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 거성(6)
“검을 바치러 왔습니다.”
“저 역시 검을 바치러 왔습니다. 신께 맹세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을 꿇은 다른 기사들도 시온에게 입을 열었다. 시온은 무슨 일인가 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제안을 필립스가 했다던가.
눈짓을 보내자 필립스는 모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런 대체 어떻게 처리하지?’
시온은 잠시 고민했다. 이곳에서 벌인 일이 있기에 시온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였고 어느 정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자마자 불꽃처럼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워낙에 이곳이 현대와는 다른 암투가 가득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랬다. 여덟 명 중에 벌써 세 명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상황.
‘뭐라고 말해야 하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뻔뻔하게 갈까.’
그러나 시온이 침묵할수록 다급하고 당황한 것은 무릎을 꿇은 자들이었다.
-설마 검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려는 건가?
-합격을 못 한 건가?
-끝까지 싸웠어야 했나?
시온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시온 경. 제발 부탁합니다.”
“?”
기사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시온은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이 왔다. 그냥 이들이 말하게끔 유도만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그런 무장 상태로 내 거처를 함부로 들어온 것은 잘못된 거다. 알고 있겠지?”
‘쓰러진 애들 죽은 건 아니겠지?’
“저희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저희는 시온 경의 명예를 생각해 완전한 격식을 차려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 점 거짓이 없음을 신께 맹세합니다.”
방금 말한 기사를 향해 다른 자들의 이마가 좁혀졌다.
‘아니 저 자식이. 내가 먼저 말했는데.’
“끄응...”
바닥을 기고 있는 세 명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팔이 부러지든지 다리가 부러지든지 흉부가 부러지든지. 물리 방어 마법이 걸쳐 있는 갑주 덕에 다들 의식이 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불리해졌다.’
검을 바치는 것도 하나의 경쟁이었다. 그런데 일격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으니 다른 자들만 받아들이고 끝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들은 지독한 훈련을 거쳤던 기사들이었고 부러지는 것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을 연마했다.
문제는 기다리면 회복될 수 있는 부상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시온 경에게 증명해야···!’
팔 부러진 녀석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후욱...훅...훅...과연 훌륭한 솜씨입니다.”
“?”
죽은 줄 걱정하고 있던 녀석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일어나자 시온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쉬었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나머지 녀석들도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아하니 셋 다 의식이 있었다. 흉부가 부러진 기사가 일어나는 데에 실패했다. 그가 소리쳤다.
“제기랄, 시온 경.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제기랄!! 누가 부축 좀 해줘!!”
그러나 다른 자들의 반응은 뜻밖에 싸늘했다. 다들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이것이 시온에게 좋은 모습이 될지 나쁜 모습일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었다.
“필립스. 치료 마법사들을 데려와라.”
“예.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입이 가장 무거운 마법사로.”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나 데려오면 안 됐다.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시온이 여기까지 딱 말을 마치자 다른 자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여기까지 입을 열었으면 어느 정도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부상자를 먼저 챙겨준다는 것은 시온의 성격에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
거기까지 도달도 하지 않았지만 누가 질세라 도움을 요청하던 기사를 돕기 위해 전력으로 움직였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시온은 기사들을 보면서 말했다.
“나에게 검을 바치고 싶다고?”
“예. 그렇습니다. 저희 모두 경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리엔 영주와 맺은 서약은 어쩌고?”
“하지만 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경의 결투를 본 순간 그 정도의 불명예는 감수하기로 다들 마음을 먹었습니다.”
기사라는 족속의 특이한 점 중 하나였다. 철저하게 이득에 따라서 움직이지만 그걸 포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서약과 맹세였다.
하지만 이러한 점도 비슷한 원리로 바꿔치기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는 것은 검을 받는 자의 몫이었다.
‘상관없겠지. 여덟 명쯤은.’
시온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고통을 잊을 정도의 기쁨이 이들에게 돈 것이다.
“나는 아직 내 영지도 가보지 않았다. 작위는 받을 예정이지, 아직 받지 않았고, 나와 고생하겠다니 나는 거부하지는 않는다.”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ㆍㆍㆍ
“비세, 알란, 브루노, 클락······.”
올드르는 시온에게로 넘어가는 기사들을 보고 뒷목을 잡았다.
하나같이 오리엔에서 군사를 맡길 수 있을 만한 강력한 기사들이었다.
“이런 개자식들이.”
고트 경은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욕했지만, 소리는 아주 작았다. 혹여나 시온이 들을까 조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트는 지금 아래턱이 힘을 주고 턱을 자연스럽게 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웠다.
개새끼들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시온에게 검을 바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받아들여졌다는 것 두 가지가 그를 안타깝게 했다.
