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 거성(1)
피에르의 목소리는 밝았다. 다들 지금까지 겪었던 피에르의 백팔십도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의 부하도 지금까지 피에르를 관리하던 자도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시온에게만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건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지도.
-시온 경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 같은데.
다들 여러 추측을 하고 있었지만, 궁금증만 더해질 뿐 알 방법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어레이는 신기해서 시온이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사실 어레이는 몇 번이고 피에르에게 무언가를 먹이려고 시도를 했다. 그럴 때마다 거부당하든지 반응이 없든지 욕을 먹었던 것이었다.
말이야 하지 않았지만, 어레이는 여기에 대해서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던 터라 시온이 이 일을 간단하게 해결하자 답을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저도 궁금한데요.”
“?”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이번 일에 대해선 그냥 시도만 해보겠다고. 정신 나간 사람을 어떻게 추스릅니까. 저는 그 정도 마법사는 아닙니다.”
어레이는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온의 성격상 무언가를 하긴 해서 해결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어쨌든 가는 길에 이와 같은 문제에 시달리는 일은 이제 없었다. 그 뒤로 심각하게 먹지 않거나 난동 부리는 일도 없었다. 피에르는 조용히 눈치를 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ㆍㆍㆍ
에른스트 오리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내쉬었다. 그의 눈은 붉게 되었고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이름밖에는 돌고 있지 않았다.
‘시온 니벨룽’
골든 평원에서의 전투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부터 그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다. 자식이 잡혔다는 것도 뒷전일 정도로 그는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시온은 어디라고 했지?”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에른스트의 활기찬 목소리는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의욕을 잃어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동자에 기운이 넘쳐 흐르던 오리엔 영주는 한 시온에 의해 꺾여버린 것이다.
“공작에 준하는 대접을 준비해라. 모든 병력은 다 내보내고,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한 마디로 성 자체를 비워주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즉 마음만 먹으면 오리엔의 거성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인 것이다.
이런 결정을 쉽사리 할 리가 없었지만, 그 정도로 에른스트는 많은 것이 강제로 포기된 상태였다. 물론 대부분이 에른스트의 상태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의 자식들이 그랬다.
-피에르 그 자식.
-어떻게든 시온을 자극하면 피에르를 보낼 수 있는 거 아닌가?
-한낱 기사에게 왜 이렇게 휘둘리는 거야?
시온이 오리엔에 도착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몇몇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시온에게 말했다.
“오리엔 성이 텅 비어있습니다.”
말한 바를 지킬 것인지에 대한 것은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항상 철저히 해야 할 것이었다.
물론 이 정도의 협상에는 다양한 안전장치가 되어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이곳이라고 해도 불문율이 있었고 그것은 엄밀하게 지켜졌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귀족사회에서 도태되거나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모르는 것이 잃은 게 많은 사람이다.
시온은 오리엔 영주의 장자라는 카드를 쥐고 있었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고 있지는 않았다. 저기 멀리서 새로운 집단이 몰려오고 있었다.
“헤헤. 제 둘째 동생입니다. 저희 가문의 깃발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피에르가 시온의 옆에서 그렇게 조언했다.
“........”
물론 포로이긴 하지만 신분도 높아 내용이 결정될 때까지 약간의 자유만 제한된 상황이 현 피에르의 상태였다.
얼마든지 시온에게 자기의 몸값에 대해서 흥정을 할 수도 있고 다양한 위협도 할 수 있다. 기사도 몸값이 보장되는 마당에 영주의 아들은 그것보다 더 높은 것들이 보장된다.
“둘째 동생은 말은 정중해도 비열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겁쟁이인 면이 있어서 둘째가 이곳에 나왔다는 것은 별다른 위험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놀란 어레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피에르와 시온을 번갈아 봤다.
‘왜 저런 말을 술술 놓는 거지? 정신계 마법인가? 과연 빈틈이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완전히 무리가 얽혔다. 중요한 손님이 있으면 아들을 보내 마중 나가게 하는 것이 이곳의 관습이었다.
장자가 잡힌 상태이니 다음 순서인 둘째가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면 놀랄 얘기였다. 오리엔이 아들을 마중 보내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오리엔 가문의 자존심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아무리 시온이 카드를 쥐고 있다고 해도 시온은 아직 작위를 받기 전이었고 자유 기사로 알려졌었다.
따라서 이런 저자세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외인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그 정도로 장자를 중요시하는 군,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오리엔 영주인 에른스트는 시온을 자링 가문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자가 시온 니벨룽······. 인가. 과연.’
오리엔 영주의 둘째 아들인 올드르는 눈을 빛냈다. 시온의 이미지는 그에게 투박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보자면 매우 평범했다. 그런데 저 남자 하나에 영지가, 가문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줬다.
“옆에 피에르 님이 보입니다.”
“음? 모습이 많이 변했군.”
“포로가 된다는 것은 사지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시온과 가까워질수록 올드르는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태연하려고 해도 그의 성격상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자를 어떻게 자극한다지?’
