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304)

오리엔 거성(5)

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질 줄은 그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펜닐 경의 실력은 나름 오리엔 영지에서 차세대를 끌어갈 인재로 꼽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제국 수도에서 강도 높은 종자 훈련을 마친 그가 이렇게 쉽게? 그 사실만으로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몇 명은 펜닐이 단약을 과다 복용했다는 비밀까지 알고 있는 상황, 모두의 시선이 시온에게 쏠렸다.

“휴, 살아있네.”

시온은 재빠르게 코에 손을 대보고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에 제대로 메이스가 들어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물론 눈에 초점이 없고 약간의 각혈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살아는 있는 것이다. 

대기하고 있던 치료 마법사가 뛰어왔다. 기사들은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펜닐이 걱정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방금 본 경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열띤 열의와 선망이 담겨 있었다. 이번 명예 결투는 공식적으로 열렸기에 협상 장소완 달리 모든 기사와 종자들이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시온의 실체가 궁금했던 이들은 이 결투 경기를 보기 위해서 자리를 원했고 자리는 한정적이었기에 치열한 경쟁까지 펼쳐졌었다. 암표까지 돌 정도였다.

-믿을 수가 없어.

-방금 뭘 본 거지?

-펜닐 경 죽은 거 같은데.

시온은 치료 마법사에게 자리를 내줬다. 아주 난리가 났다.

“펜닐 경 살아날 수 있습니다! 숨 쉬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숨은 쉬고 있는데 너희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시온은 한마디 할까 하다가 꾹 참았다. 주위는 여러 가지가 겹쳐서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치료 마법사는 펜닐을 살리려고 난리가 났고 기사들은 시온의 경지에 대해서 수군거리고 있었으며 수뇌부는 수뇌부대로 미칠 것 같은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 잠깐을 못 버티다니.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올드르는 시온의 얼굴을 본 순간 정신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헛구역질로 이어진 것은 동시였다.

“?!”

“올드르님!!!”

“거기 뭐하나!”

“펜닐 경을...”

“충분하니까 당장 이리로 와!”

얼굴이 핼쑥해진 올드르는 체결된 것이 확실해지는 그 협정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을 해결하려면 정말 빨라야 오 년 꼬박 십 년은 깡그리 털려야 했다.

시온도 뭔가 움직이기는 해야 했다. 이렇게 당황해서 넋 놓고 있을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뭔가 대화라도 해볼까 해서 올드르 쪽으로 걸어갔다.

“시온 경이 옵니다!”

“허.”

“올드르 님! 정신 차리십시오. 시온이 옵니다.”

그 말에 후들거리는 다리의 경련이 바로 멈췄다. 극한 긴장의 상황이 오면 사람은 무너지거나 아니면 그 이상의 힘을 내기 마련이었다.

‘영지가 위험하다. 제대로 처신하지 않으면 가문이 위험해.’

‘생각해라. 생각해. 어차피 잃었어. 승산이 낮았다고. 이대로 추한 모습을 보이느니, 조금이라도 기회를 잡아야 한다.’

올드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잃은 것은 많았고 선택해야 할 것이 극단적으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에른스트처럼 포기하거나 은둔할 수는 없었다. 올드르는 나이가 어렸고 명석했고 나름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시온이 도착했을 때 나름의 가치 있는 태도를 정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까?”

“괜... 괜찮습니다. 이거 실례를 드렸군요. 결투한 것은 시온 경인데 어째 제가 다친 것 같군요.”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굉장히, 굉장히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농담이라고 던졌는데 그 당사자인 올드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니 괴이하게 보였다. 

시온은 뭐라고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겨우 펜닐의 이름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펜닐 경은 나름 훌륭했습니다.”

“..........협정서는 체결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기에 불복한다면 그게 더 문제가 되겠지요. 저는 명예 결투의 결과를 따를 것을 동의합니다.”

“?”

일단 펜닐 경을 칭찬하면서 천천히 본론으로 끌어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올드르가 그 제안을 완전히 승인해 버린 것이다.

“올드르님!”

“이건 논의를 좀 더 해봐야 할···.”

“조용히 하게.”

올드르가 제법 점잖게 말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그는 아주 필사적이었다. 

모든 부분에서 시온에게 압도당한 상황이었기에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 최악의 상황만은 모면하기 위해 깔끔하게 인정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진행된 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진행됐으니 시온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려고 노력하고 궁리를 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었다.

“하...”

“알겠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이런 어쩔 수 없는 낙담마저도 실수가 될 수 있기에 그것마저도 자제시킨 올드르가 시온을 흘깃 봤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온이 나름 만족한듯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ㆍㆍㆍ

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시온은 나름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찌 됐든 정말 술술 풀린 것이었다. 

이번 협정서는 단 하나의 안건도 수정되지 않은 날것의 것이었다.

심지어 이것을 작성한 귀족들도 이것이 전부 성사되리라고 생각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원래 승자의 협정서라는 것은 배를 째란 식의 무리수가 많이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원래라면 일주일을 넘게 잡았는데, 벌써 끝이 났단 말이지.’

