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위(3)
바닥에 엎어져 있는 휀트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스승이 자신을 막아줬고 시온이 물러섰다는 것에 숨이 차올랐다.
“헉헉헉헉.”
마치 코와 입이 막힌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굴에서 미친 듯이 땀이 흘러내렸다.
“왜 그러느냐?”
휀트 자신도 몰랐다. 그만큼 사지에서 벗어났는데도 몸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죽었다고 할 정도로 시온이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선 아무리 연습이라고 해도 결투 중에 사망하는 일도 종종 생기곤 했다. 하물며 그 경험이 다수 있는 휀트가 공포를 느끼며 이상한 행동이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땅을 몇 번이고 세차게 치고 나서야 휀트는 겨우 진정이 되는 듯싶었다.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던 그는 평생 갈 것이 분명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다.
문제는, 다시 도전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휀트를 고통스럽게 했다. 시온이 이제 두려워진 것이었다.
“괜찮나? 자네라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과했던 건 미안하군. 벨저 공의 제자를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닥쳐!!”
휀트 루지엥이 마치 쫓기듯이 검도 챙기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시온은 걸어가서 그의 검을 집었다.
‘상상 이상으로 강해졌다. 그리고 더 신중하게 써야 할 필요가 있어. 미리미리 마나를 끊지 않으면 진짜로 죽여선 안 될 사람을 보내버릴 수도.’
그나마 휀트 루지엥이 뛰어난 사람이고 벨저가 막아줘서 망정이지 실수할 뻔한 것이었다.
“쯧쯧. 저 한심한 녀석.”
“?”
“그 검 줘봐라.”
시온은 벨저에게 검을 넘겨줬다. 제법 높은 품질의 검이었는데 날이 완전히 상해 있었다. 시온이 들고 있는 것은 질이 낮은 메이스였기에 이 정도 손상을 입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단한 힘이야. 내 기술을 흡수했다고 해도 결과가 무지막지하구먼.’
“문제 있습니까?”
“에잉. 못 쓰겠군. 어린애도 아니고 아무리 분해도 말이지. 한심해 보이는가?”
한심하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솔직히 예상외의 반응이었기에 시온은 그렇다고 답할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렇게 배우는 것 아니겠는가. 자고로 나도 저 나이 때는 팔불출이었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에 재능까지 따라오면 십중팔구 정신은 미숙해지지.”
벨저가 뒷말을 삼켰다. 거기에 대한 비교 대상이 바로 시온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진 않은 것이었다. 벨저는 시온과 휀트에 대해서 엄밀히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이번 대결로 확실해졌다.
‘같은 그릇이 아니야.’
ㆍㆍㆍ
그렇게 마지막 기술을 가르친 벨저는 새벽길에 자신의 제자와 기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시온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마지막 식들을 메모라이즈 하기 위해 여러 동작으로 분류하고 몇 번이고 반복해 연습한 뒤 특정 형태로 저장하고 자동화할 수 있게끔 하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벨저 공이 갔다고?”
“예. 다음에 또 보자면서 종종 찾아오시겠답니다. 공무가 있어서 이미 한도까지 미뤘다고 합니다.”
‘나 때문에 일정을 미뤘었군.’
시온은 그가 정말로 별다른 사심 없이 떠났다는 점에 놀랐지만, 공무를 미루고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시간을 쏟았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공무라는 것을 누가 줬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인데도 그것을 최우선시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우선시한 게 됐다.
‘역시 네로빙거 가문이구나.’
어떤 가문이라도 이렇게 막 나가는 짓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네로빙거가 쌓은 신뢰도 그것을 쌓아올린 벨저란 자의 특권일 것이었다.
다른 자는 쉽사리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어쨌든 아쉽긴 하지만 시온도 바쁜 일이 많았다. 다음에 만나자고 했으니 또 만나게 될 것이었다.
“시온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필립스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밖에는 낯선 기사가 서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상당해 불안해 보였다.
실제로 그는 새벽부터 밖에서 필립스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시온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없으시다면 잠깐만 대화하고 싶습니다.”
“시온 경께선 일이 많으시다. 가던 길을 가라.”
대답은 필립스가 나서서 했다. 그의 눈이 곧바로 시온을 향했다. 그는 이 일에 실패하면 안 됐다. 그런 눈빛을 느꼈다.
“무슨 용무지?”
시온이 답을 주자 그의 마음 졸이던 얼굴이 겨우 펴졌다.
“일대일로 대화하고 싶습니다. 가능합니까?”
“못할 건 없지. 필립스 먼저 가 있어라.”
이곳에선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대일로 대화하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그것을 들어주는 관습이 있는 것이다.
“경, 부탁합니다. 전 목숨을 내놨습니다. 한 번만 벤 남작과 대화를 해주십시오.”
“?”
벤 남작은 감금되어 있었다. 같은 이치로 감금되어있는 자가 신분이 높을 때는 특정 인물과 대화를 신청할 수가 있었다.
그런 귀한 기회를 지금 시온에게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벤 남작은 지금 조금이라도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갖은 머리란 머리를 다 굴리고 있을 판인데 그런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 시온과 대화를 해야겠다는 것.
