 평생 남게 될 만한 치명적인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었다. 

깡!

결국, 그의 검이 잘못 맞았는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검을 놓치게 되는 것은 결투의 패배 사유 중 하나였다. 

어차피 등을 돌려도 패배였다. 딱 하나 보조 검을 뽑아서 싸우는 것은 인정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휀트는 그렇게 되려 자신의 명성을 시온에게 빼앗긴 것이 되었다. 

ㆍㆍㆍ

그 날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성전이 끝이 났다. 결국, 압박을 버티지 못한 벤 남작이 항복을 시도한 것이었다. 

벤 남작의 도시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바로 진행된 일이었다. 그리고 벤 남작은 이번 일의 원흉인 시온을 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사실 그를 가지냐 못 가지냐의 차이였을 지도 모르지.’

벤 남작은 시온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여러 일을 겪고 나서 본 시온에게서 받는 느낌은 대단했다.

“어디서부터 관여된 것이지?”

“?”

“말할 생각이 없는가. 어차피 난 졌다.”

벤은 시온이 단순히 마리 자링과 얽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다른 인물과 이어져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온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도와달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었다. 

시온의 대답이 필요한 건 물론 벤 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좀 생각을 해봤는가?”

아직도 떠나지 못한 벨저가 시온에게 그렇게 물었다. 벨저는 그 일이 있던 뒤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시온에게 와서 결정할 시간을 줬다.

전 엠페러가드의 단장이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었다. 시온에게 엠페러가드의 입단제안을 걸은 거다.

휀트 루지엥의 패배는 그만큼 벨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기대를 넘어서는 솜씨라고 볼 수 있었다.

“시온 니벨룽과 휀트 루지엥의 대결은 막상막하였지. 그런데 결국엔 시온 니벨룽이 승리했고.”

대부분이 이런 모습으로 둘의 결투를 이런 식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소수의 실력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시온이 일방적으로 가지고 놀았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장 가능성이 있어.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유형의 희귀 재능도 발견하는군.’

기사의 재능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했다. 전투 스타일에 따라서 무기에 따라서 나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재능을 기반으로 하냐에 따라서 크게 갈렸다.

흔히 타고난 반사속도나 타고난 근력 이 두 가지로 갈래를 가르기도 했다. 시온의 근력은 벨저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의 생각엔 앞으로도 삼십 년간 비슷한 급을 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형태의 기사는 꼭 자만심이라는 것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성격이 불같다. 그것 때문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단명하는 자도 많았다. 하지만 시온에게서는 그런 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출신 성분이 부족한 최초의 단장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

단장이라는 영예로운 직위는 제국이 존재했을 때부터 존재했다. 흔히 기사로서 도착할 수 있는 정점의 형태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관습처럼 출신 성분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실력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내려주지 않는 자리였다. 하지만 벨저는 가능성을 시온에게서 발견했다. 

기사임에도 정치라는 것을 할 줄 알고 큰 틀을 볼 줄 알고 전장의 판을 짤 줄 아는 전략가의 모습을 봤다. 

그래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이라면 그 한계를 알아서 극복할 수 있다. 그 끈 줄을 대주겠다는 정말로 파격적인 제안. 

네로빙거 가문에 대 회의를 열면 모두가 반대할 게 분명한 그런 독단적인 행동을 벨저가 제안했던 것이었다.

“음, 벨저 공. 죄송합니다만 생각이 없습니다.”

“!!!!”

이미 승리를 예감하고 있던 벨저의 입가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정도로 시온이 거절할 수 없는 그런 미래의 가치가 가득한 끈이었다.

조건을 수정할지언정 이런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가.”

“애를 가지지 못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죄송합니다.”

“그건 맞지만. 그것 때문에 엠페러가드의 맹세는 기사 중에 최고로 친다네. 니벨룽 가문에 자네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형제들도 있지 않나.”

벨저는 자기도 모르게 간곡하게 말했다. 무려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에게 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로 수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기가 살면 이제 얼마나 살겠다고 욕심을 부린단 말인가. 그만큼 시온의 모든 면이 벨저가 간절히 바라던 계승자에 딱 맞았다.

시온이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벨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식을 꼭 가져선 안 되는 건 아니야. 사생아는 얼마든지 가능하네. 크흠. 불편한 얘기지만 선배 중에 맹세를 완벽히 수행한 자는 없었어.”

시온은 흥미로운 얼굴로 벨저에게 되물었다.

“벨저 공께선 사생아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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