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304)

오리엔 거성(3)

“어어!!!!”

“잠깐!!!”

“안돼!!!”

안타까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대부분이 이번 상황이 무거웠기에 참고 있었던 그런 끈들이었다. 

아까부터 꾹 참고 있던 것들이 방금 이 순간에 모두 풀려 버린 것이었다.

시온의 행동을 수십 명의 귀족이 눈 빠지게 보고 있었다. 복잡하고 다양한 얼굴들이었다. 

피에르를 혐오스럽게 보기도 했고 망연자실하거나 얼굴을 부여잡는 이도 있었다.

“음, 서명이 아주 멋집니다. 시온 경.”

“......”

일단 악필로 서명하긴 했는데 시온도 황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목표가 이거였으니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이 정도 밥상이라면 손이라도 올려보는 것은 현대인이라면 자연스럽게 하는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마법사라 그런지 냉철하군.’

‘명예가 있지는 않았지만 이건 크다.’

‘정말로 노련하다. 협상에 아주 닳고 닳았군. 분명히 피에르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압한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가 있는 거지? 무슨 거래가 있었던 것이지?’

같이 간 기사나 귀족들도 이걸 우연으로 보고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오리엔 측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정도의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반밖에는 되진 않았다.

“인정 못 합니다! 저 새끼는 포로라고!”

“나는 오리엔 가문의 계승자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넌 병신이야.”

예의고 뭐고 체면이고 뭐고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피에르와 그의 동생들이 욕설을 주고받았다. 올드르처럼 침착한 자도 있지만, 피에르와 마찬가지로 성격이 좋지 않은 동생도 있었다.

황당하거나 급하거나 이런 열이 받는 상황에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운 자도 있기 마련이었다. 셋째인 지크문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저 개새끼를 오늘 죽일까 말까.”

키가 이미터에 육박하는 오리엔 삼남은 가문을 물려받을 일이 없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기사 수업만 받은 그런 괴물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크문트는 기사로서의 최고의 명성을 달리고 있는 시온을 무섭게 바라봤다. 

안 그래도 참을까 말까 한 분노였는데 시온을 보고 나서 머리가 복잡해진 지크문트가 괴성을 지르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

“막아!!!”

“지크문트!!!”

이런 장소에서 지켜야 할 귀족으로서의 관습은 정말로 엄격했다. 

절대로 불문율을 어겨서는 안 됐다. 소문이라도 나게 된다면 귀족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런 규칙을 어긴 귀족은 다른 귀족들이 따돌리거나 어떤 종류의 손실을 일부러 안겨줄 정도였다.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 건은 그 급이 더 높았다.

“죽어!!!!!!”

지금까지 참고만 있다가 여러 가지가 겹쳐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는 지크문트는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검도 일반 검보다 더 거대한 것이어서 저기에 베였다가는 좋게 끝날 수가 없었다. 

운이 좋아도 걸레 짝이었다. 몇 명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검이 향하는 방향과 목적은 당연히 피에르였다. 

아예 이참에 시온의 눈앞에서 피에르를 작살을 내버려야 이 감정이 해소될 거로 생각한 것이다.

피에르는 너무 놀라서 다리를 헛짚었으나 검을 피하기에는 너무나 느렸다. 

‘미치겠군.’

시온은 지크문트의 검을 막아내고는 혀를 찼다. 이렇게 상황이 급발진할 줄 몰랐다. 솔직히 서명한 것은 조금 과했나 싶은 생각이 살짝 들려고 했다.

“????”

“?!”

그런데 너무 급한 나머지 모습이 희한하게 됐다. 

시온이 그냥 근처에 있던 검을 뽑아서 막아낸 것이었다.

자세도 이상하고 검도 좋은 것이 아닌 데다가 무려 한 손이었다. 

“비켜라!”

“안 되지.”

시온은 뒷말을 생략했다. 아, 진짜 이 집안 미치겠네.

피에르가 여기서 죽게 되면 일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싫은 시온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것이 기름을 부은 것인지 지크문트의 이마에서 힘줄이 솟았다.

앤드류의 메모라이즈가 발동한 것도 동시였다. 것도 벨저가 전수한 무기술이 행동 각인 마법의 원칙에 의해 발동한 것이다.

그가 뭔가를 하려는 잠깐의 틈 정도로 시온의 다음 동작이 급격하게 진행이 됐다. 시온이 공격을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시온이 먼저 공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휀트 급은 아니군.’

시온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고 나서 바로 그 생각이 들었다. 그 기세와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달려든 것은 지크문트이고 한참은 더 유리한 조건이었는데 일방적으로 움찔거리듯이 막아야만 하는 동작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기사들은 그 순간적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그야말로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그 정도로 시온의 명성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가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한 체력, 단련, 타고난 힘, 높은 격의 무기술 여러 가지를 시온이 다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너무나도 갑갑하게 일방적으로 당하자 지크문트가 다시 한 번 괴성을 터뜨렸다. 그것도 일종의 전략적으로 볼 수 있는 행동이기도 했다.

갑자기 저렇게 소리를 터뜨리면 아무래도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지크문트는 이런 식으로 위기를 극복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시온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들은 모두 속고 있는 것이었다. 

