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 거성(4)
올드르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는 생각에 혀를 물 뻔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저 평범한 얼굴을 보고 착각을 하면 안 됐다.
특히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하나 행동하는데 이제야 그 그림자가 걷어지는 느낌이었다. 올드르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괴고는 생각했다.
“결투······.”
이러한 방식의 해결은 현대인이 볼 때는 무식한 방법이지만 이곳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명예로운 해결책 중 하나였다.
그것이 기사든 마법사든 귀족이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분쟁이 있어서 결투로 해결하는 것은 신이 보장하는 성스러운 것이었다.
‘엄청난 한수로구나.’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것으로 다가왔다. 특히 시온이 지금 오리엔 영지 자체를 노리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올드르에게는 더욱 그랬다.
장남과 차남이 검을 들고 결투를 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손해였고 문제는 이 결투가 기사들의 결투가 아닌 귀족끼리의 결투라는 것이었다.
즉 대리결투가 가능했다.
‘분명히 형의 대리인으로 시온이 나오겠지.’
“시온 경 다운 명예로운 제안입니다. 어떠냐 네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투로 해결하는 것이 맞다.”
“........”
올드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허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받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야말로 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도전을 피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일이었다. 가문에게 있어서도 치명적이었다.
‘이미 말려들었어. 이미 진 건가.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동전을 돌려 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올드르는 할 수 없이 기약이 없는 이 동전을 돌려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시도는 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음?”
시온은 정말로 별생각이 없는 상태였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의 행동을 보고 만약에 너무 화를 내면 그냥 다시 협정서를 보자고 할 계획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피에르가 소리쳤다.
“나는 이 신성한 결투에 대리자를 요청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시온을 쳐다봤다. 시온은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런 게 있었나?’
대리 결투라는 것이 이런 구조인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시온이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간절한 눈을 보니 해주는 게 맞아 보였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올드르를 비롯한 오리엔 측의 귀족들이 망연자실했다.
대략의 일이 정리되고 나오는 길에 어레이가 시온에게 조용히 궁금증을 물어봤다.
“시온 경.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말입니까?”
“그, 피에르를 대체 어떻게 했길래 저 녀석이 저렇게 변했습니까?”
시온은 팔짱을 끼곤 진지하게 고민했다.
“밥을 먹여서?”
ㆍㆍㆍ
지크문트가 누워 있는 침실을 중심으로 많은 자가 여러 가지 생각을 교환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뜻밖에 밝았다.
“올드르 도련님의 적절한 판단이 없었다면 거기서 정말로 큰일 날 뻔했습니다.”
“시온 니벨룽 후. 정말로 이런 쪽에도 대단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농락당했습니다.”
“피에르 도련님이 혹시.... 이미 정신이 무너졌다던가.”
“가능성이 있지.”
“시온 경이 전장에서도 힘을 아껴두고 있었다는 게 맞아 보입니다.”
이번엔 다른 의견이 나왔다. 그 전장에 참가하고 있었던 기사가 무겁게 입을 연 것이다.
“사실인가?”
“그때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분명합니다. 단기간에 강해졌다는 것은 설명하기 힘드니 처음부터 숨기고 있었다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전장에서 그게 가능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지만 직접 눈으로 봤고 그 당사자인 지크문트가 부상에 누워 있으니 꽤 설득력이 있었다.
“아버지는?”
“일을 맡긴다고.”
이번 일의 충격에 오리엔 영주는 거의 은퇴 상태였다. 그 정도로 기력이 없었다.
“그러면 이제 본론을 들어가 보지. 나 역시 대리인을 정해야 한단 말이지. 그러니 경이 어떤가.”
올드르가 바로 옆에 있는 고트 경에게 물었다. 그의 안색이 나빠졌다. 자연스럽게 긴장된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가 헛기침을 했다.
“죄송한 얘기이지만 제가 아직 전장에서 얻은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게 있었나?”
“아, 예. 있습니다. 굳이 걱정을 드릴 필요가 없어 보여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런 부상은 없었지만 고트는 이 일이 끝나자마자 부상을 만들 생각이었다.
몇 명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트 경을 쳐다봤지만, 굳이 확인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알아봐 줄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지크문트가 악몽을 꾸는지 헛소리를 해댔다.
“시온 경의 꿈을 꾸나 보군.”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이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
“어떤 말씀 말입니까?”
올드르가 갑자기 중요한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다는 듯이 주의를 끌었다.
“시온의 뒤는 아마도 네로빙거다. 그리고 우리 오리엔 영지를 노리고 있다는 거지.”
모두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어느 정도 다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이었다.
황가의 방계 가문이 지원하고 있다면 자칫 잘못 하다가는 꼼짝없이 당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올드르의 명을 받은 고트 경이 다른 기사들을 찾은 것은 곧장 이뤄진 일었다. 십 여분이나 명예와 관련된 긴 설명을 한 고트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 명예를 차지할 기사를 나는 찾는다.”
‘지가 할 것이지.’
‘희생양을 찾는군.’
“경께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나는 부상을 입었다.”
“.......”