한눈에 봐도 소문 이상의 기사로 보였다. 압도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아까부터 준비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가 그의 생각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특히 시온 주변에 있는 자들이 시온에게 보내는 움직임과 눈빛들은 특별난 것이었다. 완전히 휘어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만나게 됐다. 원래라면 인사를 먼저 받는 게 맞았다. 아무리 마중을 나갔다 해도 영주의 아들인 올드르와 시온의 위치는 차이가 있었다.
“올드르 그렇게 굼떠서 뭐하느냐! 시온 남작님께 인사를 해라.”
“?!”
올드르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자마자 피에르가 호통을 친 것이었다. 형의 모습이라면 모습다워서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나 역할과는 너무 맞지 않았다.
그리고 낯선 단어 때문에 더욱 놀랐다. 남작이라는 단어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귀족 사회의 전부였다.
누구의 아들이라고 해도 그것은 고작 해봐야 작위가 없는 이들끼리 나눌 수 있는 급에 불과했다. 시온이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번 공훈으로 작위를 받았구나. 이건 보통 일이 아닌데.’
올드르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작위가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일대의 새로운 세력이 만들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자식이.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아직도 그 습관을 못 버린 것이냐.”
피에르가 다시 한 번 크게 소리를 치고는 흘깃 시온의 눈치를 봤다. 이렇게 그가 반복적으로 동생을 윽박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시온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의 이유가 많이 있었지만, 자신의 목숨이 여전히 시온에게 잡혀 있다는 사실 하나에 그의 정신은 오로지 시온에게 맞춰져 있었다.
‘저런 개새끼. 패배자 새끼가. 저걸 형이라고.’
“크흠. 흠. 죄송합니다. 시온 님. 작위를 받으셨습니까? 제가 아직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해서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창피를 당했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화를 내는 것은 나중이어도 되는 것이다.
“아니 뭐 나는 상관없습니다.”
사실 시온은 이런 허례는 정말로 상관없었다. 시온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과연 이들이 약속을 지켰을지의 여부였다.
끝까지 확인을 해봐야 하는 그런 성격이 작용한 것이다.
“이게 뭐냐? 겨우 이 정도로 시온 님을 마중 온 거냐?”
피에르가 다시 트집을 잡았다. 당연히 나름 최대한 준비해서 온 것인데 것도 그 원인이 이런 말을 하자 올드르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화가 났다.
“형님. 말씀을 좀 조심하시지요. 원래 막 나가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여기 눈이 많습니다. 가문을 얼마나 욕보이려고 하시는 겁니까?”
“멍청한 놈! 그 가문을 가장 생각하는 게 바로 나다!”
그러면서 피에르는 다시금 시온을 힐긋 쳐다봤다. 상황이 이 정도 되자 오리엔 측의 귀족들,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굉장한 강자한테 아주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에르가 예전에 한 번 저런 식의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상대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조건반사적인 피에르의 습성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이들은 시온이 소문 이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저 망나니 놈이 사람 보는 건 정확하잖아.
-꼼짝을 못하는군.
시온은 여전히 주변을 살피느라 말이 없었고 착각이 길어진 오리엔 측의 사람들에 수군거림이 꽤 길어졌다.
한번 이런 식의 여론이 형성되자 아무래도 다른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니 그게 정론이 되어 갔다. 시온 니벨룽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으로 말이다.
즉 잘못 행동한다면 시온의 뒤를 봐주는 자에게 크게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게 맞아 보였다. 피에르가 얼마나 사람을 막대하고 가리는 데 저런 행동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쯤 되자 오히려 위험요소로 판단되는 것은 올드르였다. 귀족들에게는 피에르의 행동이 오히려 옳아 보였다.
“잠깐, 올드르 도련님.”
“?”
“말실수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
“공작급 예우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생각하시고 예우하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지?”
올드르에게 조언하는 귀족은 오히려 실망스럽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작위에 대한 얘기와 피에르의 행동만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줄 알았어야 했다.
‘역시 성격은 막 나가도 계승은 첫째 도련님이 낫지 않나.’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마리가 작위를 그냥 넘겼겠습니까? 분명히 다른 인물이 얽혀 있습니다.”
화가 나서 흥분했다가 그 말을 듣자마자 올드르는 급격히 침착해졌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아 보였다. 잠깐 침을 삼키고는 빠르게 시온에게 말했다.
“시온 님.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서도 사과드립니다. 그러면 저를 따라서 안으로 가시지요.”
“아니. 이곳에서 확인이 끝날 때까진 움직이지 않을 예정이요.”
시온은 하루 정도를 더 보고 있었다. 밖으로도 안으로도 사람을 보냈으니 하루 이틀 정도면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시다면 맞춰드려야지요.”
그러면서도 이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에르의 숨겨진 행동이 맞아 보였기 때문에 시온이 정말로 이번 일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대책을 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