‘흠, 들어나 봐야겠군.’
듣고 나서 결정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자기 가족의 신변의 안전을 요청할 수도 있는데 금화를 챙기고 그 정도라면 들어줄 수도 있었다.
ㆍㆍㆍ
시온에게 가장 측근의 기사를 보낸 벤 남작은 시온을 기다리느라 쇠약해질 정도였다. 그는 이번의 해결책이 시온에게 있다고 보고 있었다.
‘이 전쟁에 진 이유는 전부 그 녀석에게 있다.’
그리고 궁금한 점도 있었다. 대체 자신을 몰락시킨 녀석이 어떤 자인지 직접 대화해보고 싶었다. 그 마음은 시온이 작위를 챙겨 갔다고 했을 때 이미 절정이 되었다.
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자신에게 나타나기만 했다면 마리가 준 작위 이상도 안겨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시온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귀를 기울이고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등장한 시온의 인상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자만 데려올 수 있다면.’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왔습니다.”
전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키워왔다. 그리고 철저하게 생각해본 결과 모두 이 녀석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벤은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의 부하들의 의견을 갈리는 편이었지만 그는 시온을 보고 나서 더 확신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문제가 시온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분상 시온에게 그런 뜻을 표하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그래서 숨기려고 노력을 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
시온은 상대가 인지 부조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그런 것이 얼굴과 몸이 따로 놀고 있던 것이다. 시온이 눈치가 좋은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이상했다.
“만···. 만나고 싶었네. 명예로운 자답게 이에 응해줘서 고맙네.”
그는 말도 은연중 떨었고 이마에선 오한이 나는지 갖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제가 벤 님을 베어버리겠다고 겁박 주는 것으로 보이겠습니다.”
“뭣?”
뜨거운 물이 부어진 것처럼 그는 깜짝 놀라서 시온의 단어에 반응했다. 시온은 농담으로 던졌지만, 그는 순간 진심인 줄 알고 착각했다.
“농담입니다.”
“아, 하하하하하. 그런가.”
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벤은 전장에 있을 때보다 지금 더 긴장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벤은 지금 시온이 중요했고 전장 때보다도 그의 본능이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꺼내야 할 단어도 고르고 고르게 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해주십시오.”
시온은 상대의 상태도 좋지 않고 이곳에 오래 있어 봐야 좋은 일도 없었기에 현대인처럼 빠르게 요지를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가 있다 보니 허례 섞인 말을 섞어야 했으나 그건 시온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가족을······.”
“예상하였습니다. 금화만 알맞게 챙겨주신다면 제가 따로 안전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그···.”
벤이 정신이 없어질 정도로 당황했다. 가족에 대한 얘기가 무심코 나왔다. 사실 이것을 말하려고 시온을 부른 것이 아닌데 시온이 너무나 빠르게 짚자 실수해 버린 것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따로 종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온이 일어나려고 하자 그의 체면은 완전히 구겨져 버렸다. 자링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아무리 시온이 지금 벌인 일이 있다고 해도 펜부르크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자링 가문은 오랫동안 주위에 많은 남작과 근처 귀족들에게 존중을 받아왔다.
그중에 가장 귀족답게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것이 벤 남작이었다. 그 정도로 지배자 다운 행동을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은 평소에 그를 조금이라도 봐왔던 자가 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엉겁결에 넘어진 것은 물론이고 자신도 모르게 시온의 발을 붙잡았다.
“?!”
시온은 이 난데없는 상황이 너무 뜻밖이어서 당황했다. 시온이 벤 남작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속심이 시원하게 나왔다.
“검을 나에게 써주게! 아직 이 승부는 끝이 나지 않았어!”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자네만 있다면 이 승부는 지금도 뒤집을 수가 있단 말이야. 나에게 제발, 제발, 제발 검을 바쳐주게.”
위험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밖에 새어나간다면 아무래도 나쁜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비밀리에 주고받음 자체가 이곳의 특징이었다.
이런 제안을 받은 것 자체가 시온이 이제 과거와 달라졌다는 뜻이었고 한 발자국 내디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벤 남작 당신은 졌습니다.”
“마리가 대체 네게 무엇을 제시했지? 남작 정도가 전부인가? 그렇다면 나는 펜부르크를 주겠다.”
“?!!!”
그의 놀라운 발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승부에서만 이길 수 있다면 시온에게 모든 걸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펜부르크를?’
시온도 솔직히 놀랐다 이 정도로 큰 제안이 올 줄은 전혀 몰랐다.
“제정신입니까?”
“아니다. 내가 주겠다는 것을 신에게 맹세하지. 너에게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자링 가문은 파멸할 것이야. 나는 네게 펜부르크의 모든 실권과 내가 가지고 있던 대 남작의 작위를 넘기겠다.”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거의 몽땅 다 넘기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상황이 뭔가 미묘해졌다.
지금까지 발발 떨던 인간이 드디어 정신이 명료해졌는지 시온을 보면서 제대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하긴 하겠지. 이대로라면 그대로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