시온은 철저하게 마법사였고 그 마법사들도 존재를 모르는 고급 마법 장비를 이용해 무기술을 각인시키고 그 흐름에 맡기는 형태였으니까 말이다.

원래 수세에 몰리고 있으면 둘 중 하나였다. 좀 더 주도권을 잡아내기 위해 기다리거나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지크문트는 점점 숨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온의 기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에 눈에 초점이 점점 풀리다가 결국엔 시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잘못 건드려버렸다.

푹-

결국에 어깻죽지에 검이 꽂히고 끝이 났다. 것도 강력하게 들어가서 바로 치료가 필요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 하마터면 이번 일도 큰일 날 뻔했군.’

그리고 훨씬 더 마나를 소비해버렸다. 전장이었으면 약간 걱정이 들 정도의 마나 소비다. 아무래도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애초에 벨저가 가르쳐 준 무기술을 메이스였지 검이 아니었다. 억지로 사용한 데다가 검조차도 영 상태가 좋지 않은 일반 검이었던 게 문제였다. 

주변이 싸늘해졌다. 모두가 자신들이 무엇을 봤는지 쉽사리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 정도로 시온의 솜씨는 깔끔했다. 오직 몇 명만이 시온의 존재를 다시 재확인했을 뿐이다.

“지크문트 이 자식이!!! 감히 네가!!”

바닥을 구르고 있던 피에르가 달려와서 지크문트를 발로 내리쳤다. 지크문트는 이미 피를 흘리고 부상이 심한 상태라 반항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크문트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온의 존재가 너무나 강력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한두 명이 눈치를 보던 것이 순식간에 모두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온은 다른 의미로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이었다. 그냥 저질러 버린 일에 대해 황당함이었다. 그러나 그 상념은 곧 깨졌다. 

워낙에 피에르가 난리를 치고 있었다. 만약에 저기서 상처가 더 나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도 뒷부분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만!”

다급하게 시온이 소리쳤다. 피에르가 발로 가격 하는 동작 그 자세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그제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치료를 위해 사람을 부르고 일종의 소동이 나기 시작했다. 시온은 재빠르게 지크문트의 어깻죽지에 박혀 있는 검을 뽑았다. 간이 방어구가 살짝 있었다.

뽑자마자 피가 줄줄 흘렀다. 출혈을 지혈시키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했다. 압박을 해버리면 됐다. 그리고 거기에 포션을 부었다.

성능이 좋은지라 보글거리는 게 치료가 되는 것 같았다.

-명예롭군.

-어쩔 수 없지 않았나.

-하여튼 도련님들의 성격들이 참.

오리엔 측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올드르는 일단은 누군가가 죽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곧장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안 그래도 시온에게 가지고 있던 그런 감정들이 끝까지 차오르고 있던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인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다. 

‘우리가 당한 건가?’

‘아니면 우연?’

올드르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형이든 동생이든 둘이 저지른 일을 그가 어떻게든 무마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이제 여러 가지의 추측과 퍼즐이 맞춰지고 시온이 단순한 기사도 마법사도 아니고 거대한 세력을 등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마당이다.

여기서 실수를 하게 된다면 오리엔 자체를 침공당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시온 남작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

올드르가 결론을 내리고 나자마자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세로 시온에게 사과를 구했다. 놀랍게도 시온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모두가 오리엔 측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오리엔 측의 귀족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올드르가 올바른 처신을 해서 다행이다고 생각하는 자도 많았다.

올드르가 침을 삼켰다.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되돌려야 했다. 

사과는 사과였지만 이 협정서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향후 오 년에서 십 년의 수익을 잃어버릴 것을 각오해야 했다.

엄청난 손해가 유발될 뿐만 아니라 남 작위 하나를 그냥 넘긴다는 것은 그 이상의 손해였고 특히 자존심의 문제에서 영원히 남게 될 그런 상처였다.

올드르의 눈은 시온의 입과 표정에 초집중 되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불안감이 뇌를 잠식했다. 도대체 시온의 다음의 수가 무엇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됐습니다.”

“그렇다면 그 협정서는 혹시.”

“당연히 체결된 것이지. 잔머리 굴리지 마라. 어리석은 동생아. 시온 경에게는 절대로 안 통한다.”

“?”

“?!”

“!!!”

시온한테서 목숨을 구원받은 피에르의 상태는 아주 복잡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시온이 아주 무서웠다. 

전장에서의 그 일이 벌어진 뒤 하루도 빠짐없이 시온과 관련된 악몽을 꿨다.

매일 같이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악몽이었다. 그 공포의 기사는 그의 기사들을 베어버리고 간단하게 그의 머리를 잘라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감정은 오히려 지금 다른 것으로 변환된 상태였다.

동생에게 목숨을 잃어버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시온이 오히려 그의 목숨을 도와준 순간 더 높은 어떤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형은 포로였어.”

“난 계승자다.”

“아버지의 대리는 나야,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음.”

시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소리를 내자 둘의 얼굴이 동시에 시온에게 집중됐다. 

아무래도 이 정도 판이 깔렸는데 한번은 밀어 붙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인 것 같았다. 

반응이 안 좋으면 바로 대화를 다르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 시온은 입을 열었다.

“이 협정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두 사람의 의견은 모두 타당하니 불만이 있으면 결투로 해야겠지.”

‘당했다. 역시 거대한 판을 짜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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