싸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얼마 전까지 수성을 강화한다고 설쳐대던 인간이 갑자기 다쳤다니 누가 봐도 시온과의 결투를 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번에 지크문트 도련님 당하는 거 본 사람.
-괴물이던데.
-벨저 공의 제자라는 얘기가 있어.
-그거 진짜인가?
-나도 그런 얘기 들었다. 듣자하니 휀트 루지엥을 두 번 다 격파했다던데.
-뭣? 휀트 루지엥이라면 그 붉은 혜성! 루지엥 가문의 천재!
“이 겁쟁이들. 너희 중 명예로운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냐?”
“........”
여전히 상황은 조용했다. 이번 일의 중대성을 생각해보면 결투 중에 죽거나 장애가 될 확률이 높았다. 모두가 지크문트가 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지크문트 정도면 오리엔 영주의 직계 아들인데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뚫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 밑의 사람은 그 이상을 각오해야 한다.
그걸 자발적으로 한다는 거 자체가 맛이 간 행동이었다.
여전히 침묵이 이어졌다.
뻔히 박살 날 걸 알고 있는데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용기보다는 만용이었다.
애초에 지크문트가 검을 뽑고 달려든 것부터 큰 명예의 실추가 있는 것이었다.
즉 안에서 명예로운 행동이니 나서라고 해도 밖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괜히 얽혔다가는 여기서 인생 종 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후, 어쩔 수 없군. 그러면 투표로 한다.”
“!!!”
누가 보면 충격적인 선택이었지만 이들은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경도 하셔야 합니다.”
“나는 부상을...”
“그거 아무도 안 믿습니다.”
“........”
ㆍㆍㆍ
“후우. 후우. 후우.”
시온은 아직 오직 않았고 만들어진 간이 결투장에 서 있는 전도유망한 기사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강화 단약은 모두 먹었나?”
“최...최대한.”
“잘했다. 이건 불명예가 아니다. 시온 경도 이해해줄 것이다.”
신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이 명예 결투에 강화 단약은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모두 복용하고 결투에 임한다.
그런 것을 지키는 것보다 승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강화 단약 자체도 비싼 편인데 이번 일의 불쌍함을 생각해서 기사들이 하나씩 차출해 그에게 몰아줬다.
뒤에 분명히 육체에 무리가 올 것이었지만 당장 이 결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너무 먹은 거 아닙니까?”
“지금 펜닐 녀석한테는 칼도 잘 안 들어가. 각력단을 먹였다.”
“그게 있었습니까?”
“나도 그리 모진 놈은 아니야.”
고트가 한숨을 쉬면서 답했다.
그런 와중에 시온이 도착했다. 시온은 이번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겨야지. 협정이 잘 마무리되면 돌아가서 남작위도 무탈하게 받을 것 같고. 금화도 더 챙길 수 있겠지.’
여기 있는 모든 자가 시온이 몸을 푸는 모습을 주목했다. 특히 기사들은 눈이 빠질 정도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온이 이기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오히려 한 번 더 그 솜씨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자기편이 이기기를 바라야 하지만 입으로 꺼내지만 않았지 이미 시온의 밑으로 가서 검을 바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기사도 몇 명 있었다.
‘이참에 몰래 말해볼까.’
시온이 남작위를 얻게 되면 시온에게 검을 바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많은 기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기사이자 마법사이고 네로빙거 가문과 연결되어있는 정체불명의 젊은 천재, 이들이 인지하고 있는 시온은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펜닐이라고 합니다. 경 영광입니다.”
“시온 니벨룽이요.”
-잠깐만 시온의 무기가 이상한데?
-검 아니었나?
-시온 경은 메이스가 주력이다.
-?
시온이 메이스가 주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력 무기도 아닌데 지크문트를 몰아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메이스일 때는 더 강하다는 뜻이 된다.
이번엔 여유 있게 하기로 마음을 먹은 시온은 천천히 그의 주위를 돌았다.
‘강화 단약을 많이 먹었군.’
시온은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온이 여기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마나에 민감한 체질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저 정도 복용이면 한 번 제대로 해볼까.’
시온은 한 번 전력으로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벨저 공이 전수한 무기술과 그리고 그때보다도 더욱 정교해진 메모라이즈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곳에서 시간이 빌 때마다 자세 하나하나를 더욱더 정교하고 완벽한 급으로 교정을 해왔다. 즉 휀트와 붙었을 때보다 더욱 식 하나하나가 격이 높다는 뜻이었다.
희한하게도 상대는 숨이 거칠었고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강화 단약 대충 몇 개 먹였습니까? 왜 안 움직일까요? 펜닐 성격이라면 진작에 달려들었어야 할 건데요.”
“한 열 개?”
“? 그 정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본인이 원하는데 그러면 어떡하나.”
“잘하면 이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약간은 있지.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니까. 지금 펜닐 녀석은 괴물이라고 그냥 뒷생각 안 하고 덤비는 거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충돌에 그들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정확히 세 대로 메이스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펜닐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육중한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시온이 투구를 벗었다.
“아, 시발. 죽은 거 아니지?”
시온도 놀라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