일주일 서로 동의가 떨어지지 않으면 보름에서 한 달까지 잡고 있었다. 

그것이 여러 가지의 돌발 상황 덕분에 술술 풀렸다. 시온은 아직도 원인은 잘 몰랐다.

“잘 풀렸으면 됐지.”

시온은 잘 생성된 푸른 액을 마시며 피로가 풀림을 느꼈다. 푸른 액의 효과가 점점 더 좋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점점 강해진다. 생각보다 더 강해졌어. 그걸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누구냐! 여기는 시온 님의 거처다.”

밖에서 필립스의 소리가 들린 것은 동시였다. 

필립스는 지금 몰려온 기사들 때문에 정신이 바짝 든 상태였다. 그의 앞에는 여덟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무장 상태로 걸어온 것이다.

‘설마 했는데 오리엔 자식들 시온 경을 이렇게 대놓고 급습할 줄이야.’

필립스는 이를 악물고 몰려오는 자들을 노려봤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졌다. 여덟 명이라면 분명 필립스는 삼분도 막지 못하고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은 종자들조차 선택의 갈림길에 빠지곤 했다. 

평소에는 간과 쓸개를 다 빼주다가도 정작 모시는 기사가 위험에 빠지면 도망가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필립스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잠깐의 시간을 벌어주고 시온이 기습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더 크게 되실 사람이다. 시온 경의 기억에 강렬히 남고 싶다.’

이런 위기 상황이 닥쳐오자 필립스는 자신의 정신 깊숙이 숨어 있던 욕망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알았다. 본능적이었다. 

수많은 감정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욕구라 한다면 도피하고 싶은 도주하고 싶은 그런 생존 욕구일 것이다.

“멈춰라. 날 죽이기 전까진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자네의 이름은?”

“필립스다. 시온 경의 종자다.”

여덟 명의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사뭇 이상했다. 각오했는데 정작 상대들은 달려들기는커녕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시온 경은 종자부터 기본이 잡혀 있군.

-저런 복 받은 녀석을 봤나. 저런 실력으로 시온 경의 종자를 차지하다니.

-다른 건 몰라도 기개는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필립스. 시온 경을 잠시 뵐 수 있겠나. 안으로 들어가서 말을 좀 전해주게.”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것도 없었다. 밖의 소란을 눈치챈 시온이 어느새 준비를 다 마치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필립스 비켜라!”

시온은 이미 메이스를 휘두를 준비를 하고 뛰어나오고 있었다. 방금 까지 자신감에 차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한참은 다른 예기치 않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시온의 행동이 너무나도 민첩하여 맞대응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여덟 명 모두가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펜닐이 당하는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생생히 봤기 때문이었다. 

“경!! 잠...잠.”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한 명이 어깨에 맞아 날아가 버렸다. 일곱 명이 곧바로 시온에게서 대응하기 위해 펼쳐졌다.

벨저가 전수한 메이스 술은 정교해도 한참은 정교했다. 거기에 앤드류의 원리로 발동하는 마법은 자동으로 치명적인 틈을 발견하고야 만다.

일곱 명이 검을 뽑으려는 순간에 한 명은 뽑지도 못하고 당했다. 팔을 맞아 버리고 부러졌는지 소리를 내지르고는 엎어져 버렸다.

여섯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찰나에 두 명이 당해버리자 실력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깨달았다. 

대응할 수가 없는 상대이니 그에 맞춰서 빠르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큰 손실이 날 것이 뻔해진 상황.

“검을 버려!!!”

한 명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다른 다섯 명이 모두 동의했다는 듯이 검을 버렸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장이나 전투에서 기사가 무기를 버리는 일은 명예에 치명적이었다.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앞으로의 일에도 그만한 손실이나 손해가 나기 마련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사는 작위를 가진 자들에게 고용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가치가 확 떨어지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검을 자신의 손으로 떨어트리느니 죽음을 택하는 자도 많았고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기사들의 문화가 있었다.

그것을 여섯 명이 동시에 동의하고 검을 떨어트렸으니 필립스의 입이 벌어질 만도 했다. 

“시온 경! 멈춰 주십시오!”

상대의 행동을 확인하고 나서 안 그래도 멈추려고는 했다. 하지만 앤드류의 마법은 뒤끝이 길기 마련이었다.

깡!

결국에 한 명이 더 바닥에 나뒹굴었다. 거기에 겁을 더 먹어버린 다섯 명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시온 경 제발, 제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실수했다.’

이들을 흘겨본 시온은 아무래도 실수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일단은 대화를 해보자는 생각에 잠깐 생각해보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이미 혼란의 난장판이 됐는데 시온의 어순은 뭔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딴지를 걸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시온이 이런 답을 내자 다섯 명 모두가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저희는 경을 공격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필립스 알고 있는 게 있나?”

필립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말을 잘 골라야 했다. 시온에게 잘못 보이는 건 죽어도 싫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대응하려고 했습니다만 시온 경의 대응이 너무 재빨라서 넋을 놓아버리는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다. 충분해.”

“경!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시온 경에게 검을 바치기 위해 왔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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