‘나도 조금만 젊었더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기회가 있을까?’
그는 진심으로 지금 직위를 던져 버리고 시온에게 붙고 싶었다. 오리엔 영지는 향후 십 년간 암울할 예정이었다.
‘아무리 명예로운 행동을 지키면 뭐하나, 저 천재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나는 움직일 수가 없는데.’
“설득을 왜 하지 않았지?”
“저한테 거짓말을 하고 자기들끼리 결정한 모양입니다.”
“후우.”
“절대로 경거망동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일이 물거품이 됩니다.”
흔히 이러한 기사들을 되찾는 방법은 다시 압박을 넣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온을 상대로는 벌써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가면 가는 대로 보내는 것을 참아야 한다. 올드르는 이 시련을 견디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올드르가 별다른 말이 없자 남아 있던 기사들이 모두 동요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자식들, 작당 모의를 여러 번 하더니 결국엔 먼저 선수 쳤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입을 열고 있지 않을 뿐이지 기사들은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서 넘어간 자들을 부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시온이 이들에게 남긴 인상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기사들은 흠모하는 기사를 따라 서약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시온은 남작이면서 동시에 기사이니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기회의 사다리로 보였다.
그렇게 모두가 시온의 모습 하나하나에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덟 명의 기사들은 자들이 겪고 있는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그리고 시온 경의 공격을 받아내고 부상으로 그쳤다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포로를 반환하겠다.”
시온이 드디어 이곳에서의 협정을 완전히 끝내는 명령을 내렸다. 시온도 홀가분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운이 좋았던 것 같았다.
협정도 잘 됐고, 새로운? 부하들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힘의 크기도 어느 정도 감이 왔다.
시온은 피에르의 간단한 결박을 풀었다. 피에르는 끝까지 시온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게 오해를 사 수많은 자가 보고 있는 와중에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뭐하나?”
“아, 가라고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까닥하고 갸웃하던 시온이 다시 말했다.
“넌 자유다. 값은 치러졌고 협정은 맺어졌다.”
피에르는 그래도 불안한지 여러 번 시온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넘어갔다. 자유로움을 즐길 만도 하지만 얼굴은 어두웠다.
진형으로 돌아오고 나서 다른 자들이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입을 조심해라. 나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
피에르와 올드르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멍청한 녀석. 너 때문에 오히려 더 손해를 보지 않았느냐.”
“대체 저자는 뭐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의견이 좀 같아졌군.”
올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시온을 따라야 한다.”
“가문을 지키려면 그게 최선으로 보여.”
“지킨다고? 아니 내 생각엔······.”
둘의 대화는 길어져만 갔다.
ㆍㆍㆍ
마리 자링은 시온이 보낸 전서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협정을 체결한 것이었다.
‘거짓말이 아닐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로 이것을 모두 체결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거의 없던 일이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군.
-과연 마리 님이 안목이 있으셨다.
조금이나마 있던 작위에 대한 반대여론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그 정도로 시온의 협정 결과는 직접 봐야지만 이해할 수 있는 급의 수준이었다.
“시온 경에 대한 작위 수여에 대해서 수도에서 답변이 왔습니다.”
작위라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면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실권 자체는 자링 가문에게 있었지만, 관습적으로 수도에서 부여받게 하는 형식이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수도에서 받는 것이 급이 높았다. 바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귀족, 공작들, 특히 황제가 주관하는 이런 수여식은 너무나 가치가 높아서 이런 수여식을 받기 위해서 상상도 못 할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뇌물을 엄청나게 쓰는 경우가 기본적이었다.
그렇기에 수도에서 하는 수여식에는 정말로 특별나거나 유서가 깊거나 아니면 돈이 정말로 많은 신흥 가문만 받아들여졌다.
마리는 그런 이유로 인해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수여식을 언제로 잡을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은데, 해당 영지보단 펜부르크가 낫겠지?”
“그게, 마리 님. 시온 경을 수도로 보내라는 전언입니다.”
“?!”
“!!!”
“정말인가?!”
노년의 마법사가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땀을 닦았다.
“아........예. 제가 그래서 아까부터 드릴 말씀이 있다고....”
“아니 정말인가?”
마리가 한 번 더 되물었다.
“예. 여기 보십시오.”
비둘기가 날라 온 전서에는 분명히 인장이 찍혀 있었다. 수도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침이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내 시온을 뺏어가려고?’
‘벨저가 손을 쓴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시온에게 남작위 말고 따로 더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마구마구 들었다.
“긴급회의야.”
“예?? 어떤...”
“시온을 만족하게 할 만한 조건을 더 생각해봐. 지금 당장.”